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칼럼
아마츄어의 명반사냥이야기 쉰 한번째: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과 프로그레시브 록의 개화
기고자. 원자핵공학과 나용수 교수
비틀즈의 <Abbey Road>, 롤링 스톤스의 <Let It Bleed>, 레드 제플린 1집, 2집 그리고 앨비스 프레슬리의 <From Elvis in Memphis> 등으로 전설의 뮤지션들이 대중음악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던 1969년. 한 밴드의 앨범이 발매되었다. 앨범 커버도 요상하기 그지없던 'King Crimson'1)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밴드의 데뷔 앨범이었다.
록 음악에 재즈, 클래식, 심포니 음악 등을 접목시켜 완성된 이 정체 모를 장르의 앨범은 훗날 록 음악 전반과 실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태동하고 있던 '프로그레시브 록'2) 음악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이 장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위대한 기타리스트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더 후(The Who)의 리더였던 피트 타운젠드(Pete Townshend)는 이 앨범을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이라 평했다.
이 앨범은 훗날 ELP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에서 활동하게 되는 그렉 레이크(Greg Lake)의 감미로운 보컬과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의 'Fripp-like sound' 기타, 이언 맥도날드의 재즈적이며 심포닉한 건반/멜로트론 그리고 플룻, 마이클 자일스(Mike Giles)의 재즈 기반 드러밍, 그리고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의 깊이 있는 가사로 작품의 완성도를 견인했다.
앨범에는 총 다섯 곡이 실려있는데, 첫 곡 '21st Century Schizoid Man'은 21세기 정신분열증자(조현병자)란 뜻으로 이후 그룹의 대표곡이 된다. 롤링스톤(Rolling Stone) 매거진은 "7분 반 길이에 록의 파워, 재즈의 즉흥성, 그리고 클래식의 정교함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화롭게 결합된 작품"이라 평했다. 이처럼 복잡한 구성 때문에, 처음 들을 때는 난해하지만, 곱씹을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곡으로 훗날 많은 밴드에 영향을 주고 수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I Talk to the Wind'는 앞 곡과 대비되어 감미로운 보컬과 맥도날드의 부드러운 플룻이 안내하는 따뜻한 곡이다. 훗날 수많은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앨범이 플룻을 주요 악기로 장착하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영국의 Opus III, 일본의 Polaris 그룹 등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故 신해철씨는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가 운영하는 음악 웹진 '이즘(IZM)'에서 '나의 명곡 15곡' 중 첫 번째로 꼽은 바 있다.
'Epitaph'는 9분에 육박하는 대곡이지만 몽롱한 기타와 멜로트론 그리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게 하는 곡이다. 국내에서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명곡이다. 곡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혼란(confusion)이 나의 묘비명(epitaph)이 될 것이다'라는 가사처럼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비판하며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혼돈을 그리고 있는데, 냉전 시대와 인류 갈등에 대한 저항과 인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질 세상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노래한 시대를 초월한 명곡이다.
'Moonchild'는 곡 제목처럼 잔잔하고 평화롭지만 아름다운 꿈과 즉흥적인 환상이 섞여 있다. 곡의 처음 2분 30초 동안은 'The Dream'을 부제로 멜로트론 연주가 깔린 아름다운 멜로디와 감미로운 보컬이 장식하고, 이어 남은 10분은 'The Illusion'을 부제로 즉흥적 아방가르드로 곡 색채를 바꾼다.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은 멜로트론으로 연주되는 4마디 리프를 토대로 매력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 'The Return of the Fire Witch'와 'The Dance of the Puppets' 부제가 붙은 두 파트로 구성되며, 곡 끝에 주요 테마가 재등장하며 끝난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창의성과 복잡성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이 앨범은 커버 아트로도 매우 유명하다. 기괴한 앞면 커버는 첫 번째 곡 제목처럼, 당시 기준으로 30년 후 등장하게 될 21세기 정신분열증 환자를 그린 것이다. 훗날 수없이 패러디되기도 하였다. 이는 밴드의 친구였던 컴퓨터 프로그래머 배리 고드버(Barry Godber)의 작품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뒷면 커버에는 그의 귀가 우주로 뻗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Gate Folder 커버를 펼치면 킹 크림슨의 얼굴이 나오는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입을 가리고 보면 커다란 슬픔이 눈에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버트 프립은 이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앨범의 음악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고드버는 안타깝게도 앨범 발매 직후 심장마비로 24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킹 크림슨은 음원 저작권에 유독 민감하여 YouTube에서조차 이 앨범을 들을 수 없어 음반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을 한참 애타게 했다. 그러다 2020년 말에 공식 음원이 YouTube에 업로드되었다. 이로써 음반을 사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청년들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이 이 명반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앨범은 연주를 녹음했던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가 실종된 바람에 초판이 희귀하고 높은 가격에 거래되곤 했다. 다행히도 2003년에 마스터 테이프가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초판은 영국 아일랜드 레코드사에서 발매되었는데, 레이블에 핑크 'i' 로고가 있으며 매트릭스 번호가 A1/B1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음반은 A2/B2인데 아래 사진을 보면 레이블 위쪽 검은색 부분에 스탬프로 음반 번호와 함께 A면에는 A▽2, B면에는 B//2가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이 매트릭스 번호로 음반이 생산된 공장과 시기를 알 수 있어 초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A1/B1은 존재 여부가 팬들 사이에 논란이 될 정도로 희귀하여, 앨범 발매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discogs.com에서 조차 A1/B1 기록은 찾을 수 없고 A2/B2가 초판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A1/B1이 거래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 극소량이긴 하지만 A1/B1이 초판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앨범 이후 여기에 자양분을 받은 수많은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게 되나, 정작 킹 크림슨은 1집의 성공 이후 잦은 멤버 교체로 몸살을 앓고 이렇다 할 걸작을 내지 못하다 1974년 불후의 명곡 'Starless'를 담은 <Red> 앨범으로 다시금 록 음악사의 기념비를 세운다.
누군가 어머니께서 'Moonchild'를 본인 장례식에서 사용해 달라고 했다는 YouTube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전위적 즉흥연주, 느림과 빠름,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얼기설기 섞여 있는 이 음반은 뜰에 앉아있는 킹 크림슨처럼 마치 알게 모르게 또는 얕게 깊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21세기 우리 인생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참조
1) "King Crimson"은 성경에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가 혈혈단신으로 450여 명의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했다고 하는 바알신, 즉 바알세불 또는 마왕 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밴드의 리더인 로버트 프립은 이 단어가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아랍어 어구 'B'il Sabab'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2) 록 음악의 장르 중 하나.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 재즈, 사이키델릭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록 음악에 차용한 장르를 뜻한다. 보컬과 함께 악기 파트도 강조되며, 전주, 간주가 긴 편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