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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역설로서 '험한 것' - 장재현, <파묘>

기고자.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수향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평론가

1. 장재현의 호러 월드 3부작

한국 영화에서 공포 영화(Horror Movie) 장르는 여름 한철 반짝 장사 혹은 보는 사람들만 보는 마니악한 장르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하의 공동묘지>(1967)와 같은 고전 작품부터 1990-2000년대에 인기 프랜차이즈물이었던 <여고괴담> 시리즈, 비교적 근래에 가장 주목받았던 <곡성>(2016)까지 꾸준히 그 면면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 산업의 측면에서 공포 영화가 계속 제작되는 이유는 'BEP'(break-even point, 손익분기점)가 비교적 낮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의 장르적 컨벤션의 핵심은 이질감과 놀라움을 주어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개는 일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유명하지 않은 신선한 배우들을 기용하고 장치나 시각 효과의 사용을 비교적 제한해 저예산 제작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렇듯 공간이나 출연 배우들의 숫자가 제한되는 대신 온전히 사건과 상황의 힘, 장면 연출, 배우의 연기력으로만 돌파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공포 영화의 여러 계열 중 오컬트 장르는 신비주의적이며 영적인 기이한 현상에 좀 더 치중한 작품들을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엑소시스트>(1973)와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장재현 감독은 동갑인 엄태화 감독과 함께 향후 한국 영화를 새롭게 이끌어갈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오컬트 장르 영화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미장센 단편영화제 절대 악몽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던 단편 <12번째 보조 사제>(2007) 이후, 이를 확장한 장편 연출 데뷔작 <검은 사제들>(2015, 이하 <검은..>으로 표기), <사바하>(2019), 그리고 <파묘>(2023)는 모두 BEP를 무난히 넘겼고(최종 관객 스코어가 각각 540만, 240만, 660만(진행 중)) 질적 성취의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파묘 포스터

세 작품은 같은 공포물임에도 영화적 설정과 구성에서 상당히 다채로워 설정이나 인물 등이 겹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검은..>이 악령에 들린 소녀를 치유하는 구마 사제들을 다루는 엑소시즘의 본령에 충실한 영화라면, <사바하>는 신흥 종교와 관련된 인물들의 악행을 쫓는 목사를 중심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가깝다. <파묘>는 풍수사와 무속인, 장의사 등이 한 집안을 둘러싼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전적인 풍수지리 등을 활용하는 포크 호러(Folk Horror)의 성격을 보여준다. 요컨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와 공포의 근원의 쌍이 각각 수도사-악마, 목사-교주(/'그것'), 무당 및 풍수사-묫자리(/오니)로 구분되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특징으로도 각각 가톨릭/불교/무속이 중심이 되며, 악의 축은 악령/타락한 인간/일본 정령으로 그 성격을 달리해서 악마에서 불사의 인간으로, 다시 괴력난신(怪力亂神, 괴이한 힘과 난잡한 귀신)의 영적 존재로 변천된다.

플롯 구성적으로는 <검은..>이 선과 악의 비교적 단순한 갈등 구도라면, <사바하>는 사이비 종교와 '그것'을 이중의 미스터리 요소로 두었다가 결국 '그것'의 실체와 진짜 교주가 누구인가 해결의 핵심이 되면서 '그것'의 지위가 역전되는 폭로의 플롯을 보여준다. <파묘>는 작품의 전후반부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면서 전반부 내용이 일종의 미끼처럼 작용해 후반부의 서사가 완전히 선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공포의 차원을 배가한다.

이렇게 작품들 속 공포의 근원과 대상, 갈등의 양상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은 장재현 감독의 연출적 성숙도와 작가주의적 이상이 발전하는 과정으로도 읽혀 흥미롭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된 전형적인 엑소시즘 성격의 영화에서, 인간의 그릇된 사적 욕망을 통해 신의 현존을 묻는 작품으로, 그리고 다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터부와 풍수와 샤먼 등을 활용해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낸 작품까지 10여 년 가까운 기간 매번 전작을 혁신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드러난다. 장재현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높은 흥행 스코어를 경신하고 있으며 침체된 한국 영화 시장을 일소하고 있는 <파묘>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어떤 성격인가.

2. 실패한 공포/잔여의 공포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에 대한 정보는 숨겨져 있거나 예측하지 못하도록 다른 갈등 요소를 통해 속이는 과정을 거친다. <파묘>는 작품의 제목과 플롯의 구성, 주제론적 맥락 모두에서 표면적 이야기가 이면적 이야기로 휩쓸려 들어가는 과정이 공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젊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법사 '봉길'(이도현)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집안의 의뢰를 받고 미국 LA를 찾는다. 의뢰자인 '박지용'(김재철)은 아버지와 형, 그리고 자신까지 환청과 목졸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갓난아이인 아들마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위독한 상태라는 것을 밝힌다. 이에 '화림'은 조상들의 묫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며, 거액이 걸린 묫자리 이장을 위해 관록의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에게 도움을 청한다. 함께 묘를 답사하던 상덕은 묫자리가 악지(惡地) 중의 악지라며 불길한 기운을 느껴 일을 거절하지만, 지용의 간청과 대살굿으로 화근을 없앨 수 있다는 화림의 설득으로 파묘를 진행하기로 한다. 그런데 파묘를 하고 관을 옮기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기이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상덕 일행은 묘에 심상치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흔히 공포 영화에서 공포를 느끼는 메커니즘은 '공포의 대상'을 인지→대상에 대한 '무서움의 감정'→무서운 감정에 대한 '반응'의 과정이다. 이때 공포의 대상은 일반적인 사고나 합리성의 견지에서는 설명 불가능한 기이하고 낯선 존재인 경우가 많다. 보통은 악마나 귀신, 괴물, 위압감을 주는 미스터리한 존재로 등장하나, 인간일 경우에는 악령에게 붙들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사고나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채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우리가 느끼는 무서움은 종종 놀람, 긴장감, 불안 등을 수반한다. 이러한 감정들은 정신적인 혹은 신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데 흔히 소리를 지르거나 눈을 가리거나 침을 삼키는 등 반응을 보인다. '손에 땀을 쥔다'라는 표현 역시 공포 영화에 대한 인지주의적인 측면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파묘>는 공포의 대상에 대한 인지의 측면을 기준으로 전후반 서사를 분절한다. 이는 위장 서사를 작품 초반에 배치해 진짜 서사를 가리다가 예상치 못하게 놀라는 효과를 노린 것인데, 히치콕의 '맥거핀'이 서사 구조의 차원에서 활용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작품의 초반부에 문제적 상황인, 미국의 부잣집에서 장손에게만 내려오는 재앙이라는 설정이 위장 서사로 기능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밑도 끝도 없이 부자인 사람들'이라는 대사이다. 즉, 생래적인 부를 지닌 채 태어났으나 그 부가 어디에서 연원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부유함과 뿌리에 대해 은폐된 상태로 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재현 월드에서 이런 식의 위장 서사로 관객을 속이는 방식은 <사바하>에서도 등장했다.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그것'의 존재가 선악 사이에서 모호하게 처리되어 관객의 판단을 지연시키고 그 기이함으로 불안을 조성하며, 가짜 교주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어서 의심하지 못했지만 결국 숨겨졌던 진짜 교주가 등장하면서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대리인을 통한 진짜 빌런 숨기기의 방식이 인물의 차원이어서 폭로의 플롯으로 반전을 괴하는 정도였다면, <파묘>에서는 앞의 서사 전체를 뒤흔드는 차원으로, 후반부에 완전히 새로운 공포의 대상이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풍수설과 무속에 기반해서, 믿을 수도/믿지 않을 수도 없는 점괘나 예언이 주는 불확실성의 재앙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던 관객들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묘>는 공포를 주는 데에 실패한 작품인 것인가?

인지주의 예술철학자 Noel caroll은 「The Philosophy of Horror」(Routledge, 1990)에서 '실패한 호러'에 대해 설명한다. 말 그대로 관객이 영화에서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실패한 예로, 1) 문화의 차이로 공포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경우 2) 장르의 독법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관객이 의도대로 작품을 보지 않는 경우를 든다. 또 등장인물이 느끼는 공포의 위협을 관객이 거울처럼 느껴야 한다고도 설명한다. (Ibid, p.18)

파묘의 한 장면(1)
파묘의 한 장면(2)

이 작품의 주제가 조상의 원한 감정이나 집안의 숨겨진 악행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전반에 느끼게 되는 공포는 조상 귀신이 후손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몰염치함에서 발생한다. 인륜의 일반적인 법칙을 어긋나며 그 힘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악귀가 이곳저곳을 휩쓸 때 관객이 느끼는 공포는 상덕 일행이 느끼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거울상처럼 투사된 것이다.

그런데 후반부는 그 공포의 존재가 뜻밖에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질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겁나 험한 것'의 정체는 좁게는 조부의 망령이며, 나아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버린 '음양사'와 '오니'이다. 이는 극중 화림과 봉길, 상덕 등에게는 충분히 공포를 불러일으킨 듯 묘사되지만, 예측했던 방향을 완전히 이탈해버린 느닷없는 전개로서 관객들의 몰입에 아쉬움을 남긴다.

표면적 서사(가짜 이야기)의 밑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첩장'이 된 이면 서사(진짜 이야기)가 나온다. 플롯이 분열되고,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거대하고 시대착오적인 괴수(creature)로 등장할 때, 영화는 뜻밖에도 서스펜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복심을 드러낸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고 설명되는 이 사태에 대해 “우리 자식과 후손이 살아갈 땅”이라는 상덕의 대사가 덧붙여지면서 더욱 계몽성을 띤 서사가 된다.

캐럴의 논의를 이어받자면, 일본이라는 다른 문화의 음양사나 다이묘 오니가 우리에게 낯설어서 이 서사에 몰입하기 힘든 것인가, 아니면 너무 약아빠진 관객이 충분히 부여된 공포의 트릭들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일까.

흥미로운 것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도 이들에게 공포의 잔여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터에 다시 나가지만, 기억과 소리로 그리고 핏물이 배어나는 상처로 종종 그 공포는 돌출된다. 파묘를 완성하고 첩장을 솎아내고 오니는 사라져 버렸지만 상덕 일행에게는 불온한 흔적이 남는다. 진짜 공포는 여기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캐럴은 공포물에서 발견과 확증의 과정이 플롯의 구성 요소이며, 공개된 것과 공개되지 않은 것 사이에서 폭로, 발견, 확인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끔찍한 괴물에 대한 추론 놀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고 설명한다.(ibid, pp.127-128) 모든 게 다 끝나버린, 나쁜 묫자리와 음침한 관들, 기이한 괴수가 사라져버려 안정적인 성공의 결말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진짜 공포는 다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끔찍하고 나쁜, 음침한 괴물이 살아남아 불현듯 우리 일상에 침범해올 것 같은 불안함, 에이 시시해~ 라고 말하면서도 다시금 집중하게 만드는 그 익숙한 스릴과 서스펜스가 우리에게 다시금 또 공포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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