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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왜 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을까
- 루벤 외스틀룬드, <슬픔의 삼각형> -

기고자.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수향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평론가

외스틀룬드식 불편한 유머의 세계

1974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스웨덴 감독인 루벤 외스틀룬드(Ruben Östlund)는 2017년 <더 스퀘어(The Square)>, 2022년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으로 두 차례나 칸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22년의 칸은 우리에게 <헤어질 결심>의 감독상 박찬욱과 <브로커>의 남우 주연상 송강호로 기억되는데, 당시 더 높은 평점을 받았던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깜짝 대상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어떤 점이 필모그래피의 양이 많지도 않은 젊은 감독에게 엄청난 상을 연거푸 주게 했을까.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

외스틀룬드 감독은 영화 예술을 활용한 미학적 재현이나 현실에 대한 감정적 동화 대신, 중산층 이상의 계층 구성원들에 대한 냉소, 폭로, 비꼼이라는 수사적 장치를 영화의 서사적 동력으로 구성한다. <더 스퀘어>에서는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을 중심으로 소수화된 엘리트주의 중심의 과시적인 미술 시장,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 감상자들의 아이러니, 미학적으로 형해화된 퍼포먼스 예술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 등 현대 예술의 여러 가지 문제적인 측면들을 지적한다. 그러는 한편, 젊고 잘생긴 백인 남성 엘리트로서 크리스티안이 지닌 위선적 행태들이 웃음을 유발한다. 그는 젠더, 계층, 인종, 난민 등 여러 측면에서 사회적 정의와 도덕에 부합한 인물로 자임하지만, 그럴듯한 말과 논리와는 달리 이를 위반하는 속내와 행동을 보여준다.

'더 스퀘어'라는 큰 기획의 전시를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하지만 점점 표류하게 되는 것은 말 그대로 그가 표리부동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형상(sculpture)처럼 보이는 예술품들도 아주 작은 균열들이 조금씩 생기면 결국 갈라지고 허물어지고 말듯이, 완벽해 보이는 크리스티안의 공들여 쌓은 삶과 명성들도 작은 해프닝들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흔들리게 된다. 2시간 3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과 극중 원숭이를 흉내내는 퍼포먼스 행위 예술 장면 등이 영화 속 상류층 예술 관객뿐만 아니라 실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상당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외스틀룬드는 영화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관객들에게 불편한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야심만만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전작에서 보여준 감독의 자의식은 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여전히 상류 계급의 위선과 허영을 말하기 위해 그들을 급전직하시키는 실험을 꾀한다. 또 근래의 영화들이 지닌 정치적 입장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편향성 문제,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에 대한 불편한 논쟁을 우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갑론을박 자체를 겨냥하여 젠더, 인종, 계층, 경제적 세계관, 장애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뒤집어(Mirroring)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다만, 언제나처럼 외스틀룬드는 유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토사물이 쏟아지는 2부만 잘 견딘다면 꽤 웃긴 블랙코미디 영화 정도로 감상할 수도 있다.

삼각형 모양의 슬픔을 지닌 칼의 미간

이 영화는 <1부 칼과 야야(PART1 CARL & YAYA)>, <2부 요트(PART2 THE YACHT)>, <3부 섬(PART3 THE ISLAND)>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영화 전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칼과 야야는 연인 사이로 둘 다 패션모델이자 인플루언서지만, 야야가 더 유명하다. 칼은 데이트 비용 문제로 야야와 다툰다. 둘은 광고 협찬으로 부자들만 타는 크루즈에 승선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양한 상류층 사람들을 만난다. 부자들은 하고 싶은 것을 전부 요구할 수 있으며 팀장 폴라는 승무원들에게 'No'를 절대 하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여정의 꽃인 '선장 주최 만찬'이 열리는 밤, 폭풍에 흔들리는 배로 인해 승객들은 멀미로 토사물을 쏟아내고 변기 등에서 역류하는 오물들로 배는 난장판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해적들이 출몰하고 수류탄이 터지면서 배는 표류하게 된다. 칼과 야야를 비롯해 8명만이 목숨을 건져 작은 무인도에서 정신을 차린다. 무인도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고 생존을 위해 이들은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주인공 칼(해리스 딕킨슨)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이다. 1부가 젠더 갈등, 2부가 경제적 계층 문제, 3부가 이 모든 것을 뒤집도록 설정된 무대 같은 공간이라면 그 모든 갈등의 중심에는 20대 백인 남성으로 표상되는 칼이 놓여 있다. 남성 인물을 중심으로 전복을 꾀하는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작 <더 스퀘어>의 크리스티안과 겹치지만, 칼은 더 젊고, 명성이 아직 부족하며 그런 의미에서 경제적으로도, 사회 계층적으로도 크리스티안보다는 한참 낮은 처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칼에게 불안과 불만을 야기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첫 시퀀스에서 칼이 에이전시 관계자들 앞에서 워킹과 포즈를 보여주며 선택(간택?)받기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사진이랑 실물이랑 다르다며, 웃지 말고 워킹을 해보라는 둥, 내면이 드러나야 한다는 둥 다양하게 품평을 해대던 관계자들은 칼을 앞에 놓고 자기들끼리 귓속말인 척 보톡스 맞아야겠다며 다 들리는 뒷담화를 한다. 그리고는 "슬픔의 삼각형 좀 펴봐요.(Can you relax your triangle of sadeness?) 미간에 있는 주름. 조금 더. 입도 살짝 벌려요. 헤프게 보이도록."이라며 칼의 외모를 지적하고 성적 매력 어필까지를 요구하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가장한 짧은 거절로 다음 모델을 부른다.

이후로도 1부 내내 칼에게 굴욕은 계속된다. 패션쇼장 좌석에서 밀려나거나 유명한 모델인 여자 친구 야야(찰비 딘 크릭)가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것을 지켜보며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 불만은 야야와의 저녁 식사에서 폭발한다. 계산서를 모르는 척하는 야야에게 칼은 화를 내며 데이트 비용에 대한 그간의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이것이 돈을 내기 싫어서가 아니라 둘의 관계가 '성적 고정관념의 역할'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라고 강변한다. 야야와 헤어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돈을 좀 냈으면 좋겠고, 그렇지만 졸렬하고 지질해 보이기는 싫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칼은 '평등(이 영화에서는 'equal'이 여러 층위에서 반복된다)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외치지만, 이미 돈 얘기가 표면에 떠오른 순간 둘의 대화는 언제 누가 얼마를 냈냐, 이 호텔은 누구 덕에 묵게 된 거냐 등등 일차원적인 싸움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부에서 칼이 맡은 것은 젠더 감수성의 차원에서 깨어있고 제너러스(Generous)한 매너까지 보여줘야 하는 20대 남성들이 가진 불만 그 자체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자신들이 좀 더 편안해 보이는(?) 위치에 놓여 있는 여성들에게 왜 제너러스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역차별의 희생자라는 논리를 주장한다.

영화는 이러한 칼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야야의 말, "만약 내가 임신이라도 하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면 상대가 날 돌보려 할지 알아둬야 하지 않겠어? 안 그러면 시간낭비니까.", "나 모델이잖아. 이 생활 끝나면 과시용 아내(Trophy Wife)밖에 안 돼."라는 말로 둘 사이에 놓인 입장차를 보여준다. 이후, 감독은 칼을 3부의 '섬'에 데려다 놓으며 젠더적 역학 관계를 뒤집는데, 명백하게 칼의 맹점을 지적하는 데에 무게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삼각형으로 쌓아올린 요트 구성원들의 계급도

칼과 야야가 요트에 오르는 2부에서는 이들을 경제적 측면에서의 세대론적 격차라는 새로운 구도에 놓이게 한다. 다른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칼과 야야는 그 배의 승객 중에서 자신들이 가장 젊은 축이면서 가장 가난한 상황임을 깨닫는다. 부의 축적 방식 역시 세대별로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영국인 노부부인 윈스턴 가족이 지뢰와 수류탄 같은 전쟁 집약적인 무기 판매로 거부가 되었다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 연배인 중년 러시아인 드미트리는 동유럽에서 80-90년대 비료 사업을 통해 사업을 키웠고, 홀로 배에 오른 수줍은 미국인 야르모는 40대 정도의 젊은 IT 사업가로 최근의 자수성가형 사업가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호화 크루즈에 탈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성공은 앞선 세대의 물적 제조 사업에서 현재의 디지털의 IT 사업으로 변천되어 왔음을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상류층 늙은이들이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거래 방식으로 재화를 활용해 크루즈에 승선했다면, 새로운 세기를 사는 젊은이들은 SNS 협찬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거래를 활용해 이 크루즈에 오를 수 있었다. 요컨대 돈 대신, 젊고-외모가 뛰어난-모델이라는 명성이 돈만큼이나 통용되는 우월한 가치로 기입되는 시대임을 보여준다. 야야는 먹지도 않을 스파게티를 들고 사진을 찍고 비키니를 입고 포즈를 취하며, 칼은 충실한 사진가의 역할에 매진한다. 이들이 파는 것은 무기도, 무형의 정보기술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인생샷을 보여주는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문제는 이 젊고 아름다운 육체가 시효가 있다는 점에서 영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공고함과 빈부 격차라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이제는 언급하는 것조차 쑥스러워진 시대이지만, <슬픔의 삼각형>은 여전히 계층적 격차의 문제에 관해 얘기하기를 원한다. 전근대적인 시기이든 현대이든 계층 구성의 삼각형 모양, 즉 넓은 밑면의 노동 계층/중간의 중산층/맨 위 좁은 부분의 상류층으로 나뉘는 구도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쨌거나 배에 어떤 방법으로 올랐든 승객이라는 점에서 칼과 야야 역시 승무원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이들 역시 상위 계급의 권력을 나눠 받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칼이 야야가 눈길을 보내는 남자 승무원의 상의 탈의에 분개해서 약간의 컴플레인으로 그를 하선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승객들이 상위 계층으로 존재하고, 이들을 위해 시중을 드는 승무원들이 팀장 폴라(비키 베를린)를 비롯해 중위 계층을 구성한다면, 놀랍게도 영화의 중반부쯤 가서야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유색인종으로 구성된 육체 노동자들이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머무르며 하위 계층을 구성한다. 승무원들이 "돈!돈!돈!"을 외치며 업무에 앞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면서 업무에 추진력을 가지려 할 때, 같은 배의 구성원이면서도 구분되어 마룻바닥 밑에서 먼지와 울리는 소리를 듣는 노동자들과 청소 매니저 에비게일(돌리 드 레옹)이 놓여 있는 것이다.

선장(우디 해럴슨)만이 이 삼각형의 구도에서 벗어나 있는데, 그는 영화의 전반부 내내 수상쩍게도 계속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취해 있으며, 만찬을 위해 나온 이후에도 다른 승무원들처럼 일반적으로 승객들에게 굽신대지 않는다. 러시아산 굴 요리와 캐비아 등등 승객들이 고급스러운 만찬 음식을 먹는 것과 달리 혼자만 햄버거를 먹는다. 덕분에 상해버린 음식들과 흔들리는 배에서 멀미로 토사물을 쏟아내는 승객들 사이에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한다.

러시안 자본주의자와 미국인 공산주의자라는 점에서 전복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드미트리와 선장이 술을 마시며 설전을 벌이는 장면은 감독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명언과 그 발언의 출처인 정치가나 학자, 문학인 등의 명단을 말하며 논박을 벌인다. 이들이 유일하게 합의를 본 지점은 배에 탄 부자들이 탈세를 하고 세금을 안 낸다는 점이다. 난장판이 된 배의 상황에는 아랑곳없는 듯 두 사람은 술에 취해 전체 스피커를 켜고 마이크에 대고 세금을 내라고 소리를 지른다.

좌초된 자본주의와와 전복된 삼각형

요트 안의 공고한 계층적 구도를 뒤집는 3부의 '섬'으로 향하기 위해 2부에서는 배에 탄 부자들이 자가당착의 방법으로 재앙을 불러오는 상황을 연출한다, 가령, 드미트리의 아내가 자기 좋을 대로 '억지 평등'을 주장하며 전 승무원에게 수영복을 입고 슬라이드 타기를 강권하면서 선장 만찬을 준비 중이던 음식이 조리 과정이 지연되어 상해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기만적인 수사로 폭탄 제조와 관련된 사업을 옹호하던 윈스턴 부부가 수류탄의 탄피를 뽑으면서 배가 좌초된 것처럼 말이다.

선장이 손에 든 노암 촘스키의 책 「How the World Works(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는 권력의 구조와 글로벌 역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주제로 한 책이다. 선장이 읽는 책의 한 부분, "사람들의 자기 인식에 난 하등 관심이 없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괴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체계를 구축한다."와 선장이 스피커로 말하는 "부자 자선가는 탈세를 일삼고 사회에 전혀 기여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 없다."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부자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외스틀룬드 감독이 칸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 영화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세계의 부조리를 얘기하기 위해 토사물과 오물이 뒤엉키는 난장판으로 관객들을 초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청난 불평등을 영속시키는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며, 그 과정에서 밀려나 바닥 계층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희생이 필수 불가결해진다는 점을 조명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배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사람들을 넘어서서 곧 펑 소리와 함께 변기 속 똥물이 폭발한다.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을 리셋하겠다는 감독의 의도는 비속한 농담과 부자들을 똥물과 토사물에 나뒹굴게 하는 방법으로 응징하고 곧 폭발음과 함께 2억5천만 달러짜리 호화 요트는 좌초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화된 3부 '섬'에서 배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애비게일이 리더의 자리에 등극한다. 자본주의적 심급의 준거점인 '재화'의 가치가 사라져 버린 공간에서 통용되지 않는 돈과 사치품은 의미를 잃는 대신 육체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들을 활용할 수 있는 애비게일이야말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세계의 리셋과 동시에 한정된 공간으로서의 '섬'이라는 세계를 설정했을 때 계층과 성별, 인종의 측면에서 모든 것이 전복된 위치의 인물이 권력의 최정점에 선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칼의 미간에 자리 잡고 있던 슬픔과 분노가 도리어 절대 권력에 의탁함으로써 해소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물론 감독이 설정한 이러한 전복(미러링)이 모두에게 동의가 될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칼의 질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에 따라 가치 평가는 갈릴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의 역치에 대해서는 각자가 느끼는 바가 다 다른 법이니까 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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