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칼럼

음악 칼럼

초절기교의 사색가

원자핵공학과 나용수 교수

본문

나용수 교수

음악을 듣다 보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연주를 찾기 마련이지만 이와 더불어 초절기교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연주를 찾을 때도 있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으며 복잡하고 현란한 음표를 무시하듯 왼손으로는 바이올린 지판을 거침없이 활보하고, 오른손으로는 활을 시원하게 내지르면서 강렬하게 청중을 타격하는 연주는 가슴을 뻥 뚫고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사이다처럼 날려 버린다.

레오니드 코간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 나의 바이올린 스승이자 클래식 음악을 참 좋아했던 친구와 함께 어느 날 압구정역 근처에 있던 신나라 레코드에 간 적이 있다. 오늘은 어떤 음반을 집을까?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그 친구는 "이 사람 연주를 들어봐야지!" 하면서 CD 두 장을 집어줬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연주자에다 음반 레이블도 듣도 보도 못한 음반사였다. 이태리의 Arlecchino에서 발매했던 레오니드 코간의 <베토벤/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CD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헝가리 무곡> CD였다.

그러나 기숙사에 돌아와 CD 플레이어에 이 CD를 넣고 볼륨을 높였을 때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은 가히 압권이었다. 당시 내가 최고라고 알고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들, 야사 하이페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나단 밀스타인, 아르투르 그뤼미오, 이차크 펄만, 기돈 크레머, 자크 티보, 지네트 느뵈, 정경화까지, 그들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들던 그 순간을.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레오니드 코간은 나의 최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레오니드 코간(Leonid Kogan, 1924년 11월 24일 ~ 1982년 11월 17일)은 구소련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에서 얌폴스키를 사사하면서, 4 옥타브 스케일을 연마하여 지판(指板) 위 왼손 기교를 완성했다, 그리고 1941년 모스크바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여 화려하게 데뷔한다.

1947년 프라하 세계 청년 축전 1등에 이어, 27세가 된 1951년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이로운 연주로 우승을 거머쥐었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오이스트라흐의 극찬을 받았다.

1955년부터 영국 및 프랑스 투어를 시작하고 바흐, 파가니니,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 협주곡, 랄로 스페인 교향곡 등을 녹음하였다. 그리고 1958년 미·소 문화 협정에 따른 제1진으로서 미국을 방문해서 연주회를 가졌다. 미국 투어 시 보스턴 교향악단과의 협연에서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20분 동안 열광적인 커튼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위대한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해서 명성을 이어갔다.

그는 1960년까지 서방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으로 활동했지만 조국으로 돌아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76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으며 서방세계와 다시 조우하였으나, 그 기쁨도 잠시, 1982년 연주 여행 중 기차 안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향년 58세에 타계하였다.

그가 영국 콜롬비아에서 발매했던 <베토벤 (음반 번호 : SAX 2386)>, <브람스 (음반 번호 : SAX 2307)>, <차이콥스키 (음반 번호 : SAX 2323)> 협주곡,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음반 번호 : SAX 2329)>, 그리고 <바이올린 소나타집 (음반 번호 : SAX 2531)> 등 다섯 개의 스테레오 LP 음반은 클래식 애호가 및 음반 사냥꾼들의 1순위 타깃이 되어 있다. 특히 최근 중국 음반 콜렉터들이 대거 몰리게 되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 10,000달러를 호가하고 있다. 다행히도 최근에 이 앨범들이 모두 재발매가 되면서 저렴한 가격에 그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코간의 음반은 CD 또한 고가로 유명한데, 독일 Ariola Express에서 발매한 그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CD는 상태에 따라 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거래되고 있다. Arlecchino 레이블은 30개가 넘는 그의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이들도 꽤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그림2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Columbia SAX 2386)
그림3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Columbia SAX 2307)
그림4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Columbia SAX 2323)
그림5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
(Columbia SAX 2329)

친구가 소개해 줬던 Arlecchino에서 발매된 코간의 CD 두 장에 감격한 나는, EMI에서 'artist profile' 시리즈 중 하나로 발매된 그의 CD를 즉시 구매했다. 이 음반은 1993년 2 for 1 염가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다. 그런데 이 음반도 희귀 CD가 되어 현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고 가격도 높게 책정되고 있다. 현재 Discogs를 통해 올라온 음반들도 가격이 30만원을 호가한다.

소량 발매로 인해 고가로 거래되는 한국 대중음악 CD와 달리, 보통 유명한 클래식 음반들은 메이저 음반사를 통해 대량 발매되고 또한 수차례에 걸쳐 다양하게 재발매되어 보통 고가에 거래되지 않는다. 이런 클래식 음반치고 코간의 CD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기존에 발매된 음원을 묶어 컴필레이션으로 발매한 염가반은 보통 시간이 지나도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것이 일반인데, 이 음반은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해석하자면 당시 레오니드 코간의 음반에 대해 팬들의 갈증이 있었는데, 이 음반이 제 시기에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다는 점을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음반이 EMI 소속 거장들의 전설적인 녹음을 2CD에 담아 염가로 판매하기 위한 'artist profile' 시리즈로 발매되었는데, 이 시리즈가 재발매되지 않아 유독 인기 있었던 코간의 음반이 희귀반으로 남게 되었다. 다행히 최근 Warner Classics에서 CD를 재발매해서 그나마 저렴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마저도 점차 품절이 되며 가격이 올라가는 추세이다.

이 음반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랄로 스페인 교향곡',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등 코간의 전성기 시대의 명연을 2CD에 담고 있다. 코간은 서른 다섯 나이가 된 1959년 한 해에 이 대곡들을 모두 녹음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게다가 당시는 EMI에서 최신 하이파이 스테레오 기술을 도입한 시기로 이 음반은 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특히 브람스와 랄로는 EMI 전설의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Walter Legge)가 참여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이 음반에 실린 모든 곡이 훌륭하지만, 특히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수많은 명반이 존재하지만, 그 중 이 음반에 실린 콘드라신 지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반주의 코간 연주는 클렘페러 지휘 프랑스 국립 라디오 교향악단 반주의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와 더불어 최고로 손꼽힌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자라고 표현하자면 오이스트라흐는 사자를 달래면서 길들였던 반면, 코간은 정면승부하여 사자를 굴복시켰다고 평하기도 한다.

코간은 야사 하이페츠와 요제프 시게티를 존경한다고 했다.

고금을 통해 최고의 비르투오조로 추앙받는 러시아의 대바이올리니스트인 하이페츠의 연주에 대해 "나는 그의 연주회를 빠짐없이 들었고 그의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회상할 수 있다. 그는 내게 연주가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시게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금부터 뒤쫓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림6 레오니드 코간(Leonid Kogan, 1924년 11월 24일 ~ 1982년 11월 17일)

시게티는 하이페츠와 정반대로 기교가 좋지 못했지만, 근엄함과 악곡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구도자적인 음악성으로 족적을 남겼던 바이올린의 거장이었다.

코간의 연주에는 이처럼 흔들림 없는 기교로 무장한 하이페츠와 구도자적인 시게티가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저역이든 고역이든 어느 음역에서나 풍성하면서 분명하고 매끈한 톤을 유지하면서 깊은 사색의 경지를 들려준다. 폭발적인 기교가 자연스레 들리는 이유는 내밀한 사색의 힘을 억제하고 단련한 결과이다.

뭔가 나를 대신해서 내 안의 엉클어짐과 답답함을 분출하고 싶을 때, 코간의 바이올린은 기꺼이 해방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현은 은빛 위로가 되어 마음을 감싸 줄 것이다.

지난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