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칼럼

명예교수 칼럼

우암 선생님의 대화식 강의

기고자. 조선해양공학과 김효철 명예교수
김효철 명예교수
김효철 명예교수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중이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학생의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하는 병역 우대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1956년 11월 이후 군에 입대한 대학생은 1년 6개월이 지나면 귀휴병으로 신분을 전환하여 실제 복무하지 않고 복학할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 병역 단축 제도를 1963년까지 운영하였다. 1959년 입학하였던 나는 1961년에는 입대하여야만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1960년 연말경부터 자원입대를 계획하였다. 제도 폐지가 공지된 상태였으므로 입영 통지서를 받으려 여러 차례 지원하였으나 입영 통지서가 발급되지 않아 3학년 봄 학기 등록하였다. 김정훈 교수가 담당하는 공릉동 캠퍼스의 중력식 선형시험 수조에서는 육군 특수부대가 사용할 대간첩선 작전용 초고속선을 개발하고 있었다. 나는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선형시험 수조에서 소형 수중익선 건조 작업과 모형선 제작에 참여하는 선배들을 따라 김정훈 교수의 연구를 도왔다.

1959년에는 신입생으로 교양 과목을 수강하였고 2학년에 공학 기초 과목을 수강하였을 뿐 선박 제도 시간에 선박 도면을 옮겨 그리며 명칭과 기능을 알려 한 것이 전공 과목의 전부였다. 3학년에 전공 과목으로 김정훈 교수의 유체역학 강의를 들으며 틈틈이 수중익선 건조 작업에 참여할 때는 조선 기술자가 된 듯하였다. 마음이 들떠 있었기에 목공 작업은 열심히 하였으나 정작 수강한 과목은 시험 준비가 부족하여 성적이 좋지 못하였다. 김정훈 교수는 교실에서 시 험성적을 발표하며 "김군 성적이 왜 이 모양이야!"라며 꾸중을 하셨는데 얼굴이 뜨거워지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하지만 곧바로 입영 통지서를 받고 성적이 확정되기 전 급히 입대하였기에 제대 후 복학하여 김정훈 교수 강의를 다시 수강하였다. 이번에는 좋은 성적을 받겠다고 생각하며 김 교수 연구의 내용도 모르며 수동 계산기로 계산하는 일을 도왔다. 한 달쯤 지나서야 비로소 계산 내용이 부유체 운동을 해석하는 적분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수치 계산임을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계산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수강하던 유체역학 시험 준비가 부족하여 성적은 좋지 않았다. 2학기에는 실험실에서 모형 시험을 도왔으나 김 교수는 연구하던 문제를 Hamburg 대학에서 계속하게 되어 가을 출국하였다. 김 교수는 학계에서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올렸으며 미국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수치계산이나 실험 또는 성적으로 김 교수의 인정을 받으려던 작은 소망을 이루지 못하였다.

1963년 4학년이 되어 우암(牛岩) 김재근 교수가 두 학기에 걸쳐 개설하는 선박 설계와 선박 설계 연습을 수강하였다. 우암 선생님은 40대 초반의 젊은 교수였으나 해방 전에는 일본 해군의 잠수함 설계 부서에서 근무하였으며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대한조선공사의 조선과장으로 근무하며 대한조선학회 창립을 이끌었다. 종전 후에는 Minnesota 계획으로 MIT에서 선박 설계를 수학하였으며 1960년부터 대한조선학회의 회장에 취임하며 혁명정부가 조선산업 육성 정책을 펼치도록 건의한 원로학자로 모든 학생이 우러러보았다. 강의 초반에 우암 선생님은 선박 설계를 올바르게 하려면 다루려는 선박의 성격을 바르게 인식하여야만 한다며 마음에 새길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은 막대한 양의 재화를 한꺼번에 수송하여야 하므로 육상 수송 기관 이상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선박에는 다수의 선원이 생활하며 장거리 국제 항로에서 장기간 연속 운항하는 살아 움직이는 부유 구조물이므로 선박은 육상 수송 기관이나 건축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뢰성이 요구된다. 동시에 선박은 국제 항로에 취항하여야 하므로 국제 법규와 여러 나라의 관습에도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선박은 과학 기술의 집약체임에도 예술성이 강조되어 학과명에 engineering을 사용하지 않고 architecture를 사용한다고 설명하였다. 학생들은 우암 선생님 강의를 불과 몇 시간 수강하였음에도 정부가 국가 기간 산업으로 육성하는 조선 산업의 핵심 인력이 되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또 학생들은 수강하며 공과대학의 다른 학문 분야와 달리 거대한 구조물에 아름다움과 능률적 기능을 부여하는 창조적 예술가를 지향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우암 김재근 교수

처음 몇 주간 선박 설계와 선박 설계 연습 강의가 진행되었을 때 우암 선생은 칠판에 큰 숫자 4000, 5000, 6000, 8000, 10,000을 적고 옆에는 12, 14, 16, 18, 20이라고 작은 숫자를 적어 놓고 출석을 불렀다. 호명된 학생이 큰 숫자와 작은 숫자를 하나씩 선택하면 선생님은 출석부에 표시하였다. 학생이 선택한 큰 숫자는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두 학기에 걸쳐 설계하여야 하는 선박의 화물 적재량이었고 작은 숫자는 배의 속도였다. 당시 대한조선공사에서는 만재 배수량 2,600톤인 신양호를 미국 선급의 승인을 받으며 건조하여 7월에 진수 예정이었으며 이를 조선 기술자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던 10,000톤급 화물선 Miss Korea호는 2차 대전 중 침몰한 화물선을 인양하여 일본에서 수리 후 재취역한 선박이었다. 조선 기술자들은 10,000톤급 선박을 우리 손으로 설계하여 건조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이 출석부 앞쪽에 있었기에 10,000이라는 숫자와 20이라는 숫자를 선택할 수 있었고 모두가 염원하는 10,000톤급 고속 선박을 설계하는 행운을 잡았기에 몹시 자랑스러웠다.

우암 선생님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주 3시간의 강의에서 선박 설계 일반 논리와 선박의 사례들을 다루었으며 선박 설계 연습은 개인별로 설계하고 있는 내용을 제도실에서 도면으로 옮기는 실습이었다. 우암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게 강의 내용을 노트에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강의 내용에 따라서 학생 각자가 설계하는 선박에 적용한 내용을 설계 노트로 요약하여 일기 형식으로 정리하라 하였다. 정기적으로 모든 학생의 강의 노트를 검사하였는데 더러는 학생의 생각을 묻고 그에 대한 평을 하셨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셨을 때는 설계 노트는 자기만의 새로운 생각을 선박에 구현하려 생각한 것이므로 비록 잘못된 내용이더라도 모든 내용은 소중하게 기록하라 하였다. 설계하며 좀 더 좋은 안을 채택하게 되었을 때도 초기의 안은 다시 되돌아볼 수 있도록 메모를 남기라 하였다. 모든 학생이 수강한 내용을 스스로 선택한 자기만의 선박에 적용하여 매주 주요 내용을 하나씩 결정하며 노트에 정리하고 이를 연습 시간에 도면으로 나타내어야 하였다.

내가 자랑스럽게 선택한 화물 적재량과 운항 속도는 해운 항로에 취항하고 있는 일반 상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었으므로 설계에 참고할 자료를 찾기 어려워 좋은 설계 시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예컨대 선형의 초안을 마련한 후 속도를 낼 수 있는 대형 선박 엔진을 찾았을 때는 엔진의 치수가 커서 내가 설계한 선형 안에 배치하기가 어려웠다. 또 어렵게 배치하면 화물 적재 공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나타나 선형을 설계하고 맞는 엔진을 선택하려던 최초 생각과 달리 선택한 엔진을 기준으로 선형을 설계하여야만 하였다. 엔진을 수용할 수 있는 선형은 설계 목표로 설정한 10,000톤 이상의 화물 적재 공간이 나타났다. 결국 나의 설계는 엔진 정비 공간이 갑판 위로 돌출되고 이를 별도 구획으로 보호하는 비정상적 선박이 되었다. 강의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김재근 교수는 학생들 설계 노트를 일일이 살피고 서명을 남겼는데 더러는 excellent 또는 good이라 표시를 함께 남기셨다. 하지만 내가 자랑스럽게 선택한 배의 설계 노트에는 우암 선생님의 칭찬이 담긴 자랑스러운 평가 표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박 설계 연습 시간에 학생들이 각자 배정된 제도 테이블에서 작업할 때 선생님은 학생들 테이블을 찾아 학생들과 의견을 나누고 설계 도면에도 메모를 남기시었다. 우암 선생님이 테이블을 옮겨가며 학생과 나누는 대화와 평가를 학생들은 선생님을 따라가며 둘러서서 듣곤 하였다. 이러한 선생님의 독특한 대화식 강의는 모든 학생이 다른 설계를 하고 있었으므로 풍부한 실무 경험을 가진 우암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강의였다. 나는 복학생으로 학교 앞에 하숙 생활을 하였으므로 항상 제도실 창가의 밝은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제도 테이블은 여러 학생이 둘러서기에 자리가 불편하여 자연스럽게 우암 선생님이 내 자리를 찾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나는 다른 학생의 설계를 평가하는 말씀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나의 설계 노트와 도면에는 선생님이 평가한 표시가 적었다. 우암 선생님은 학기 말 시험과 별도로 마지막 시간에 설계 노트와 도면에 남겨진 메모를 확인하고 성적 평가에 반영하였다.

우암 선생님은 선박 설계 한 과목을 강의하셨으나 수강하는 학생 31명 각자가 다르게 선정한 선박에 적용하여야 하였으므로 31종 선박을 구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우암 선생님은 학기 말 성적 제출을 앞두고 선박 설계 과목에서 모든 학생이 다른 문제를 풀었으니 당연히 답도 모두 다르다 하셨다. 또 같은 선박일지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게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과제를 수행하며 각자 노력한 소중한 설계는 어떤 형태로든 후일 바르게 평가받을 기회가 있으리라 하였다. 아마도 병역 제도 변경으로 통상적으로 수강생이 10명 정도로 운영하던 대화식 강의를 31명의 수강생으로 운영하며 성적 평가에 어려움을 느껴 학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 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욕심내어 10,000톤 화물을 적재하고 선속 20 놋트로 운항할 선박을 설계하려 노력하였으나 마지막 학기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나의 노력이 담긴 설계였으므로 언젠가 기회가 돌아와 우암 선생님의 평가를 다시 받을 수 있었으면 하였다.

1967년 대한조선학회가 정부에서 10,000 톤급 화물선을 표준형선 설계 사업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가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학원에 재학 중 기숙사 방으로 찾아온 후배에게 빌려준 나의 노력이 담긴 설계 노트를 되돌려받으려 하였으나 노트가 대물림되었음을 알았을 뿐 행방을 알 수 없었다. 1970년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을 때 학과는 신임 교수의 부담을 줄여준다며 주 3시간의 선박 제도 과목을 나에게 배정하였다. 졸업 후 취업하여 기계설계부서에서 근무하였을 뿐이어서 선박 도면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나 우암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제도실에서 학생들과 어려움이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1972년 5월 대한조선공사가 10,000톤급 표준형선을 모태로 Pan Korea호를 설계 건조하여 진수하였으며 국가적 뉴스로 다루어질 때는 설계 노트를 잃어버린 일이 다시 한번 아쉬웠다.

1976년 김정훈 교수가 담당하던 교과목을 담당하며 실험 시설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는 실무를 맡게 되었다. 1979년 겨울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고 선형시험 수조를 JGG 자금과 정부 지원으로 국제적 수준으로 새롭게 마련하였다. 새 시설을 사용하여 국내 여러 연구기관과 공 동연구를 수행하여 1987년 국제 회의에 보고하였으며 서울대의 결과가 세계 22개 연구기관이 참여한 공동 연구 결과와 대등한 결과여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수출하는 선박의 모형 실험으로 산업체의 설계 업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일본과 선두 다툼을 시작하였으며 2002년 건조량은 일본을 앞질렀다. 기회에 공릉동 캠퍼스의 중력식 선형시험 수조가 조선 산업 발전에 끼친 역할을 되새기려 '서울대학교 중력식 수조 40주년 기념'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 행사에 김정훈 교수를 초청하여 공릉동 수조 건설 초기를 회상하는 특강을 들었다. 김정훈 교수에게 관악 캠퍼스의 새로운 선형시험 수조와 이룬 업적을 소개하며 나는 비로소 김 교수로부터 인정받았다고 느끼며 우암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바르게 평가받는 기회가 바로 40주년 기념행사였다고 생각하였다.

기념행사 책자와 김정훈 교수

나는 우암 김재근 선생님께서 선박 설계 강의에서 하신 '선박은 다양한 학문 분야와 기술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구성에 따라 기능이 다르게 된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다양한 요소를 넓은 시각에서 반복 유추하여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과정을 대화식 강의에서 보이셨는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웠더라면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 김정훈 교수님의 학문적 시각과 도전 정신을 배우려 하였더라면 더욱 보람 있는 일을 이루었으리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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