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칼럼
교육이라는 현상의 연대기
- 한국 영화가 그려온 학교와 아이들
송아름(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해와 피해의 영역으로서의 교육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그 최종 급부는 인격의 성장에 있다. 기술이든 지식이든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성장시켜 한 사람이 인간적인 성품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간적 돋움보다 이를 위한 방법인 지식과 기술이 더 중요해진 지 오래고 교육은 위기와 마주했다. 교육과 '문제'라는 단어가 더 쉽게 연결되는 오랜 상황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움직이는 영화라는 매체를 생각할 때(특히 한국 영화는 이 부분이 매우 강화된 영역이다), 교육의 '문제'는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었다. 한국 영화에서 교육은 문제로 내세우는 영역이 조금씩 바뀌면서도 날카로웠고 한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도 했다. 기성세대의 억압이라고 생각됐던 교육은 계층의 문제를 담고, 인식하지 못할 만큼 스며든 강압으로 자리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는 한국 영화가 그려온 교육에 대해, 학교와 아이들의 모습에 대해 천천히 곱씹어보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적 때문에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케 한 것은 1986년 중3 학생의 자살이었다. 친구가 필요했고 여유 있게 꿈을 꾸고 싶다던 학생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 '성적이라는 올가미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다는 긴 유서를 남겼다. 이를 반영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강우석)는 학생의 괴로움을 부모의 강압과 대치시켰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 있다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을 성적이자 대학으로 몰아가는 것은 곧 나를 이해하지 못한 윗세대의 폭력이었다. 성적에 집착하는 은주(이미연)와 순수하고도 열정적이지만 성적이 바닥인 봉구(김보성)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부모님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를 너무도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봉구를 만날 때 은주는 숨통이 트였지만 그만큼 성적은 떨어졌고 그의 선택은 제목을 따온 그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일종의 선악 구도로 교육의 문제를 설명한다. 학생들은 순수하며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려는 선한 이들로, 부모는 잘되라는 채찍질을 잘못 휘두르는 악한 이들로 구분되며 결국 선의 희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부모이며 성인이며 경제권 자로서도 우위를 지니는 기성세대와 이들의 보호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강한 자의 억압으로 비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했다. 이러한 시각은 약 10년 뒤 <여고괴담>(1998, 박기형)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과거의 진주는 무당의 딸로 학생과 선생들 사이에서 모두 배제된 이였다. 진주가 가장 친했던 친구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은영(이미연)이었고 선생님은 이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떼어놓으려 했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학생들 관계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소영(박진희)은 공부를 잘하지만 특별한 꿈이 없이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였고, 만년 2등인 정숙(윤지혜)과 친했지만 타의로 멀어졌다는 것이 드러난다. 성적이나 집안 환경으로 친구가 될 가능성을 규제하교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모습은 공포의 한 양상으로 <여고괴담>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과거의 은영은 선생님이 되어 모교로 돌아왔고 귀신이 된 진주를 보며 내가 잘할 것이라며 눈물 흘렸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겠지만, 적어도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성적으로 아이들을 구별하는 동안 몇 년씩이나 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학생들은 소외되어 있었고 스스로의 가치를 찾지 못했다. 과거 한국 영화에서 교육의 현장은 세대 간 갈등의 한 모습인 듯 보였다. 도무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집단은 한쪽이 한쪽을 억압하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고 이는 분명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했던 첫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2003) 속 <신비한 영어나라>가 아이를 위한다며 R과 L의 발음을 위해 아이에게 부모가 혀 수술 시키는 내용을 삽입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이때까지 교육은 부모가 아이는 미래를 담보로 한 복속 관계를 설정하게 한, 아이들의 적과 같이 그려지고 있었다.
부모의 힘이 곧 나의 성적으로, 힘으로
이처럼 교육의 문제를 아이들과 기성세대의 대립으로 그리는 것은 아이들은 학창 시절 자유와 우정을 원하며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아이다운 순수한 마음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그 시간을 낭만적으로 남기고 싶어 할 것이라 상상하는 것이다. 어떤 불순한 의도, 즉 과도한 경쟁이라거나 서열과 같이 사람 사이를 나누고 구분하는 닳아버린 이들의 생리는 아이들에게 결코 도달할 리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가로 놓여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질문이 2010년대 중반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깊게 사회적 비극을 묘파하고 있다.


영화 <명왕성>(2013, 신수원)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부모와 갈등하지 않는다. 부모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아이들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듯 후경화되고 아이들도 이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왕성>에서의 갈등은 아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1등을 놓고 싸우는 성적 중심의 경쟁을 넘어 사회 계급 구조의 고착까지를 건드린다. 더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을 위해 명문 사립고로 전학을 온 고3의 준(이다윗)은 처음 받아보는 처참한 성적에 아득해진다. 준은 전교 1등만 하는 유진(성준)이 비밀 스터디 그룹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곳에 들어가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유진은 스터디를 미끼로 준에게 점점 과한 요구를 하게 되고 준은 그들이 상위 1% 안에 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명왕성>은 '토끼사냥'이라는 스터디가 어떤 행태로 돌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또 유지할 수 있게 된 이유로 타고난 배경을 배치한다. 한 달에 천만 원 이상의 과외비를 쓸 수 있는 이들은 자신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이와 그러지 못하는 이를 구분할 권한을 가진다. 잠시나마 그들을 쫓아보려 했던 준은 자신은 가정 환경상 결코 그들과 동행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비참해진다. 즉 토끼사냥을 함께하는 이들은 부모와의 갈등을 빚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부모의 재력과 능력이 곧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 최고의 무기이며, 그것을 지킬 방법이 무엇인지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준과 같은 이들은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없으며 늘 뒤처지고 패배하는 삶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준은 토끼사냥을 했던 이들을 스스로 응징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고 이는 결국 학교에 경찰까지 불러들이기에 이른다. 준을 달래려는 경찰에게 준은 이야기한다. 매일매일 앞에 달려가는 애들 등짝만 보며 달리는 기분이 어떤지 아느냐고. 이제 열아홉인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명왕성>은 더 이상 꿈을 꾸고 노력하는 것으로 좋은 교육을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교육 내에 또 다른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고 그것이 곧 이후의 서열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데까지 이른다. <명왕성>은 더 이상 아이들의 발랄한 학창 시절은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학교 현실을 보여주었다.
진심의 선의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불행은 어디에서부터, 무엇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을까? 작년 개봉했던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과연 이렇게 무자비한 교육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SF적 상상력 속에서 녹여낸다. 11살인 동춘(박나은)은 학원 스케줄에 따라 하루하루 루틴이 정해진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왜 이것들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동춘은 열심히 하면서도 지쳐간다. 이즈음 동춘은 우연히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 보이는 막걸리 한 병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소통을 시작한다. 톡톡, 토도독. 마치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한 소리에 집중하는 동춘은 점차 비밀을 향해 달려가고 그 끝에는 이 교육 문제라는 현상에 너무도 거대한 실험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걸리가 알려줄거야>는 아이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수많은 선의가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 아이들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발표회에서 동춘이 쓰러지거나,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했었지만 결국 퇴사한 후 가족들과의 연을 끊다시피 하고 있는 외삼촌 영진(김희원)의 모습 등은 지금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보장된다는 듯 달래왔던 말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사회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것이 과연 아이가 원한 것이며 또 할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한번쯤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대학의 선택 과목이 바뀌면 학원도 바뀌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만큼 활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동춘의 모습은 이를 매우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동춘은 열심히 한다. 그리고 잘한다. 이에 부모의 기대는 커지고 아이는 견딘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동춘의 노력은 조금씩 더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지만 착한 아이는 이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주어진 공부에 매진한다. 이러한 동춘의 캐릭터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거나 아이들과 잘 섞이지 않으며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 듯한 모습으로 찬찬히 형상화된다. 태권도에 미술, 심지어 페르시아어까지 배워야 하는 동춘이 막걸리의 신호를 듣고 나서야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아이들에게 어떠한 탈출구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열심히 하고 착할수록 아이들이 힘들 수밖에 없는 구조 역시 동춘이라는 캐릭터가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냉정하게 아이들을 채찍질하던 부모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에 등장하지 않는다. 동춘의 엄마와 아빠는 동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최대한 이 학원이 너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를 설명하려 하지만 동춘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즉 더 이상 질타할 정도의 부모뿐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이들까지도 매우 선하고도 악의 없이 아이들을 괴롭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동춘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최대한 열심히 하려 하지만 '왜?'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냥 하면 된다는 말은 동춘을 설득하지 못했고 널 위한 것이라는 말은 지금 힘든 이 상황을 의아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아함을 표하는 것은 더 많은 학원을 다니는 일로 연결될지도 모르며 엄마 아빠를 실망시키는 길이 될지 모른다. 동춘이 막걸리를 실은 채 내달리는 모습은 그래서 안타까우면서도 응원하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의 교육의 현장은 그리 많은 작품으로 이야기되지는 않았다. 이는 그만큼 예민한 문제라는 점을 방증하는 것일 테다. <명왕성>이 폭력적이며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이후 영화는 재분류 신청 후 청소년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어떤 지표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 현재의 상황을 통렬하게 반영하며 교육에 대해 묻고 있다. 애초에 교육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느냐고. 만약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그 이유는 어디에, 누구에게 있느냐고. 과연 지금의 교육은 누구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