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칼럼
성장에 대한 공포가 해방에 이르는 길,
영화 <호랑이 소녀>
송아름(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장과 변화를 공포로 바라보는 상상력
휴대폰 카메라 앞에 발랄한 춤으로 모습을 드러낸 10대 소녀 자판(자프린 자이리잘)은 에너지 넘치는 학생이다. 학교 화장실에서 이 모습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친구 파라(디나 에즈랄)와 마리암(피카 장르)까지 한 장면에 들어올 때,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생생한 생명력을 발산한다. 그러나 즐거워하던 그들의 모습은 곧 사소한 듯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물건 하나로 어색해진다. 춤을 추던 소녀들은 옷을 갈아입고 파라는 자판이 브래지어를 한 모습을 보고 놀란다. 당황한 파라 앞에서 자판은 브래지어로 장난을 치며 별일 아니라는 듯 넘기지만 파라는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갑작스런 노크 소리로 세 학생이 후다닥 주변을 정리하며 이 장면은 급히 마무리되지만 자판과 파라 사이의 묘한 기류는 영화가 다루려는 있는 소녀들의 성장에 어딘가 불안한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성장 그리고 그에 동반된 변화는 필연이건만 영화는 이를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불안의 핵심으로 위치시킨다. 성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신체가 변해가는 자판과 작고 마른 파라의 몸, 그리고 그의 속옷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파라의 표정 등은 여성의 성장에 대한 편치 않은 시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불안을 추동하는 힘을 파라와 같은 소녀 개인의 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소녀들을 갈라놓고 혼란케 하는 것은 유구한 역사일 확률이 클 테니까. 그렇다면 소녀들을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 <호랑이 소녀>(아만다 넬 유, 2025)가 말레이시아 영화라는 점은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라는 국교, 일정 나이가 지나면 히잡을 써야 하는 소녀들, 이로 인해 몸가짐뿐만 아니라 성장의 흔적까지 규제당해야 하는 현실 등은 생명의 성장과 변화라는 당연한 이치에 공포를 장착하는 것을 이상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호랑이 소녀>는 이를 공포 속에 움츠러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발칙한 상상력 속에 위치시켜 그것에서의 해방을 성취해낸다.
이를 위해 영화가 선택한 것은 '바디 호러', 즉 신체의 극단적인 변형이나 변화에서 오는 공포를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장르를 생각했을 때, <호랑이 소녀>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꽤나 큰 실마리를 던져 준 셈이다. 제목만으로 주인공 자판의 모습이 호랑이처럼 매우 사납고 또 야생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점을 충분이 예상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어져야 할 질문은 과연'무엇이 자판을 호랑이로 변화시켰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성장과 변화에 대한 불편함은 이에 대한 상당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자판의 성장은 소녀들 사이에 어떤 균열을 가지고 왔는가? 이것은 어떻게 자판이 호랑이처럼 변하게 만들었는가? 과연 이러한 사태의 저변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았을 때 <호랑이 소녀>가 이야기하는 공포는 비단 특정 국가만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억압 속 여성의 신체와 그 결과로서 변형
12살인 자판은 너무나 낙천적이고 자유로운 소녀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날이 좋으면 날이 좋은 대로 자신만의 놀이를 찾아 자연에서 한껏 뛰고 뒹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자판의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놀기에 거추장스러운 히잡을 벗고 흙탕물이 얼룩덜룩 옷에 묻어 몸매가 드러난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엄청난 꾸지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판의 행색을 곧 집안의 망신으로까지 연결하며 몰아붙이는 엄마의 분노는 과할 정도이다. 자판을 집 밖으로 쫓아내며 내동댕이치기까지 하는 엄마의 행동에는 자판의 집이, 아니 이 사회가, 아니 이 국가가 이 어린 여성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적어도 12살 정도가 되었으면, 남 앞에서 몸을 많이 드러내어서는 안 되며 조신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이 현실이 자판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곧 자판은 생리를 시작하며 완전히 성장한 여성의 대열에 들어선다. 그러나 자판은 이러한 몸의 변화에 대해 어떠한 설명을 들어본 적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배운 적도 없다. 갑작스레 몸에서 흘러나온 피에 놀라 엄마를 부르지만, 엄마는 지금의 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간단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생리대를 건네주는 것으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만을 알려줄 뿐이다. 이로써 자판은 지금의 이 변화가 축하받아야 할 것이라거나 자신이 성인으로 한걸음 나아간 것이라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기회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불안한 만큼 감추어야 할 것이 되어 버린 생리는, 게다가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이 성장은 자판을 움츠러들게 한다. 여기에 현실은 자판이 자신의 변화를 감추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정해진 기도 시간에 '신성한' 곳으로 들어설 수 없는 생리하는 소녀는 역시나 이러한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호랑이 소녀>는 내 의지로 어떤 것도 좌우할 수 없는 당연한 변화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자판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판의 세계라 부를 수 있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는 자신의 성장으로 인해 갑작스레 흔들린다. 기도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판을 보며 상황을 눈치챈 파라는 자판의 몸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냄새가 난다며 거리를 두고, 점차 자판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친구들과 멀어진 자판은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걸스카우트에 까지 들어가며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지만, 갑작스레 사라진 친구를 구해 상을 받으면서 오히려 파라를 분노케 한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자판은 점차 자신의 몸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톱과 발톱이 힘 없이 빠지고 얼굴에는 가시와 같은 털이 자라며 머리카락이 뭉치로 떨어지는 상황은 더 이상 자판을 감당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처벌에서 벗어나 해방을 누리는 호랑이
중요한 것은 이처럼 기괴하게 변해가는 자판의 몸이 성장에 대한 당혹스러움 때문이라기보다 마치 처벌과 같은 주변의 반응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처음 생리를 시작했을 때가 아닌 기도실에 입장하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은 후,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자판의 변형은 곧 다양한 억압에 대한 신체적 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강해질수록 자판의 신체는 더욱 원치 않은 형상으로 변해갔고 점차 그의 몸은, 그리고 신체적 능력은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호랑이 소녀>는 자판이 공포에 갇히도록 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선택한 것은 자판이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드넓은 숲속에서 편안함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판의 곁에는 파라와의 갈등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친구 마리암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자판의 변화가 처벌로 인한 것이라면 그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순간 자판은, 그리고 그의 신체는 이 거대한 처벌을 거부한 해방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개인의 혹은 사회의 처벌을 나만의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호랑이처럼 변한 자판이 숲속 나무 꼭대기에서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처럼, 그 사회의 억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판의 부모는 그가 귀신에 들렸다며 주술사까지 불러 퇴치하려 하지만 도망가는 쪽은 오히려 주술사였다.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던 치료까지 밀어내는 자판의 모습은 더 이상 이 소녀에게 기존의 질서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처럼 <호랑이 소녀>는 소녀에게 가해진 억압을 몸의 변형을 통해 표현하고 또 긍정함으로써 그 이상의 변화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해 낸다.

영화의 내용을 넘어 <호랑이 소녀>의 감각적인 장면화는 자판이 보여주던 당당함을 구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영화는 바디 호러와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화면 전체에서 생기를 놓지 않는다. 숲과 계곡 등이 드러내는 원시성과 화면 전반에 드러나는 강력한 색채감, 빠르고 리듬감 넘치는 편집은 자판이 보여주었던 성장과 변화의 긍정과 정확히 맞닿는다. 자판이 괴물로 변해가는 외양에 대한 인식 역시 이러한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 변화되는 신체를 공포스럽게 바라보던 자판의 표정은 점차 편안해지며, 자신의 변화를 숲속을 편안히 누빌 수 있으며 높은 곳에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자유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이것으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더 이상 갇힐 필요 없이 마음껏 누빌 수 있는 곳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자판을 연기한 매우 자프린 자이리잘의 연기는 영화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는다. 신체가 변해가며 보여주는 광기, 그리고 그것으로 느끼는 자유를 표현하는 그의 몸은 마치 자판이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역시 한껏 즐기며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선택한다. 영화의 내외적으로 보이는 이 생명력은 곧 <호랑이 소녀>가 보여주고픈 여성들의 자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신선함으로 그린 성장에 대한 양가적 시선과 감정
자판의 변화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며 거리를 두었던 이는 친한 친구 파라였다. 파라는, 앞서 브래지어 사건에서도 드러났던 것처럼, 자판의 성장에 굉장한 불편함을 드러내며 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다루려 한다. 자판과 파라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자판이 먼저 성장하면서 파라보다 성적도, 걸스카우트에서의 성과도 좋아졌던 때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자판에 대한 파라의 감정은 그저 나와 다른 이를 놀리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즉 파라의 신경질적인 태도는 자판의 성장에 닿을 수 없던 질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누구보다 자판을 멀리하려 했던 파라가 성장에 상당한 경외를 품고 있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왜소한 자신과는 다르게 점차 여성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는 자판을 바라보는 사춘기 소녀에겐 자판과는 다른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파라는 그가 배우고 체득해 온 사회적 질서로 자판을 밀어내려 했겠지만, 그 질투의 저변에는 느린 성장에 대한 또 다른 억압 기제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 동남아시아 영화를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태국이나 대만, 최근에는 베트남 영화 등이 국내에서 개봉되었고, 그나마도 공포영화(태국, 베트남)나 청춘 로맨스(대만)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봉한 <호랑이 소녀>는 본격적으로 말레이시아 영화를 국내에 알린 첫 사례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2023년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고, 이후 세계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신선함을 인정받았다. 당연히 이러한 성과를 영화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국가의 영화라는 신선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원시적 풍경이나 종교적이고 민속적인 공포 등에 기울어져 보기엔 소녀들의 불안이 드러내는 공포는 너무도 많은 이가 겪었던 불안 그 자체였으며, 현재진행형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