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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악(五岳)의 새소리

원자핵공학과 나용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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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용수 교수

대한제국의 하늘이 저물어가던 고종 무렵, 판소리는 음악적인 세련의 정점에 이른다. 그 절정의 순간을 수놓은 다섯 명창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들을 '5명창'이라 부른다. 누가 처음 이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순조 때의 '8명창'이나 철종 무렵의 '후기 8명창'에 비견하여 자연스레 입에 오른 이름일 것이다. 이 다섯은 대체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일컫는다. 마치 오악(五岳)1)이 한반도의 하늘을 떠받치듯, 이들은 당대 판소리를 지탱하는 다섯 기둥이었다.

이들 5명창의 무대는 원각사(圓覺舍)2)였다. 원각사의 무대가 세워질 때부터 1930년대 중반 그들이 하나둘 타계하거나 무대를 떠날 때까지, 원각사는 이들의 피와 땀, 그리고 숨결이 스며든 신성한 판소리의 전당이었다. 특히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은 극장식 대중공연에 걸맞은 창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고, 저렴한 입장료와 예술적으로 세련된 소리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시대와 호흡하며 판소리의 숨을 더 멀리, 더 넓게 밀어 올렸다.

그러나 1910년 국권 피탈의 어둠이 조선을 덮자, 판소리도 일제의 교묘한 문화 침략에 점차 물들어갔다. 기방(妓房)의 유흥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이 예술을 지켜낸 것도 바로 이들 5명창이었다. 그들은 음반을 취입하고, 지방 공연에 나서며 판소리를 민중의 귀에 다시 되살려내려 애썼다. 1908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녹음이 김창환과 이동백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만 보아도 그들의 사명감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라디오의 등장과 함께 유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일본식 유행가들, 손쉽게 소비되는 신파극과 영화는 전통 예술의 자리를 무자비하게 침식해갔다.

이런 와중에도 그들은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꾼다. 1933년,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을 주축으로 조선성악연구회가 결성된다. 무려 130여 명의 명창이 운집한 이 모임은 후진을 양성하고 창극의 정립을 시도한 마지막 전선이었다. '춘향가' 전체를 다섯 시간에 걸쳐 공연하던 날, 백발의 노대가들이 주고받는 '농부가'는 관중을 도취의 바다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역시 판소리의 개성적 음색을 희생한 단체 공연이었고, 각 지역에 뿌리내렸던 고제(古制)의 정통 가법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 황혼의 끝자락, 1939년 3월의 어느 날, 이동백은 은퇴 공연을 가진다. 신문은 "만장한 청중은 감격과 도취의 도를 넘어서 자아를 잃어버린 지경이었다."라고 전했다. 김창룡(1935), 정정렬(1938), 송만갑(1939)에 이어, 이동백이 무대를 떠나자 5명창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5명창 가운데 이동백은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충청남도 비인에서 태어난 그는, 열세 살 되던 해에 처음 심청가를 듣고 그 길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토록 사람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소리라면, 나도 배워 효심을 전하고 싶다.' 소년의 결심은 고종 황제로부터 정3품 통정대부에 임명되어 어전에서 소리를 하는 위상까지 이른다. 그는 중고제와 동편제를 터득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구사했고, 절대음감의 소유자로 즉흥 편곡을 통해 당야한 선율과 성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일축판 춘향전>, <폴리도르판 심청전>과 <화룡도 전집>은 그의 예술적 정수를 담은 음반으로 지금도 전해진다. 2003년 3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이동백은 특히 '새타령'에 독보적이었다고 전한다. 잡가(雜歌) '새타령'은 우리 전통 성악의 세련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다양한 새에 얽힌 고사를 유쾌하게 늘어놓거나, 그 울음소리를 절묘하게 흉내 내어 청중을 사로잡는 곡이다. 새의 울음소리를 맛깔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필수이고, 이를 참신하고 개성 있게 풀어내려면 상당한 공력이 필요하다.

본래의 '새타령'은 중중머리 장단의 '새가 날아든다'로 시작되지만, 오늘날에는 여기에 '고고천변'의 한 대목인 '삼월 삼짇날…'을 덧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편, 적벽가 중에도 '새타령'이라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곡조나 사설 모두 잡가와는 사뭇 달라 중머리 계면조로 '산천은 험준하고…'로 시작된다. 그런데 <조선창극사>에 실린 이동백의 더늠 '새타령'은 잡가 계열이며, 이동백은 이를 자진모리로 부르고 있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일찍이 당대의 절창으로 손꼽혔다. 진주 이곡사라는 절에서 독공을 하다 당시 창원부사가 초청한 연회에서 그를 단숨에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게 했던 것이 바로 '새타령'이었다. 그는 판소리 공연 중 관객이 지루해할 기미가 보이면 느닷없이 이 곡을 뽑아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새타령'은 단순한 익살이나 기교에 머물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음과 땅으로 꺼질 듯한 저음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몰아치는 소리는 인간 목소리의 한계에 도전하는 동시에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소리로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리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특별한 울림이었다. 이동백의 '새타령'은 2025년 초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린 K-컬처 시리즈 전통 연희극 <광대>에서 재현되어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동백의 반주를 맡았던 유명한 판소리 고수이자 민속무용가인 한성준은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동백)이 원각사에서 소리하실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을 귀에 대고 듣고 계셨지요." 조선의 왕이 전화로 귀 기울였던 그 소리. 그것이 바로 이동백의 소리였다.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이동백의 '새타령'은 1929년경 빅터(Victor)와 1936년 경 폴리도르(Polydor) 음반사에서 축음기 판(SP)으로 발매되었다. 소개하는 폴리도르 판은 축음기 음반 특성상 3분 28초 짧은 분량이고 음질도 좋지 못하지만, 그의 기량과 음악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명반이다. 이동백 음반은 매우 희귀하여 구하기도 어렵고 경매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백만 원 이상의 상당한 비용을 들여야 구할 수가 있다. 필자는 오랜 기간 이 음반을 사냥 리스트에 올려 두었다가 골동품을 취급하는 온라인 상점에서 상태 좋은 음반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 산조 축음기 음반들과 더불어 필자의 최애 음반이기도 하다.

5명창은 전대의 유산을 마지막으로 계승하면서도 단순히 옛것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들은 판소리를 극장으로, 음반으로, 대중의 가슴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그 예술의 극치는 역설적으로 너무 높아서, 후학들에게는 넘기 힘든 벽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감탄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남는다.

이동백이 남긴 '새타령'은 아직도 강렬한 울림으로 우리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오악(五岳)에 스민 새소리는 오늘도 우리 예술의 하늘을 날고 있다.

그림2 1929년 경 빅터(Victor)사에서 발매된 이동백의 "새타령" SP 음반의 가사지 (음반번호 : Victor 49033)
그림3 이동백(李東伯, 1867년~1949년 6월 6일)
참고문헌
  • 1) 중국의 오악(五岳) 개념을 본떠 한국에서 신성시했던 동서남북중을 대표하는 다섯 산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동악 태백산, 서악 마니산, 남악 지리산, 북악 묘향산, 중악 송악산(또는 북악산)을 꼽는다. 이들은 조선시대 국가 제례의 대상이자 민족 정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2) 우리나라 최초의 황실 극장이자 국립 극장, 근대식으로 지어진 상설 실내극장으로 1902년 희대(戱臺)라는 이름의 궁내부 산하 황실 전용 극장으로 시작하여 협률사(協律社)를 거쳐 원각사(圓覺社)로 개명하였다. 판소리와 민속무용 등을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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