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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회가 이룬 놀라운 일

기고자.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김효철 명예교수
김효철 명예교수

공과대학 모든 학과의 동창회는 단순히 학과명을 앞에 붙여 부르고 있으나 유독 조선해양공학과만은 학과 동창회를 진수회(進水會)라 부르고 있다. 이는 1950년 조선항공공학과 첫 번째 졸업생들이 졸업하며, 조선 전공자들이 배를 지어 진수할 날을 꿈꾸며 동창회 명칭을 진수회라 한 데서 연유한다.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진수회 활동은 1960년대 말 되살아나서 지금에 이르렀다. 지난 2024년 4월 19일 강남역 근처 다온정에서 진수회 2024년도 춘계 서울 모임이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1946년 입학하였으며 금년 100세가 되신 조필제 선배부터 2016년 입학한 강동훈까지 70년의 선후배가 함께한 특별한 모임이었다. 회의 막바지에 졸업하며 진수회라는 회명을 제안하였던 조필제 선배의 선창으로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를 모두 함께 부르고 모임을 마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진수회 모임은 공과대학에 기네스북이 있다면 올렸을 만한 특별한 모임이었다고 떠올리며 진수회 회원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조필제(1946학번) 선배와 함께 희망의 나라로를 부르고 있는 진수회원들
사진1 조필제(1946학번) 선배와 함께 '희망의 나라로'를 부르고 있는 진수회원들
(관련 영상 보기: https://youtu.be/1ncXB4L2mLU)
70년 후배 강동훈(2016학번)이 100수의 조필제 선배의 건강을 기원하며
사진2 70년 후배 강동훈(2016학번)이 100수의 조필제 선배의 건강을 기원하며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이 1946년 8월 22일 공포되었으며 서울대학교는 9월에 들어서 경성대학 공학계, 경성공전 그리고 경성광전을 통폐합하여 공과대학을 발족하였다. 공과대학에는 기존 대학의 건축, 기계, 섬유, 야금, 전기, 채광, 토목, 화공 등 8개 학과에 더하여 국가 장래를 위하여 항공조선학을 교육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항공조선과를 신설하였다. 기존 대학의 재학생들은 공과대학 개교와 동시 소속 학과의 학생이었으므로 개교 다음 해부터 졸업생이 있었다. 하지만 항공조선과는 새로이 설립한 학과여서 1950년에 비로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학과에는 경성제국대학 기계과를 졸업하고 '조선기계제작소'의 잠수함 설계 부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김재근 교수가 1949년 학과에 교수로 부임하였을 뿐 국내에는 조선공학을 전공한 기술자조차 없었으므로 학생과 교수가 함께 공부하여야만 하였다.

첫 번째 졸업생 6명 중 김정훈, 조규종, 조필제, 황종흘 4인이 1950년 5월 졸업하고 국내 유일의 규모를 갖춘 조선소인 대한조선공사에 부임하던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졸업생들은 조선소에서 선박 건조보다는 선박 수리 업무를 담당하여야 하였으며 대학과 함께 부산에 피난하였던 김재근 교수는 조선 과장직을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대한조선공사는 1회 졸업생들의 실무교육 현장이 되었다. 다음 해부터는 조선공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부산에서 졸업한 후 대한조선공사에 취업하였다. 특히 졸업생들은 해군 기술 요원으로 인정받으며 대한조선공사에서 미 해군 함정이나 군수 지원 상선을 수리하며 선진국의 최신 조선 기술을 접하였다.

1952년 2월에 정부는 자주 국방을 위하여 조병창 설립을 계획하고 기술의 배경이 될 과학기술 단체를 모아 대한기술 총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조선 분야는 이에 참여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조선 분야도 대한기술 총협회의 회원이 되려고 서둘러 1952년 11월 9일 대한조선공사에서 대한조선학회를 창립하였다. 이때까지 조선공학을 전공한 졸업생 17명 중 일부가 조선공사에 취업하였으므로 창립총회에는 조선공사에 근무하던 사원과 해군 장교 그리고 조선과 재학생들이 참석하였다. 일본은 우리에 55년 앞서 일본조선학회를 창설한 조선 선진국이었으나 패전으로 조선 산업은 사실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폐허 상태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상선 회사 National Bulk Carrier: NBC는 전쟁물자를 수송하려고 전시에 사용하던 10,000톤급 전시 표준형선 여러 척과 선박 기자재와 수리 부품을 불하받아 일본 조선소에서 상선으로 재취역할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일본은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막강한 해상 세력을 구축할 만큼 충분한 산업과 기술이 있었으므로 선박의 재취역 공사는 조선 산업이 되살아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중 NBC가 주도한 상선 대형화 사업은 일본 조선소들이 단순한 재건이 아니라 미국의 용접 기술과 새로운 공법을 받아들이며 조선소를 대형화하고 합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조선소에서 1953년 NBC가 38,000톤 상선을 건조하자 해운 산업에 규모의 변화가 일어났으며 일본 조선소들은 탁월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고 서구의 조선소들은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같은 시기에 동경대학의 Inui 교수는 Kelvin (1887), Michell (1898), Havelock (1934) 등의 고전 선박 유체역학 이론을 발전시켜 선박이 일으키는 파도로 인한 저항을 이론 해석하여 선형 설계에 활용하는 길을 열었다. 이 연구를 근거로 선박유체역학 이론을 구상선수 선형 설계에 적용하여 조파저항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선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뒤늦게 조선공학 교육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1953년까지 졸업생 일부가 대한조선공사에서 선박을 수리하며 조선 실무를 경험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모두가 바라던 남북통일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으며 대한조선학회를 창립하며 졸업생 모두가 꿈꾸던 조함 기술 개발은 시작하지 못하였다. 휴전으로 대한조선공사의 업무가 줄어들자 1회 졸업생 김정훈이 9월에 대한조선공사를 사임하고 조선공학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다. 다음 해에는 황종흘이 전임강사 발령을 받으므로 조선공학과 교수는 3명이 되었다. 그리고 시차를 두고 조규종은 인하대학 창립에 참여하였고 조필제는 삼성 계열의 회사로 전직하여 대한조선 공사에 취업하였던 조선과 1회 졸업생 모두가 조선 현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시행한 Minnesota 계획으로 김재근 교수, 김정훈 교수 그리고 황종흘 교수가 차례로 MIT에서 조선공학 교육을 받았다. 1957년에는 임상전(48학번)이 대한조선공사를 사임하고 모교의 시간강사로 출강하다 MIT에서 교육받았는데 같은 시기에 대한조선공사에서 근무하던 김극천(49학번)도 대한조선공사의 기술자로 MIT에서 연수 교육을 받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던 1959년에는 임상전이 MIT에서 귀국하여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으며 뒤를 이어 1961년 여름에 김극천이 대한조선공사를 사임하고 전임강사로 발령받아 조선공학과 교수 5명 모두가 풍부한 현장 경험이 있고 MIT에서 조선학 교육을 받은 상태가 되었다. 1962년에는 MIT의 실험실을 본받은 현대적 실험 실습 장비를 ICA 원조 자금으로 도입하였으며 그중 선형시험수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International Towing Tank Conference :ITTC의 회원 기관이 되었다.

선박의 우수성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수면 위쪽이 아니라 수면 아래 잠기는 부분의 형상이 결정하며 선박 설계자들은 오래도록 과학적 논리보다는 설계자 개인의 경험과 직관으로 형상을 결정하였었다. 우수한 선형일수록 물의 흐름에 순응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나타나므로 조선학은 공학보다는 사실상 예술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하였으며 많은 조선 기술자가 engineer가 아니라 architect라 불린다고 자부하였다. 선박 설계에서 핵심인 소요 동력 추정조차도 1872년 Froude가 모형실험법을 제안함으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Kelvin, Michell 등의 학자가 저항과 관련된 일부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였으나 전체 문제를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Froude의 실험적 저항 추정법이 세계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으나 조선학은 경험과 직관을 존중하는 보수적인 성격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 NBC가 주도한 선박의 대형화는 1956년에는 85,000톤 그리고 1959년에는 106,000톤 상선을 건조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 자연스럽게 일본은 조선 산업과 경제가 되살아나고 세계 조선 산업을 이끌게 되었으나 서구의 조선소 대부분은 경쟁력을 잃고 문을 닫아야 하였다. 선박의 급격한 대형화는 오래도록 선박의 동력 추정에 사용하던 Froude의 저항 추정법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게 하였다. 이에 ITTC는 Froude의 저항 추정법을 차원 해석법으로 재해석하여 저항 추정법을 1957년 2차원 해석법으로 발전시켰다. 또 Inui 교수가 제안한 선박 유체역학을 활용한 구상선수 선형 설계는 모든 선박의 조파저항 감축에 도움이 되어 일본은 실험해석법뿐 아니라 선박 유체역학을 활용한 선박 설계에서도 앞서 있었다.

조선 산업을 일으킨 진수회 원로 회원들(1946학번~1960년대 학번 중심)
사진3 조선 산업을 일으킨 진수회 원로 회원들(1946학번~1960년대 학번 중심)
조선 산업 세계의 선두를 지킨 진수회원들(1970년대 학번)
사진4 조선 산업 세계의 선두를 지킨 진수회원들(1970년대 학번)

되돌아보면 뒤늦게 출발한 조선공학과는 1962년에 비로소 정상적인 교육 환경을 구축하였으며 대한조선학회의 건의를 받아 군사혁명 정부는 조선 산업 육성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조선 산업이 세계 선두에 나섰으나 선진국으로부터 견제 대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숨겨진 일은 MIT에 유학한 고영회(48학번)가 1958년 NBC에 취업하여 일본에서 근무하며 일본의 변화를 이끌었고, 김훈철(52학번)과 이정묵(54학번)은 미국 해군 주도로 함정 설계에서 선박 유체역학 실용화 사업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사정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던 신동식(51학번)과 상공부의 김철수(48학번), 권광원(49학번), 한명수(53학번), 구자영(54학번) 등이 조선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강력히 추진토록 하여 조선 산업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1964년 정부의 공과대학 집중 지원 연구비는 대한조선학회가 회지를 발간하며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시작한 상공부의 표준형선 설계 사업은 조선 산업이 설계 기술을 자립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 한일협정으로 확보한 청구권자금은 어선 건조 자금으로 투입되어 조선 산업이 태동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1968년에는 조선항공학과에서 조선공학과를 분리하여 하나의 학과로 다시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정부의 조선 산업 지원에 힘입어 대만에 원양 참치 어선 20척을 수출하였다. 또 여러 해 정부 예산을 적립하여 1972년 배수량 18,000톤인 Pan Korea 호를 순수한 국내 기술로 설계하여 건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조선 기술을 인정받아 미국 걸프사의 유조선 6척을 수주하였으며 1974년에는 30,000톤급 유조선을 건조하기에 이르렀다. 또 같은 해에 현대중공업은 266,000톤급 초대형 유조선 Atlantic Baron을 건조 인도하여 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의 조선국이 되었다.

정부는 1974년 조선공학과에 경제개발 특별예산을 집중 지원하였으며 1975년 관악캠퍼스에 선형시험수조를 비롯한 연구 시설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학위 제도가 변화하던 1976년까지 모든 교수가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정부는 조선 기술자와 연구자를 확보하려 국비 유학 제도와 방산 병역 특례 제도를 시행하였다. 1977년 우리나라는 신조선 건조 실적이 64만3,000톤에 이르러 세계 주요 조선국이 되었으며 서방의 견제에 시달리던 일본은 우리나라와 협력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일본조선학회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선박설계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의 2차 회의를 1983년 한일 공동 개최하였는데 이때 우리나라는 세계 수주량의 19.2%를 점유하였다.

조선해양공학과는 1983년 관악캠퍼스에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고 세계 22개 연구기관이 같은 선형의 모형을 시험하고 결과를 비교하는 ITTC 국제 공동연구에 따른 모형시험 결과를 1987년 Kobe ITTC에 보고하였다. 서울대학의 새로운 수조의 실험 결과가 오랜 경험을 가진 연구기관이 수행한 연구 결과의 평균값과 일치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ITTC는 같은 선형의 실험 결과가 같아지도록 표준 시험 방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95년에 한국의 조선 산업은 세계 2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대한조선학회가 제6차 PRADS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는데 세계적 선박 연구기관인 Netherland MARIN의 소장이 회의의 Secretary를 맡기도 하였다. 회의에는 25개국에서 335명이 참석하였으며 참석자들은 우리나라 조선 산업의 비약적 발전과 조선학 관련 학문적 업적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조선 산업의 차세대 리더인 진수회원들(1980~1990년대 학번 중심)
사진5 조선 산업의 차세대 리더인 진수회원들(1980~1990년대 학번 중심)
조선 산업을 지킬 진수회원들(2000년대 학번 중심)
사진6 조선 산업을 지킬 진수회원들(2000년대 학번 중심)

1999년에는 22차 ITTC를 유치 개최하였으며 ITTC의 16개 기술 분과 위원회 중 12개 기술 분과에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위원을 배출함으로 우리나라는 선박 유체역학 분야 연구 활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으며 2000년에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되었다. 이는 조선학회 활동을 55년이나 뒤늦게 시작한 우리나라가 조선공학 교육과정을 설립하고 54년 만에 이룬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세계 최하위권에서 출발하여 세계 12위에 이른 놀라운 업적이 가능하도록 진수회원들이 힘을 보탠 것도 자랑스럽다. 진수회를 구성하고 50년이 지난 시점에 조선 산업은 우리나라의 기간 산업이 되었으며 학문과 기술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존중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조차도 우리나라 함정 건조 기술의 도움 없이는 전시에 해상 세력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1950년에 조선공학과를 졸업한 첫 번째 진수회원으로부터 최근에 졸업한 진수회원에 이르기까지 진수회원 모두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음을 귀가하는 전철에서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음을 밝히며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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