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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진정한 선두인 우리의 조선 기술

기고자. 조선해양공학과 김효철 명예교수
김효철 명예교수
김효철 명예교수

서울대학이 1946년 개교할 당시 경성대학 공학계(京城大學 工學系)와 경성공전(京城工專) 그리고 경성광전(京城鑛專)을 통폐합하여 공과대학을 발족하였다. 이때 개설한 9개 학과 중 항공조선공학과는 국가 장래를 위하여 조선, 항공 교육과정을 개설해야 한다는 이승만 박사의 뜻에 따라 신설한 학과였다. 1949년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전시 일본의 잠수함설계팀에 근무하였던 김재근 교수가 부임하였으나 조선학 강의는 미국 조선학회가 1939년 발간한 Principles of Naval Architecture(PNA)를 세미나 형태로 교수와 학생이 함께 읽으며 공부하여야만 하였다. 또 학생들은 교정에서 소형선을 직접 건조하며 체험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1947년 입학생들이 길이가 6.5m인 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과정에 철판을 절단하는 데 사용하던 아세틸렌 가스 발생기가 폭발하며 이승만 대통령 관저인 이화장으로 연결되는 전화선이 끊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조선 기술에 깊은 관심이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사고를 보고받고 직접 현장을 찾아 격려하고 작업 학생들의 부식으로 쓸 고등어 절임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또 '진수호'라 이름 지은 소형선을 노량진 한강 변에서 진수할 때는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이 진수 현장을 찾아와 축사하였다.

1950년 5월 12일 조선공학을 전공한 첫 번째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고 이들 중 김정훈, 조규종, 조필제, 황종흘 4인이 대한조선공사에 취업하여 부임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2월 서울대학은 부산 서대신동에 전시 피난 연합대학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강의를 개설하였다. 전시이고 조선 기술자가 희소한 사정이어서 김재근 교수는 대한조선공사 설계 업무의 고문직을 겸직하였으므로 교수와 첫 졸업생이 같은 회사에 함께 근무하였다. 또 김정훈과 황종흘은 대한조선공사에서 함정 수리 업무를 담당하며 모교에 출강하였으므로 첫 졸업생이 졸업 다음 해부터 교수와 함께 강의를 맡는 일이 일어났다. 1951년 5월 진수호 건조를 주도하였던 1947년 입학생 5명이 부산에서 졸업하였으며 대한조선공사와 해군에서 복무하며 미 해군의 함정 수리 업무를 전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2월 조병창 설립에 도움 될 대한기술총협회를 결성토록 하였다. 이 상황이 촉진제가 되어 대한조선공사에서 근무하던 김재근 교수와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해군 장교 그리고 현장 기술자들이 대한조선학회를 창립하였다. 하지만 1953년 정전협정 체결로 정부는 조병 및 조함 사업보다는 전후 복구 사업에 집중하여야 하였다.

서울대학은 1953년 농학, 공학, 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재건계획을 제출하여 미국대외활동본부(FOA: 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의 원조를 확보하였다. 이 원조 계획은 미국 국제협력개발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사업으로 승계되었고 서울대학은 미네소타대학과 협력하며 시설 복구와 교육용 실험 기기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김재근 교수를 비롯한 김정훈, 황종흘, 임상전(48학번) 등의 젊은 교수들이 1954년부터 차례로 MIT에서 최신 조선학을 접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인하대학을 설립하고 조선공학을 교육하도록 하였으며 1회 졸업생 조규종이 조선공학과 개설을 주도하였다. 내가 1959년 조선공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학과 교수 모두가 MIT에서 조선학을 공부하였으며 MIT 조선과의 실험실을 복제한 실험실 기자재들이 입하되고 있어 몹시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62년 지금 보면 비록 작은 시설이었으나 조선학 교육의 핵심 시설인 중력식 선형시험 수조가 공릉동 캠퍼스에 준공되었다. MIT의 Abkowitz 교수는 이 준공된 새로운 시설을 국제선형시험수조회의(ITTC: International Towing Tank Conference)에 한국을 대표하는 선형시험수조로 추천하여 서울대학의 수조는 국제기구의 회원기관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학과 설립 후 16년 만인 1962년에 학과는 모든 교수가 MIT에서 조선학 교육을 받았으며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시설을 갖춘 학과가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하였으나 이 시점이 바로 이승만 박사가 바라던 조선학 교육 체계가 갖추어진 해라고 생각한다,

대한조선학회지

1961년 5.16 군사혁명 후 여러 학과에서 학문적 발전이 정체된 교수들을 배척하는 정풍운동이 있었다. 개교하며 새롭게 시작한 조선공학과는 정풍운동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교수들이 앞장서 창립 후 활동이 정체되었던 대한조선학회를 활성화하고 조선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여 혁명정부에 건의하였다. 이 정책 건의를 받아들여 혁명정부는 조선 산업을 핵심 사업으로 포함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으므로 조선공학과의 인기가 높아져 1963년 서울대학의 입시 경쟁률은 4.1:1이었는데 조선공학과의 입시 경쟁률은 10.8:1로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공과대학에 연구비를 집중 지원하였으며 이는 대한조선학회가 조선학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대한조선학회지를 창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한일 협정체결 후 확보한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정부는 65종의 표준형선 설계를 학회에 위임하였으며 선박 관련 공업표준을 제정하여 조선 산업의 배경을 구축하였다. 또 직접적으로 조선 장려 정책으로 조선소들이 국내에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67년에는 월남에 전쟁 물자 하역 작업에 쓰일 바지선을 수출하였으며 1969년에는 대만에 원양 참치 어선 20척을 수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선박 수출을 시작하였으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새로이 건설한 대형 조선소들이 수주 활동에 나서려면 내보일 만한 선박 건조 실적이 필요하였다. 정부는 표준형선 설계 사업으로 설계한 10,000톤급 다목적 화물선 Pan Korea 호를 3년에 걸친 재정 지원으로 대한조선공사에서 건조하여 1972년 6월 15일 수주 활동에 도움 될 실적이 되도록 하였다. 대형 선박의 건조 실적으로 대한조선공사는 미국 걸프 오일 사의 20,000톤급 석유 제품 운반선 4척 그리고 30,000톤급 유조선 2척 수주에 성공하였다. 또 1970년 현대건설 조선사업부가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하며 수주에 나서 260,000톤급 초대형 유조선 Atlantic Baron을 수주하였고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하여 1974년 6월 28일 진수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 참석(1)
박정희 대통령 내외 참석(2)

서울대학은 1971년 관악산에 종합 캠퍼스를 기공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조선공학과는 새로운 선형시험수조를 계획하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대일 청구권 자금을 조선 산업을 지원할 연구 시설 확보에 투입하여 인하대학에 예인 전차 방식의 선형시험수조를 1971년 건설하였으며 뒤를 이어 1974년 부산대학에 선형시험수조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선박연구실을 부설 선박연구소로 확대 개편하고 국제 규모의 실험 시설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한편 조선공학과의 황종흘 교수와 항공공학과의 조경국 교수는 일본 대사 초청 만찬 자리에서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도록 공과대학 이전 사업을 지원하라고 대사를 설득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과대학에 일본정부 무상원조자금(JGG: Japanese Government Grant)이 제공되었으며 조선공학과 선형시험수조는 필요한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조선 공학 교육이 늦게 시작되었고 1968년에 비로소 조선공학과로 독립하였으므로 대학원에 박사 학위 과정이 개설된 것은 1974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학위 제도를 개혁하고 연구 경력으로 학위를 신청하는 구제 박사 학위 제도를 1975년까지 한시적으로 유지키로 하였다. 1970년대 초반에 조선학과 교수들의 학위 논문 연구로 대학의 교수 연구실은 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 분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서울대학은 조선 기술자 양성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개최하여 조선 산업은 공학 기술의 융합 능력이 있고 산업 전반을 폭넓게 이해하는 소수 정예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1974년부터 조선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하여 서울대와 인하대 그리고 부산대학의 조선공학과를 경제개발 특별예산으로 집중하여 지원하였다. 정부의 조선 산업 육성 정책으로 대형 조선소들이 능력을 보이기 시작하자 OECD는 1976년 조선 선진국들의 협의 기구인 조선전문위원회(WP6: Working Party 6)에 한국의 회원국 가입을 요청하였다. 조선 산업의 역량을 세계가 인정하게 되고 특례 보충역 제도와 국비 유학 제도로 병역 혜택과 해외 학업 기회가 주어지자 우수한 학생들이 조선공학을 전공하려 하였다. 1975년부터 우리나라 조선 기술자들이 해군과 협력하여 함정 개발에 나서 소형 유도탄 고속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중형 고속함, 호위함, 잠수함, 상륙정 등 다양한 함정을 차례로 개발하였다. 조선 기술의 집약체인 고속경비함을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건조하여 1979년 인도네시아에 수출하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으로 16년간 가꾸어 얻은 조선학 교육의 결실이 건강한 조선 산업으로 뿌리내리도록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16년간 육성한 결과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전을 계기로 조선공학과는 관악캠퍼스에 설치할 선형시험수조를 비롯한 주요 연구 시설을 새롭게 계획하였다. 대덕연구단지의 선박연구소에 국제 규모의 선형시험수조가 준공된 1978년 ITTC는 저항 추정에 사용하던 1957년 2차원 해석법을 1978년 3차원 해석법으로 변경하였다. 2차원 해석법은 한국전쟁 기간 중 일어난 갑작스러운 선박의 대형화로 기존의 저항 추정법을 보완하여 제정한 것이었으며 3차원 추정법은 중동전쟁으로 갑작스럽게 출현한 초대형 선박의 저항 추정 정도를 높이려 제안한 새로운 추정법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ITTC는 선박의 저항 성분을 수치 계산하는 연구와 실험적으로 추정하는 국제 공동 연구를 수행하였다. 1979년 연말 조선공학과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새로이 건설될 선형시험수조와 국내의 선형시험 수조 보유 기관들을 규합하여 ITTC 활동에 대응하는 수조시험연구회(KTTC: Korea Towing Tank Conference)를 조직하였다. 1983년 서울대학은 JGG 자금과 OECF(Overseas Economic Cooperation Fund) 자금, 그리고 IBRD 차관 자금을 투입하여 조선공학과에 국제 경쟁력을 갖춘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였다. 이 시기에 ITTC는 새로이 제정한 3차원 해석법을 검증하기 위하여 전 세계의 22개 주요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국제 공동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조선공학과는 같은 연구를 KTTC 공동 연구로 수행하여 1987년 ITTC Kobe 회의에 보고하였다. KTTC 결과가 ITTC 공동 연구 결과의 대푯값과 일치하여 ITTC는 세계에서 사용하는 시험법을 분석하여 수조시험법 표준제정의 계기가 되었으며 KTTC의 시험법이 ITTC와 ISO 규격의 근간이 되었다.

1987년 우리나라는 416만 톤의 선박을 수주하여 기준 세계시장 점유비가 30.2%에 도달하여 477만 톤을 수주한 일본의 점유비 34.7%에 근접하였으며 3/4분기부터는 일본을 앞지르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이 ITTC에 회원 기관으로 가입하였으며 뒤를 이어 1990년 인하대학과 부산대학이 회원 기관으로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의 연구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조선 산업의 위상이 두드러지며 우리나라는 학술과 기술 분야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1992년에는 제19차 선박유체역학회의(ONR Symposium)와 1995년 제6차 선박설계에 관한 국제회의(PRADS: International Symposium on Practical Design of Ships and Mobile Units)를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때 PRADS에 참석하였던 서구의 석학들은 우리나라의 학문 활동을 눈여겨보았으며 일본과 다르게 서구와 협력하여 구축한 효율적인 조선 시설을 확인하였다. 특히 한 척의 선박 건조를 표준으로 생각하던 선진국 기술자들은 종류가 다른 여러 척의 선박을 동시에 건조하는 한국의 앞선 조선 기술 역량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초반에 "선박설계 생산 전산 시스템 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조선소들은 전산 기술을 현장에 도입하고 실증하는 역할을 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CAD - CAM 기술이 정착되며 선박 부품을 현장에서 실물 크기로 그리는 현도 공정이 생략되었으며 현장에서 대형 블록을 정밀 측정하는 3차원 측정 기술을 개발하여 중량이 3000ton 이상인 초대형 블록을 활용하므로 선박 건조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였다. 또 건조와 조립을 건조 도크만 아니라 육상이나 부유식 도크 또는 해상에서도 조립할 수 있는 특수 공법을 개발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선 산업에 진출할 초기에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광물 운반선 건조가 자랑거리였으나 석유 화학제품 운반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쇄빙 LNG선으로 발전하였으며 뛰어난 성능을 가진 함정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발전을 기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990년 중반에 조선 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중국은 경제개발에 따르는 막대한 선박 내수가 발생하였으며 정부의 보조금 지금으로 조선 산업이 급성장하였다. 아직은 기술적으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으나 세계 선박 수급에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산업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협력 업무협약(MOU)' 체결 사진.
2024년 7월 22일 미시간주 맥콤 칼리지.
(왼쪽부터) 델 토로 해군성 장관, 신종계 서울대 명예교수 겸 HD현대 기술자문, 브락 해군성 장관 특별보좌관, 페이지 미시간대 교수

최근에는 유럽과 중동에서의 분쟁이 이어지며 해상운송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국제질서가 개편되고 있다. 미국은 AUKUS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으로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 구축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함정 연구보다는 항공우주 연구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여러 종류의 우수한 함정을 개발하였으나 함정 건조는 새로운 선박의 시험 건조라는 성격이 강하여 효율적인 생산 기술은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정체되었다. 뒤늦게 미국은 한국 조선 기술의 도움이 없으면 적기에 함정 수급이 불가능하여 해상 세력 유지가 어려워진다는 현실을 확실하게 인식하였다. 2024년 2월 미국 해군성(Dept. of Navy : DoN) 장관 Del Toro가 한국의 조선 산업의 역량을 직접 확인하고 한국과 협력 강화를 모색하였다. 한화오션은 미국에 있는 조선소를 인수하여 선박 건조 전진기지를 마련하였으나 미국 내에 조선 전문 인력의 부족은 별도의 심각한 문제였다. 매년 여름 MIT에서 선박 생산 특강을 강의하고 있던 HD현대의 기술자문인 신종계 교수는 한미 양국의 조선 현황을 반영한 인력 양성 계획을 조선공학과 학과장 이신형 교수와 협의 작성하여 2024년 6월 미국 해군에 제안하였다. 2024년 7월10일 MIT에서 서울대와 HD 현대중공업 그리고 미시간대학과 MIT가 한미 조선 인재 육성을 협의하였고, 공동으로 '조선 산업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하여 해군성 장관 Del Toro는 7월 22일 미시간 조선 생산 협의회(M3: Michigan Maritime Manufacturing) 발족 기념식 기념사에서 한국과 교육 협력 업무 협약 체결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백악관은 바이든 행정부의 업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조선공학과는 2차 대전 후 이승만 박사의 꿈으로 시작한 학과였고 4.19가 지난 1962년에 비로소 모습을 갖추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혁명 후 조선 산업을 육성하였을 때 전국의 우수 인재들이 조선공학에 뜻을 두었으며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 조선 기술을 도입하였다. 우리 조선 산업은 새마을 운동 홍보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처럼 젊은 인재들의 열정으로 단기간 내 세계 선두에 올랐다. 이제 전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 흐름은 우리가 공급하는 LNG선이 지배하고 있으며, 해상 물류는 우리의 손으로 건조한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도맡고 있다. 또한 세계의 최강국으로 자처하는 미국조차도 조선 공학의 필수 교육과정으로부터 친환경 기술, 인공지능 기술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해상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도 우리 기술 지원이 절실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국제 조선전문위원회(CESS: Committee for Expertise of Shipbuilding Specifics)의 의장국이 되었으며 2023년 신종계 교수가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조선 기술이 진정한 세계의 선두에 올랐으며 K-조선으로 세계를 활기차게 움직이도록 하며 세계를 평화롭게 이끌고 있음이 몹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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