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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이후의 세계와 폭력의 유토피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주가 이뤄진 세계
1938년 채만식이 쓴 장편소설 『태평천하』에는 식민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가문의 영달과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윤직원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의 이기심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부친이 화적의 손에 죽은 사건이었는데, 그는 “이놈의 세상, 언제나 망하려느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세상에 대해 ‘격분된 저주’ 혹은 ‘웅장한 투쟁의 선언’을 내지른다. 즉, 세상이 망하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러면서도 자신은 안 망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라는 거대한 장벽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장벽 혹은 콘크리트가 놓여 있는 듯하다. 수도권 중심의 과밀화와 빈부 격차의 격랑 속에서 서울의 요지에 아파트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위계가 지나치게 벌어졌고 그 사이에서 절망감을 느낀 축들은 또다시, “이놈의 세상, 언제나 망하려느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와 같은 자조적인 말을 내뱉게 되었다. 영화는 때때로 현실이 가닿지 못하는, 가 닿을 수 없는 자리를 먼저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무화가 된 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혹은 우리 말고도 모두가 다 같이 망해버린 상황이면 어떨까라는 바람과 욕망들이 이뤄진 아포칼립스적 세계를 <콘크리트 유토피아>(엄태화, 2023)는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 완전히 부숴지고 무너져 버린 재난 이후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는 황궁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인데,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알게 된다. 살아남은 황궁아파트의 입주민들은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를 중심으로 차츰 줄어가는 식량과 안전 등의 이유를 들어 비상 공동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그 과정에서 아파트의 화재 진압에 앞장 선 공로를 인정받은 영탁(이병헌)을 입주자 대표로 뽑는다. 이들은 영탁을 중심으로 외부인을 몰아내고 자치 규약을 만들고 아파트 바깥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가는 등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나름의 안정감을 맛본다. 하지만 바깥의 사정 역시 좋지 않아 식량 구호는 점점 어려워지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규율과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갈 때쯤 외부에서 돌아온 입주민의 자녀 혜원(박지후)이 꺼낸 뜻밖의 얘기로 공동체에 불안감이 가중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 영화에서는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즉, ‘아파트’라는 표상이 가진 구도가 중요한 문제의식이 된다. ‘황궁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재난 이전에는 바로 옆 단지인 ‘드림 팰리스’에 비해-기존의 정감 어린 아파트명에서 최근 국적불명의 외국어로 길어지는 아파트명으로의 변화 추세가 보여주듯-구축이고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단지 통행도 금지될 정도로 하대받았으나 재난 이후, 몰려든 드림팰리스 입주민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을 ‘바퀴벌레’ 취급하며 집을 가진 생존자로서의 성취감을 만끽한다. 즉, ‘아파트’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계층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오롯이 하나의 아파트가 살아남아 다시 위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위임받은 권력과 폭력의 전체주의
세계가 파멸해 버린 미증유의 자리에서는 관리소장이 들여다보는 <<2020 자연 재난 표준 매뉴얼>> 따위의 성문화 된 메뉴얼은 의미가 없으며, 재화가 통용될 시장 경제가 소멸되었으므로 자급자족의 물물교환 형태만 가능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나와 내 가족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개전투의 맹목성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파트를 사려고 육교 하나 건너는데 23년이 걸렸든, 자가이든 아니든, 금애의 말대로 모든 것이 ‘리셋’되었다는 것만이 명징한 사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다만, 황궁 아파트라는 안전한 주거지, 즉 물적 토대의 변화는 상부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들은 입주민/외부인으로 스스로를 구분 지어 권력을 쥐게 된다. 그리고 이 권력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보조적으로 기능한다.

막스 베버와 벤야민, 데리다, 한나 아렌트 등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 관한 논의들은 대개 불법적인 폭력과 이를 응징하는 국가의 공권력 사이의 갈등 문제를 다루는데,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공권력의 성격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권력은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응하기 때문에 권력은 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경우에 실제적으로는 그가 일정한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지시한다고 본다.1) 이미 국가 주도의 공권력이 사멸한 자리에서 황궁 아파트가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입주민을 대표하고 규율을 조정하며 지시를 주도할 권력을 김영탁이라는 개인에게 대리시키는 것이었다.

김영탁이라는 인물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표현된 인물인데 어수룩하게 등장했지만, 곧 입주민의 대표가 되면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휘두르게 되고 끝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살아온 내력에서 군인 출신의 택시 기사라는 특성이 잘 발휘된 것이기도 한데, 규율과 명령, 권력의 위계라는 시스템에 익숙하며 무엇보다 위력의 사용과 무기의 훈련을 받았다는 점에서 일반 입주민들과는 구분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여러 번의 난투극에서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나 때때로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지나친 폭력성을 드러내는 모습, 명분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점 모두 성격화의 측면에서 그를 공권력의 대리자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권력은 결코 타당성(justification)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정치공동체의 현존 자체에 내재하고,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점에서 폭력이 함께 나타나며 권력은 폭력에 우선하는 지배적인 요소가 된다.2) 그런 의미에서 권력을 쥔 김영탁은 폭력을 통한 전제 정치를 가속화해 나가며,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 나간다. 그가 외치게 만드는 “아파트는 주민의 것!”, “으랏챠챠 황궁!”, “우린 당연한 거 한다”, “가장이 가족을 지키는 것”, “우리 아파트를 지키려면 스스로 나서자” 등의 구호는 그가 행위의 당위성을 논리화하고 발화하게 하는 것의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그와 함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방범대원들은 공권력이 사라진 자리에 일종의 사적 결사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흡사 자경단(vigilante)이나 민병대(militia)처럼 기능하며 영탁이 분배한 권력의 수혜를 입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이들 역시 가족의 생존과 식량의 획득이라는 명분 아래 폭력을 일정 부분 감당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군인 출신인 영탁 뿐 아니라 공무원이었던 민성이 행동대장으로 나서게 되는 상황과도 관련된다. 또한 아파트의 배타적인 결사체에 반대하다가 희생되는 인물인 도균이 스스로 군면제자라고 밝힌 것과도 대비된다. 즉, 사적 결사체의 조직 구성은 결국 본래 현실의 공권력의 대리자들에게 그 권력이 위임된 형태로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아렌트, 김정한 옮김, 『폭력의 세기』, 이후, 1999. p.74.
2) Ibid, pp.84-85.


초과된 폭력의 회수와 신학적인 해석의 추동
권력을 위임받은 영탁과 방범대원들이 벌이는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민성의 아내인 명화이다. 본래 간호사이자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박애 정신이 남다른 성격의 그녀는 영탁 이하 입주민들이 배타적인 방향으로 가는 모든 결정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극중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한다. 폐허가 된 세상이라는 절대절명의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선의는 다소 단순한 도덕적 공식에 입각한 평면적 캐릭터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즉, 당장의 생존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보이는 윤리적 태도는 그저 입바른 소리나 태평한 모습으로 비춰질 혐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격해 가는 남편을 걱정하며 내뱉는 “그러다 너 망가진다고”라는 말은 살아남기 위해 입주민들이 벌이는 일들이 보조적인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수준으로 가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폭력 행동의 실체 자체는 수단-목적 범주에 의해 지배되는데 목적을 정당화하고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수단에 의해서 그 목적이 압도될 위험에 항상 직면해 왔으며, 폭력은 권력과 생산의 경제 안에 자체의 영속적인 자리를 보증해주는 바로 그 목적성을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3) 즉, 이 영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영탁의 폭력이라는 수단이 생존이라는 목적을 압도할 때 서사적인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인간 존재자들을 상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대로 제거될 수 있고 도구화될 수 있는 사물의 지위로 환원시키는 ‘초객체적’ultra-objective 폭력과 ‘악’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기획의 집행자, 즉 주권적 권력의 광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제물로 바친 ‘초주체적’ultra-subjective 폭력과도 관련되는 것이다.4) 그런 의미에서 영탁의 과도한 폭력성은 인간들을 도구적 위치로 절하시키는 주권적 광기의 냉혹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엔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폭력과 시민다움』, 난장, 2012, p.25, 110.
4) Ibid, p.129.


식량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가 맞닥뜨린 슈퍼 주인에 의해 어린 방범대원이 위기에 처하자 영탁은 그를 구하기 위해 슈퍼주인을 린치(lynch)하며 과격한 폭력을 행사한다. 물론 “나이 쳐 먹고 애를 인질로 삼아?”라는 대사와 함께 자신의 행동에 명분을 부여하긴 하지만, 겉으로는 온순해보이는 영탁이 종종 상황에 비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잔혹성을 보여주는 모습들에 같은 방범대원들이나 입주민들 역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명분과 정당성으로 전제하던 폭력이 자신들의 입을 막고 있음을 느낄 때 역설적으로 생존을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던 입주민들에게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릴 정치의식으로서의 시민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는 신학적 해석을 추동하는 몇 가지 상징들이 존재한다. 가령, 영탁의 본명이 모세범이라거나 지팡이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은 성서의 엑소더스를 상기시킨다. 선의로 외부인들을 숨겨준 도윤과 같은 입주민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고 그들의 집 문을 붉은 페인트로 칠하는 몽타주들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재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유월절의 관례와 비슷하며, 다친 민성을 이끌고 잠들었던 명화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이 영화 내내 어둡게 조망되던 회색 빛의 어두운 폐허가 아니라 밝게 빛나는 성당의 다채로운 스테인드글라스였다는 점 역시 그렇다. 명화를 돕는 세 인물들 역시 바깥으로부터 소식을 갖고 선물을 전하러 온 동방박사들을 상기시킨다.

재난 이후에 홀로 남아 우뚝 서 있던, 인간들의 폭력과 광기가 지배하던 황궁아파트라는 공간은 바리케이트가 무너짐과 동시에 더 이상 내/외부를 구분 짓는 배타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데 그들이 혐오 섞인 멸칭으로 외부인들을 명명하던 표현처럼 그들 자신도 ‘바퀴벌레’처럼 모두 흩어져 버리게 된다. 이 또한 성서적 맥락에서 바벨탑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의 상징으로서의 바벨탑 건립은 신의 응징에 의해 무너지며 인간들은 서로 흩어지게 된다는 알레고리가 콘크리트로 쌓은 ‘황궁(royal palace)’ 혹은 ‘유토피아(utopia)’라는 가짜 천국에 대한 비판적 조망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작금의 절대적 정언명령이 되어 버린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와 이를 토대로 계층을 구분짓는 배타성의 논리가 디스토피아적 재앙의 파국을 가져올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