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칼럼
태양이 사라지고 난 뒤
영화 <애프터썬 Aftersun>
기고자.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기록적인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생각이 들지만, 늦더위의 잔영이 여전하다. 샬롯 웰스 감독의 영화 <애프터썬>(2023)은 여름과 기억의 결합이 오랫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이야기를 그린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여름처럼,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어디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기억할 만한 여름휴가
여름을 우리가 떠올릴 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것 중에는 여름휴가와 해외여행, 리조트, 수영장 같은 것들이 있다. 햇살 가득한 날씨와 이국적인 휴양지에서 가족과 보낸 휴가의 기억들은 행복한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서사에서도 자주 활용된다. 영화 <애프터썬> 역시 그러한 배경에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11살 소피(Frankie Corio)는 아빠 캘럼(Paul Mescal)과 함께 터키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아빠와 엄마는 별거 중이고 소피는 런던에서 엄마와 살고 있기 때문에 아빠와는 오래간 만에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조금 쇠락한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 예약한 대로 침대가 배정되지 않는 등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소피와 아빠는 뜨거운 태양과 바다, 리조트와 수영장 등 여러 구경거리를 옮겨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빠 캘럼은 소피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따뜻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지만,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을 드러내거나 종종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조숙한 소피는 여름휴가의 즐거움 속에서 캠코더를 들고 이곳저곳을 찍으면서 아빠의 모습들을 주의 깊게 보고 촬영한다.
보통 어린아이들이 등장하는 여름 영화들은 일정한 공식이 있다. 가령, <기쿠지로의 여름>(기타노 다케시 감독), <프리다의 그 해 여름>(카를라 시몬 감독), <집으로..>(이정향 감독) 같은 영화들은 어린아이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여름의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공간에 머무른 후,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훌쩍 자라 집으로 회귀하는 성장 서사로 전개된다. 이때 깨달음과 성장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어른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그 과정에서 유년을 넘어 성장하게 하는 분기점으로서 상처나 상실을 주는 사건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애프터썬>은 그런 공식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가 살던 곳을 떠나 한정된 시공간에 머무르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좀처럼 특기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소피가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 둥둥 떠 있거나 아빠와 맛있는 것을 먹고 장난치며 얘기하며 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액자 구조 형식이어서 어른이 된 소피의 바깥 서사와 과거 여름휴가의 캠코더 속 영상들을 지켜보고 있는 내부 서사가 결합되어 영화의 대부분은 행복한 부녀의 여름휴가와 관련된 회고적인 화면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즐거움은 때때로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화면들로 침범당한다. 이 휴가 속에는 과거를 회고할 때 우리가 흔히 느끼는 그리움과 눈물이 날 것 같은 따뜻함의 추억을 넘어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즉, 아름다운 유년 시절의 여름휴가라는 큰 틀의 서사가 안정되게 진행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이 부녀의 추억 속에 불완전한 감정적 요소가 조용히 일렁이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서사적 변곡점과 갈등 구조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잔존하고 있던 삶의 그림자와 불가해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이자, 지나가버린 한 시절의 곡절을 여전히 헤매고 있는 딸 소피의 길고 긴 애도담이라고 볼 수 있다.
홈비디오 화면으로 더듬는 상실의 전조
영화가 시작되면 암전에 영화의 타이틀 크레디트 정보들이 뜨면서, 테이프 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도착한다. 화면이 켜지면 흔들리는 홈비디오 화면 속에서 소피의 목소리가 들린다. 춤을 추는 아빠 캘럼에게 소피는 인터뷰를 시도한다. 캘럼이 무엇에 대해 인터뷰할 거냐고 묻자, "몰라. 난 11살이고 아빠는 130살이었다가 이틀 뒤면 131살이 된대요. 그래서 아빠가 11살이라면 지금 뭐할 거 같아요?"라며 카메라를 돌리면 귀여운 여자아이의 얼굴이 화면 가득 보인다. 그런데 장면이 다시 커트되면, 화면이 깨지며 멈추고 암전 속에서 사람들 얼굴들이 떠오르다 가라앉으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리곤 다시 공항에서 인사하며 떠나는 소피의 모습과 다시 흔들리고 깨지는 화면이 반복된다.
첫 시퀀스는 이 영화의 설정이 현재 어른이 된 소피가 과거의 홈비디오 화면을 보는 중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른이 된 소피가 분열증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넘나듦이 그리 간단한 추억담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캠코더 화면 속 소피와 아빠의 내용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간헐적으로 암전 사이에 현란한 화면 속 어른 소피의 모습이 삽입되거나 테이프가 감기는 소리가 들리고, 소피와 파트너가 침대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인서트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캠코더로 찍은 레트로한 홈비디오의 화면과 실제 영화의 1.85:1 화면비가 번갈아가며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소피의 캠코더에 찍히지 않아 소피가 알지 못했던 아빠 캘럼에 관한 내용들은 홈비디오 화면이 아니라 영화의 장면으로 관객에게만 드러난다. 그렇지만 당시 캘럼의 어떤 행동들을 관조하듯 보여줄 뿐 구체적으로 캘럼의 사연이나 내면에 대해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없다.
자신이 통화하는 사이에 잠든 어린 딸의 양말을 벗기고 제대로 눕혀준 후 홀로 베란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 아빠의 뒷모습, 왜 다쳤는지 설명되지 않은 채 팔의 깁스를 풀기 위해 애를 쓰는 아빠의 소리를 차단해 딸의 잠자는 숨소리만 들리게 처리한 것, 욕실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침을 뱉거나 느닷없이 느리게 흔들흔들 춤을 추듯 태극권을 연습하는 모습에서 카메라가 틸트다운해서 딸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장면, 등을 보인 채 누운 아빠에서 딸의 잠에서 깬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과정 등이 그렇다.
과거 홈비디오 화면 속의 소피는 아빠의 혼란을 알 리 없고, 그녀에게는 리조트에서 만난 또래 혹은 조금 윗나이대 언니 오빠들에게서 느끼는 일탈의 기미, 성적 긴장감 등에 대해 힐끔거리기도 바쁠 뿐이다. 겨우 32살인 아빠는 젊고 잘생겨서 리조트에서 만난 사람들은 둘이 남매가 아니냐고 묻기도 하지만 둘의 심리적 격차는 엄청난 것이다. 아빠는 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알 수 없는 압박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데 영화는 이를 소피의 기억에서 벗어난 몇몇 장면으로 보여만 줄 뿐 그를 누르는 압박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는 여름휴가라는 바깥 서사 속에 말하지 않는, 혹은 계속 에두른 채 대면하기를 꺼리는 어떤 진실이 곁텍스트(paratext)로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빠가 조용하고 잠잠하게 그러다 남모르게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고통과 고뇌를 딸이 모르는 채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여름날의 사건의 전부였고, 이제 남아 어른이 된 소피는 애써 그 흔적들을 찾아보려 캠코더 화면을 응시하면서 되감거나 빨리감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안온한 여름휴가의 서사라는 겉이야기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함의 틈이 조금씩 드러날 때 이러한 징조를 알아채야 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즉 햇살 가득한 어린 시절의 휴가의 기억이 사실은 엄청난 상실의 전조였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남은 기억과 진짜 기억 사이에서
<애프터썬>에서 등장하는 노란 일회용 카메라와 워크맨, 가라오케, 인물들의 의상과 화면의 색감 등은 1990년대 후반의 풍경을 표현하며 레트로한 감성을 드러낸다. 패션과 말투를 중심으로 90년대가 레트로가 되어 유행하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사실 이 유행은 본질적으로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키치적인 장식품처럼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가령 뉴진스의 <버블검> MV처럼 말이다.)
감독 샬롯 웰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 아빠와 함께 휴가를 보냈던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홈비디오를 통해 그 시절의 테이프를 보고 있는 영화 속 소피 역시 그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가 환기되는 방식이 장식적인 목적이 아니라 ‘진짜 기억’에 한사코 가닿으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다.
홈비디오 화면의 질감과 색채, 클로즈업과 흔들리는 핸드헬드 캠코더로 찍는 영상이 주는 특성이라면, 영화 전체의 화면비는 1.85:1의 비스타 비전으로 일반적인 와이드스크린 시네마보다는 좁고 배경보다는 인물들 간의 관계에 좀 더 시선을 할애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국적인 터키 리조트의 풍광들보다는 아빠를 캠코더로 찍는 소피와 그 여름날의 ‘실체적 사실’이 무엇이었는지가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캠코더에 남은 아빠 캘럼에 대한 기억들은 소피와 웃고 떠들며 수영을 하고, 머리만 한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거나 소피의 등이 타지 않게 선크림을 발라주고, 이미 헤어진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거나 형편에 비해 과한 지출을 해서 소피에게 타박을 들은 것이다.
리조트에서 동갑내기와 뽀뽀를 했다는 소피의 말을 들은 캘럼은 혼내지는 않으면서도 갑자기 진지해지기도 한다. 자신의 손목을 잡아 비틀어 세게 당겨보라고 소피에게 말하며 외부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려 한다. 하지만 아빠의 그런 모습이 웃기기만 한 소피는 장난을 치며 대충 넘어가려고 하고, 캘럼은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소피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이건 중요해 소피. 반드시 배워야 돼. 그래야 너를 지킬 수 있어. 누가 너를 공격하더라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장면이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 된다. 딸이 자라면서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될 때 자신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방어하는 법을 가르쳐주려 하는 부정(父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처럼 삶의 고통에 취약해지지 않길 바라고 자신과는 달리 고통을 방어하며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까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년 후, 그 시절의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는 캠코더에 남은 아빠와 나눴던 대화 장면을 응시한다.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요."
"무슨 뜻이니?"
"음... 가끔 노는 시간에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태양이 보이면 우리 둘 다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같은 장소에 있지 않고 함께 있지 않더라도... 어떻게 보면 우리 둘 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거니까 그럼 같이 있는 거지.
Well, like... Sometimes at playtime, I look up at the sky and if I can see the Sun then... I think that the fact that we can both see the Sun, so even though we're not actually in the same place and we're not actually together... we kind of are in a way, you know? Like we're both underneath the same sky, so... kind of together.
소피의 말이 끝나면 두 사람은 튜브에 몸을 싣고 두둥실 떠오르고 카메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물결과 언덕들로 시선을 옮긴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로 이 여름휴가의 실체를 발설해버린 소피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아빠 사이에서 이 영화는 여전히 딴청부리듯 밝은 풍광 쪽으로 카메라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휴가를 마치고 난 뒤, 공항에서 개찰구로 들어가는 소피에게 인사를 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끝으로 황급히 종료된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대개 이 장면에서 눈물을 참기 어려워진다.
<애프터썬>은 남겨진 기억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어떤 기억 사이에서 남은 감정을 메워보려 한다. 휴가가 끝나고 뜨거운 태양이 지고 난 뒤에 시작된 감정적 잔여 속에 이 영화가 있는 것이다. 잘 느끼지 못했었지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 방어막을 만들어주던 소중한 존재가 사라져 버린 뒤에 그제야 느끼는 회한과 향수, 애틋함과 그리움 사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려는 간절한 노력을 다루면서도 결국 실패하고 마는 뒤늦은 사랑 고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