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칼럼
잃어버린 格(격)을 찾아서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나용수 교수본문

'격(格)'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예의나 태도가 아니라, 시간의 결을 통과하며 단단해진 한 사람의 내면을 뜻한다. 강헌 평론가가 말했듯,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음악 속에서 '격'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때에 2016년 정미조가 조용히 내놓은 정규 음반 <37년>은 '격'이란 무엇인지 다시 떠올리게 만든 작품이었다. 37년의 긴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내놓은 이 앨범은 그저 복귀라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선언이었고, 음악이 품을 수 있는 절제와 품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앨범에는 과장도, 장식도 없다. 대신 고요한 강물처럼 흐르는 목소리가 있다. 나이 들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떨림마저 음악의 일부가 되는 우아함이 담겨있다.
"개여울", "귀로", "인생은 아름다워", "미워하지 않아요", "7번 국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낙타", "그대와 춤을", "다시 만나요", "피려거든, 그 꽃이여", "도대체", "끝이 없는 이별", "휘파람을 부세요" 등 13곡이 수록되어 있는 이 앨범은 커버곡과 신곡을 적절히 배치해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각 곡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현재의 감각과 연주로 어우러져, 잊고 있던 감정의 결을 다시 깨워낸다.


<37년>의 첫 곡이 재생되는 순간부터 마지막 곡으로 이어질 때까지, 듣는 이는 마치 먼지 쌓인 오래된 나무 악기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을 느낀다. 이것은 단지 감정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감정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커버 곡과 신곡이 섞여 있지만 전체를 감싸는 정서는 하나다. 바로 절제된 감정의 깊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곡 중 하나가 "개여울"이다. 겹겹이 쌓인 세월과 삶의 무게가 묻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말라는 부탁인지요'라는 구절은 37년이 지나 하얗게 서리가 내린 지금도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소월의 시 "개여울"은 1965년 김정희로부터 시작하였지만, 정미조를 통해 꽃을 피웠다. 여진, 송창식, 최양숙, 심수봉, 적우, 말로, 아이유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해온 명곡이지만, 정미조의 "개여울"은 애잔함을 폭발시키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은 비애를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귀로"에는 그녀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지적인 이미지와 기품 있는 목소리, 탁월한 곡 해석으로 70년대를 풍미했던 이 가수는 그 정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랑스로 떠나 화가의 삶을 선택했다. 파리7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수원대 서양화 교수로 재직했고, 그렇게 홀연히 음악계를 떠난 지 딱 37년이 지난 2016년 가수로 돌아왔다. 무지개를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다니던 그녀는 먼길을 돌아 푸른 숨을 쉬며 그토록 그리워하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기에 이 곡은 더욱 짙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앨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곡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다. 절제된 감성과 서정적 호흡이 아름답게 배합된 곡으로, 지난 시간의 결이 한 음 한 음에 스며있다. 나는 이 곡을 2022년 3월 18일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포레스텔라의 무대로 처음 접했다. 듣자마자 곡의 서정성에 깊이 빠져들었고, 특히 고우림의 저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유희열이 정미조의 원곡을 꼭 들어보라고 권했던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아름다운 감성은 포레스텔라를 비롯하여 옥주현, 린 등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37년>은 2016년에 CD로 처음 발매되었다. (유니버설, 음반번호 : DK0979) 입소문을 타고 작품의 진가가 퍼져 2018년에는 LP 발매로 이어진다. (유니버설, 음반번호 : DK0939) 초판은 블랙 및 화이트 LP로 한정 제작되었고, 발매되기 무섭게 품절되며 ‘단번에 사라진 초판’으로 회자되었다. 무광 인쇄의 표지, 약간 어둡고 푸른 기운이 도는 사진 톤은 초판만의 특징이다. 이후 재판은 사진 밝기와 모양 그리고 인쇄 사양이 조금 다르고, 뒷면에 유니버설 로고가 없다.
LP에 대한 갈증은 2022년 화이트 LP(JNH 뮤직, 음반번호 : J2105), 2023년 블랙 LP (JNH 뮤직, 음반번호 : J2301) 재발매로 이어졌고, CD 또한 2025년에 재발매되었다. (유니버설, 음반번호 : DK1064)
정미조의 숨결이 주는 나무 향과 공기의 떨림은 LP라는 매체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그래서 2016년 초판 LP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단순한 음반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아날로그의 표면에 새겨진 그 미세한 결은 디지털로는 완전히 옮길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37년>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정미조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앨범은 음악이 산업적 상품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감각을 되찾아 준다. 속도를 늦추고, 곡과 곡 사이의 여백을 듣게 하고, 고요함 속에서 감정을 길어 올리는 감각이다. 음악이 재생 시간을 꽉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완벽한 고음이나 드라마틱한 클라이맥스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정미조는 이 앨범으로 깨우쳐 준다.
턴테이블에 이 음반을 올리는 순간, 왜 ‘격’이라는 단어가 다시 필요해졌는지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균질해지고, 빠른 소비에 익숙해진 시대에서 이제 보기 어려워진,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목소리에 담겨 있는 음반. 정미조의 <37년>은 우리에게 품위와 깊이가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작은 표석처럼 남는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나 오래된 음악의 복고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삶의 태도다. 그리고 훗날 이 음반을 다시 꺼내 들을 때마다, 우리는 한 가지를 다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좋은 음반은 시대가 아니라 자세로 기억된다는 것을. <37년>은 그 자세의 정점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