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교수 칼럼
선박이 만든 파도를 계산하여 발표하다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본문

1976년 공과대학은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해 봄 졸업식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다소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였는데 학과는 나에게 관악 캠퍼스로 학과 시설 이전 업무를 맡으라 하였다. 이전 업무의 중요 내용은 관악 캠퍼스에 새로운 선형시험수조를 동경대학의 Inui 교수가 제안한 규격에 맞추어 건설하고 시설에 적합한 계측기기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선형시험수조는 건축도면이 확정된 상태였으며 1975년 연말 일본정부 무상원조 자금(JGG 자금)으로 계측기기들을 발주한 상태였다. 발주한 주요 계측기들은 선형시험수조의 규격에 따라 설계하여야 하는 주문 생산품이었으므로 1976년 초부터 공급업자로부터 도면 승인 요청이 쇄도하였다. 졸업 후 산업 현장에서 기계설계 업무를 담당한 경력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도면 검토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과는 새로이 건설하는 선형시험수조를 담당할 교수를 해외에서 초빙하려 하였으나 1학기를 마칠 때까지 적임자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새로운 시설을 학과 교수 중에서 담당하여야 하였으며 학과는 도면 검토 과정에서 시험 설비 이해도가 높았던 나에게 선형시험수조를 담당하라 하였다.
선형시험수조 담당이 결정되며 나는 콜롬보 계획에 응모하여 1976년 겨울방학에 일본에서 대학과 연구기관의 시설을 돌아보며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Hiroshima 대학에서 Nakato 교수는 본인이 선박 유체역학 강의를 수강하며 정리하였던 노트를 보여 주셨다. 노트의 첫 장에는 Watanabe 교수의 노트를 Tanaka 교수가 필사한 것을 Nakato 교수가 필사한 것이란 메모가 달려 있었다. 노트의 내용은 물속에서 이동하는 용출 특이점으로 선박을 나타내고 수면에 나타나는 압력의 변화로 파도를 유추하는 이론 해석법이었다. 마침, 나는 용접 현상을 이동하는 열원이 철판에 일으키는 온도 분포로 해석한 일이 있어 수학적으로는 유사성이 많아 흥미로운 문제였다. 나도 공부해야 하는 조파저항을 이론적으로 계산하는 내용이어서 Hiroshima 대학에 체류하는 기간 중 나는 우리말로 번역하며 필사하는 네 번째 필사자가 되었다. 1977년 2월 초에 귀국하여 대학원 학생들에게 트레싱지에 먹물로 정서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를 청사진으로 구워 교재로 제작, 학생들과 함께 일과 후 실험실에서 세미나로 공부하였다.

우리나라가 뒤늦게 조선 산업에 뛰어들어 선박 건조 실적이 오르며 일본 학자의 한국 방문이 늘어났으며 이들이 발표하는 논문을 이해하는 데 노트를 필사한 자료로 함께 공부한 내용은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학회 창립 80주년을 앞두고 있던 일본은 국제 선형시험수조회의(International Towing Tank Conference: ITTC)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조선 산업이 부흥하였고 선박의 대형화를 이끌고 있던 일본은 학문적 역량을 내보이려고 1957년부터 ITTC가 선박의 저항 추정에 사용하던 2차원 해석법을 3차원 해석법으로 개정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중동전쟁 이후 일본은 선형 대형화를 주도하여 1973년에 만재 배수량이 484,000톤인 Globtik Tokyo를 건조하였다. 해운 업자들은 100만 톤급 선박 출현을 예상하기에 이르자 ITTC는 1978년 새로운 3차원 저항 추정법을 채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해군연구소는 선박의 파도로 인한 저항을 전산기로 추정하는 국제회의를 Washington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유동 해석에 최초로 유한요소 해석법을 도입하였던 배광준 박사는 수학 선형인 Inuid S201 선형과 Wigley 선형을 표준 선형으로 제시하고 ITTC 회원 기관들이 같은 푸르드 수에서 조파저항을 계산하여 비교하는 ‘조파저항 전산에 관한 워크숍’의 의장으로 회의를 준비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선형시험수조는 1962년 ITTC의 회원 기관으로 가입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형시험수조였다. 그리고 공과대학에는 1970년 응용과학 연구소 전자계산실에 IBM 1130이라는 기억용량이 32 Mega bite인 소형 전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학에 함께 입학하였던 배광준 박사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조파저항 이론 계산법을 조금 이해하는 상태였을 뿐이었으나 용기를 내어 회의 참가를 결정하였다. 현재 PC 수준에도 못 미치는 IBM 1130 전산기였으나 공과대학 교수와 학생이 함께 사용하여야 하였으며 코딩용지에 Fortran IV로 프로그램하여 전산실에서 펀치카드에 옮긴 후 카드 판독기로 읽어 교정을 보아야만 계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원 학생이던 서정천(명예교수)이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계산에 매달린 덕에 1979년 여름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발표 자료만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식 서식에 맞추어 작성한 논문이 기일 내 도착하지 않았다는 확인 연락이 있었다.

서식을 다시 요청하고 제출 기일을 12월 초로 연기하고 해외 출장 신청을 하였으나 회의를 미국해군연구소가 개별 초청으로 조직하였으며 ITTC 회원 기관에 한정하여 홍보되었을 뿐이어서 일반 국제회의에서와 같은 공식 홍보 자료가 없었다. 해외 논문 발표 승인을 받으려면 필요한 증빙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교무 행정실에서 처리할 수 없다고 하여 학장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다. 하지만 증빙 자료도 부족하고 제대로 작성된 논문도 없는 상태였으므로 학장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까다롭게 사실 확인에 우선하였다. 미국해군연구소에서 보냈다는 우편물에 대해 대학 우편물 취급 경로를 추적하였더니 서무 행정실에서 해외 우편물을 분류하는 과정에 학과 표기 없이 공과대학의 Prof. H.C. Kim으로 표기된 우편물이 건축과 김희춘 교수실로 전달되었다가 기계과로 전달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기계과에서는 공과대학 학장 임기를 마치고 인하대 총장으로 부임하신 김희철 총장실로 보낸 사실을 확인하였다. 결국, 2주 이상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인하대 총장 부속실로부터 우편물을 받아 해외여행 신청 행정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의 발표 논문이 미완인 상태였으므로 학장 승인을 받기까지 마음 졸이며 학장을 면담하려 부속실에서 대기하던 일들이 아직도 눈앞에 그려진다.

어렵게 해외여행 승인 절차가 진행되어 해외여행자 보안 교육을 받을 때는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였으며 비자 발급을 받고 출국 준비를 마쳤을 때는 은행 시간이 마감되어 환전할 시간이 없었다. 어렵게 비용을 준비하였으나 출국 시점에는 환전 기록이 없어 현금 일부를 분산하여 짐과 담뱃갑에 숨겨야 하였다. 12·12 사태로 정국이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출국하였으며 Los Angeles에서 Washington행 항공기로 갈아탈 때는 로키산맥을 내다보려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으나 막상 이륙 이후 바로 잠이 들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의 첫 번째 국제회의에서 발표 내용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작은 용량의 전산기로 계산한 결과여서 자랑스러웠다. 1976년 겨울 일본에서 만났던 학자들과 서구의 저명 석학들을 만나 교류하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미국해군연구소 주관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은 나의 첫 번째 해외 논문 발표였다. 미국 방문 기간 중 이정묵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조선학회 산하 연구회인 이론 유체역학 연구회(H5 panel Meeting)에 참석하였던 일과 조선과가 있는 대학들을 찾아 시설들을 살필 수 있었던 일은 관악 캠퍼스의 선형시험수조 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다. UC Berkley에서 Wehausen 교수를 만났을 때 퇴임하신 후 서울대학에 초빙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제도적 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회의에서 만난 석학으로부터 한국으로 귀국한 제자를 부정적 표현으로 소개하는 말을 알아듣고도 이를 제대로 관계 기관에 전달하지 못하였음이 때로는 아쉬움으로 되새겨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