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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크런치를 지나고 나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2023)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이수향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괴물(怪物)>(2023)을 통해 오랜만에 인간의 내면에 대한 치열한 탐구라는 본령의 장기로 돌아왔다. 각본은 사카모토 유지가 썼는데 촘촘한 짜임새로 구성적인 완성도가 높아서 올해 칸느영화제의 각본상 수상이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서사적으로나 대사의 측면에서나 잘 정리된 각본에 더해 감독은 인물들에 대한 이해, 장면들의 배치와 감정적 고양을 통해 인간성의 근원에 대한 성찰적 질문들로 깊이를 더한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다.

남편이 죽은 후,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초등 고학년인 아들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를 홀로 키우는데, 어느 날부터 아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다. 귀가 찢어져 있거나, 운동화 한쪽이 없어지거나 물병에 흙 등이 들어 있는 등 학교폭력의 징후가 보이자, 아들을 추궁하고 이에 미나토는 담임선생인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이 자신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한다. 분노한 사오리는 학교에 가서 교장 및 다른 선생들과 호리 선생을 만나지만, 사태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나 사과 대신 매뉴얼에 의해 기계적인 처리에 급급한 이들의 행동에 분노한다. 그러던 중 호리 선생는 도리어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에 대한 미나토의 학폭을 언급하고 사오리는 혼란에 빠진다. 요리를 만나러 간 사오리에게 요리는 오히려 미나토가 좋은 친구라고 말하고, 미나토의 이상 행동이 점차 증폭되는 가운데 태풍이 몰아치며 사건의 또 다른 실체가 드러난다.
최선을 다한다는 의도가 불러온 예기치 않은 사건
영화는 한 건물에 불이 난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보는 총 세 개의 시선으로 구성상 분기되어, 영화의 초반부는 엄마인 사오리-중반부는 호리 선생, 후반부는 아들 미나토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기실 이 영화에서 ‘보인다’라는 점은 서사적 몰입과 각성을 넘나드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여러 번의 서사적 변곡점을 지나게 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초반부, 세탁소에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며 아들에게도 여러모로 애쓰는 사오리는 싱글맘이라는 사회적 한계 안에서 보통의 가족이라는 안온함을 아들에게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도 사쿠라는 특유의 무심하고 쿨한 듯 툭툭 던지는 대사들로 일상성을 보여주면서도, 때때로 내면이 생기기 시작한 아들을 표나지 않게 살피는 속 깊은 엄마를 여지없이 뛰어나게 연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나토에게 이상 징조들이 발견되고, 달리는 차에서 아이가 뛰어내려 다쳐 병원에 가게 됐을 때, 또 대충 아들 미나토의 일을 처리하려는 학교 관계자들 앞에서 그녀가 느낀 절망감에 충분히 이입된다.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남편을 대신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엇나가는 아들과 ‘싱글맘이니 예민하다’는 편견 앞에서 고통을 느끼는 그녀가 무맥락의 사과로 일관하는 관계자들에게 소리치고 교장의 탁자 위의 액자를 쳐서 넘어뜨리는 행동에서 보여지는 분노마저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쯤되면 이 영화가 영혼 없는 교사들과 관료제의 행정 속에 갇혀 표류 중인 교육계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로 보인다.

그런데 불난 지점으로 되돌아간 호리 선생의 시선에서는 모든 것이 정반대로 보인다. 호리 선생이 ‘걸스바’에 갔다는 풍문도, 지나치게 아이들을 억압한다는 평가도 모두 아이들의 악의 없는 장난이나 말들이 부풀려진 것이며, 그에게 사오리는 내 새끼만 소중한 ‘예민한 싱글맘’의 전형처럼 보일 뿐이다.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젊은 교사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글쓰기를 지도하려고 애쓰는 다정한 선생인 그가 보기에 도리어 미나토가 요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오해되고 행동은 곡해되어 마침내 모든 잘못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호리의 억울함은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 있다. 학내에 많은 일에 심상한 다른 교사들과 달리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 세계를 사려 깊게 바라보던 행동이 그의 교사직을 흔들어 놓는다. 이쯤에서는 이 영화가 무고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스러진-우리에게 최근 낯익은- 교사들의 교권 몰락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시금 불이 난 지점으로 돌아간 미나토의 시선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렇듯 이 영화는 서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유지하던 앞의 서사를 이어진 서사가 전복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 앞의 서사의 같은 장면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시선의 개연성이 그럴듯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12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미덕을 지닌다.
고레에다가 처음 이 각본을 읽었을 때 ‘괴물’이 누구인지를 계속 찾았다는 말처럼,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빠 보이는 인물들이 계속 자리를 바꿔 점차 한 명의 인물에 대한 확고한 판단을 주저하게 만든다. 요컨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으며 그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의나 가치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점이 인물들에 대한 판단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고 서사적 전복에 따라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미나토에 이르면 영화는 뜻밖의 방향으로 선회한다. 지금까지 문제 삼던 학교폭력이나 부모들의 몰상식한 자식 사랑,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 편견, 교권 몰락 등이 진짜 서사로 이끌기 위한 위장 서사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비판적 조명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다.
선을 넘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믿음이 주는 압박감
다시 영화의 초반부의 사오리에게 돌아가 보자. 사오리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뛰어나가는 아들에게 황급히 물병을 가방에 밀어 넣으며 위험하니 도로의 선의 안쪽으로만 다니라는 말을 농담조로 하려 하는데, 미나토는 늘 들어 이미 알고 있는 말이라는 듯, “선을 넘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라고 반문하며 학교로 향한다.

사오리는 죽은 남편의 위패를 집 한쪽에 차려놓고 살고 그의 생일을 챙기며 미나토에게 일과를 말하게 하는 등 아들에게 훌륭한 럭비선수이자 멋진 가장이었던 아빠에 대해 잊지 않게 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미나토에게 넌 근본이 없는 아이가 아니며, 네가 자라 장차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비어 있는 부친의 자리를 네가 채워 우리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건네는 듯하다. 사오리의 이 바람은 기실 크게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의 가족 로망스적 이상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막 사춘기에, 그리고 자신이라는 주체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미나토에게 엄마가 그어주는 선 안쪽을 걸으면서도 바깥쪽을 힐끔힐끔 보게 되는 상황이 당도해 있었다는 점이다. 선 밖의 의식들, 즉 아버지처럼 살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알 수 없이 자꾸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시선, 머리카락에 닿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비틀거리는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울수록 선 밖의 세계에 대한 사랑하는 엄마의 확고한 선언, 즉 ‘지옥’이라는 말의 확고함이 미나토를 날카롭게 찌른다.

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늘 농담조로 말하곤 하는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맨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 늘 체육복을 입고 호기롭게 ‘남자가 그게 뭐냐’를 외치는 호리 선생의 친근한 말, 학교 아이들의 약한 아이 요리를 향한 장난 섞인 괴롭힘, 그것을 막다가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위기에 처하자 실수로 과도한 대응을 하는 것, 요리에게 ‘네 뇌는 돼지의 뇌’라며 병이 걸렸지만 고쳐주겠다고 하는 요리 아버지의 말 등 미나토를 둘러싼 많은 가족과 학교의 많은 구성원의 말과 행동은 그 무의도성을 통해 미나토에게 자신/자신 밖의 세계의 혼란함을 가중시키며 압박한다.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두운 내면과 그것이 표출되었을 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규율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점만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미나토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된다.
빅크런치를 지나고 나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박상영의 소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는 암에 걸린 엄마를 간호 중인 ‘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중도우파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모친에게 시달리면서도 전직 운동권이었던 ‘형’이라는 상대와의 만남을 통해 겨우 힘든 시기를 견디는데, 사귀면서도 디나이얼한(자기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던 상대가 떠나면서 결국 연애는 실패로 끝난다. 시종일관 자조 섞인 농담으로 엄마의 병과 자신의 정체성의 여러 지점들을 경쾌한 듯 드러내던 ‘영’이지만, ‘형’과의 연애가 잘되지 않을 때마다, 그리고 결국 그가 떠나고 나자 극심한 우울함과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 불현듯 엄마가 잔디밭에 앉으면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온몸에 피를 쏟아 죽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평생 풀에 닿지 않으려고 보도블록 안쪽으로만 걸어다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자의식이 투영된 또 다른 작품에서는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대도시의 사랑법>>, p.46)라고 묻기도 한다.

미나토 역시 “나는 왜 태어났어?”라고 엄마에게 묻는다. 사람에게 돼지의 뇌를 이식하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 빅크런치(big crunch)가 발생하면 일어나게 될 사태에 대한 궁금증, 아버지는 다시 태어났을까, 나는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까, 모든 것이 들통나면 행복해질 수 없을까봐라는 미나토의 질문은 모두 원점을 향하고 있다. 불이 난 건물을 바라보며 모든 것이 붕괴되고 나면 남는 것은 ‘나’ 그대로일까 아니면 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의 ‘나’가 될까라는 근본적인 고독한 물음 속에 미나토가 잠겨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마에 그림을 붙인 띠를 두르고도 자신은 그 그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스무고개에 의지해 그것을 추측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난망함, 자신이라는 주체를 상대가 그어주는 경계에 의해 도출해야 한다는 정답이 정해진 현실 속에서 그 존재론적인 향배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고비를 지금 미나토는 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상영의 ‘영’은 이미 어른이지만,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자신이 실패한 자리마다 늘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엄마에게 사과받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자신을 병원에 보낸 사건 때문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혹은 자신에게-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 원점에 놓이게 되는 존재론적인 고독함의 자리에서 늘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답을 내려주지 않은 채, 모호한 엄마의 고백과 함께 현실을 직시할 뿐임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아직 어린 미나토를 바라보는 고레에다의 시선은 좀 더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미나토에게 따뜻함을 맛보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엄마의 말,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교장선생님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부른다는 말, 그리고 아이들의 글을 오탈자까지 꼼꼼히 읽어봐 주는 호리 선생의 시선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측케 하는 작은 조각들이다.

불이 난 건물에서 시작한 영화는 어마어마한 태풍이 덮치는 것으로 종결부를 향해 달려가는데, 불만큼이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뿌리 뽑히게 하는 태풍의 위력이 상당 부분 장면으로 전시된다. 태풍을 막기 위해 단단히 방비하는 어른들과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어른들을 보여주면서, 이에 자신만의 방공호(기차) 속에서 태풍을 견뎌내는 아이들을 대비시킨다. 감독의 전작인 <태풍이 지나가고>(원제;海よりもまだ深, 2016)의 제목을 상기시키는 이 시퀀스는 상징적으로 모든 것을 재배치시키는 빅크런치로서 미나토에게 작용하여 성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미나토와 요리가 하던 게임에서 ‘괴물은 누구게’라는 말은 결국 누구에게나 있는 어두운 내면, 들통나면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단면만을 보고서는 곡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을 향한 우리의 편협한 시선까지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