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칼럼

명예교수 칼럼

배와의 인연

김효철 서울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본문

김효철 명예교수

지난 5월 18일 저녁 뉴스 시간에 멕시코 해군사관학교 범장 실습선이 뉴욕항 브루클린 다리에 충돌하며 돛대가 부러지고 훈련생 20여 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방영되는 것을 보며 갑작스럽게 나는 75년 전으로 돌아가 배를 타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림1 멕시코 해군의 훈련용 범선

1950년 6.25 전쟁으로 유엔군이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10월 중순 중공군의 침공으로 전세가 급변하며 서울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기독교 교인 가족의 피란을 돕기 위하여 YWCA가 주선하여 인천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상선학교 실습선 Nippon-maru(日本丸)에 승선하여 피란길에 오르게 되었다. 1950년 12월 23일 오후라고 기억하는데 인천 해안 어디엔가에서 뱃머리를 활짝 열어젖힌 두 척의 상륙용 LST함에 승선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의 눈에는 배 안은 운동장만 해 보였는데, 피란민들이 가지고 온 짐보따리 주위에 둘러서니 설 자리가 비좁게 느껴졌다. 뱃머리 문을 닫고 인천항을 벗어나 늦은 저녁 시간이 되어 정박 중인 Nippon-maru에 옮겨 탔는 데 배 안 공간이 부족하여 짐에 기대앉아 잠을 자야 하였다. 나는 짐을 지킨다며 짐 위에 올라앉아 자는 게 재미있었다. 아침에 나누어주는 주먹밥을 먹는 것도 즐거웠고 군용 모포로 만든 방한복과 누비 방한모를 쓰고 추위도 모르고 갑판 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배는 세 개의 돛대가 있고 돛을 달 수 있는 배여서 해적선이 연상되었으며 선수에는 고풍스러운 커다란 닻이 좌우로 올려져 있었다. 실제로 상선학교의 실습선으로 사용하던 상당 규모의 선박이었음에도 범장선이었으므로 공격 대상이 아니어서 살아남았고 피란민 수송에 동원되었음을 후일 깨닫게 되었다. 많은 피란민을 수용하였음에도 정규 선원만으로, 돛을 사용하지 못하고 보조 디젤엔진으로 운항하였으므로 배의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림2 Nippon-maru (1930년 건조 1984년 퇴역 1989년 Yokohama Maritime Museum 전시)

배를 타고 두 번째 날 배 안에서 성탄 예배를 드렸는데 함께 부르던 성탄송이 울려 퍼지던 일이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호리병 속과 같은 기억의 공간에 남아있다. 성탄이 지나 두 번째 날 뱃머리에서 부서지는 물결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 주머니 속에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던 작은 볼트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집을 떠날 때 동생이 타던 세발자전거의 핸들 방향을 고정하는 볼트여서 내가 간직하면 자전거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져간 보물이었다. 배를 타고 떠난 지 4일째인데 쉽게 집에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보물을 바다에 버리고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갑판 위의 피란 짐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때 몹시 애처롭게 보였던지 일본인 선원이 손을 내밀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단문 일본어 인사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일본인 선원은 자기는 Harata이고 집안의 어린아이가 생각난다는 몸짓말을 알아들었다. 그 후 Harata와 자주 만났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눈치를 보이면 몸짓말로 갑판의 윈치 작동, 환풍기 작동을 설명하였고 기관실에서 주방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보여주었다.

전쟁 중이었고 통상항로에 부설된 기뢰 등 위험물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던 탓에 원거리를 돌아 항해하였기에 새해를 배에서 지내고 부산항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해양 경비정에 경찰이 타고 나와 부산에 수용 능력이 부족하다며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다. 모두 다시 출항하여 제주도로 항해를 시작하자 많은 피란민이 제주도로 귀양살이 간다며 통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후에 Harata는 자기 선실로 나를 데려가 다음 날 헤어지게 된다며 칼을 선물로 주며 잘 간직하라며 격려하였다. 짙은 밤색 나무 손잡이가 달린, 과도보다는 조금 큰 날이 두툼한 칼이었고 나에게 새로운 보물이 생겨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다음 날 오후 제주 산지항 앞 해상에 정박하였고 수많은 작은 어선들이 피란민들을 옮겨 싣고 산지항에 상륙하였다. 상륙한 곳은 지금의 연안 여객 터미널 근처라 기억하는데 한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부두 쪽에는 육지로 보낼 김장 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부산을 떠날 때 다들 통곡하였으나 정월 초사흘인데 제주도는 쾌청하고 햇살이 따사로웠다. 한동안 싱싱한 채소를 맛보지 못한 피란민 몇 사람이 허락도 없이 무를 맨입에 먹는 것을 보고 나는 보물 같은 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저녁을 제주 북 초등학교 강당에서 난방 없이 지냈는데 춥게 밤을 지냈다는 기억보다 제주는 따뜻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제주 시민들은 빈방을 피란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였는데 우리 가족은 용담동에 있는 고순엽씨 집의 방을 제공받았다. 제주 피란 생활 첫날 쌀과 찬거리를 마련하였으나 주방에 쓸 칼이 없어 난감해하시는 할머니에게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여야 할 칼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음 아픈 기억이 되었다. 제주시 용담동에서 피란 생활을 시작하고 나는 북초등학교를 다녔는데 5학년에 올라가며 부산으로 이사하였다. 부산 대청동에 거주하며 용두산 공원에 있던 덕수초등학교 부산 피란 분교 천막 교사에서 공부하며 부산항에 정박해 있는 스웨덴 병원선과 부산시의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선 등을 흥미롭게 내려다보곤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부민동에 있던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는 영도 다리가 들어 올려지는 시간에 맞추어 부산항을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정전협정 후 환도하여 고등학생일 때는 전혀 배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막상 대학에 진학하며 학과를 선택할 때는 조선공학 이외의 다른 선택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1959년 조선항공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원에 입학하여서는 대한조선학회 회원이 되었다. 나의 유년기에 있었던 배와의 인연이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어 평생 배와 함께하는 외길을 걷게 하였다. 대학에서 정년으로 퇴임하였으나 조선공학과의 최고령 명예교수가 되어 아직도 명예교수실을 지키고 있으며 대한조선학회에서는 생존해 있는 최고령 전임 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