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칼럼

명예교수 칼럼

공릉동 실험실 회상을 멈추게 하는 빵

기고자.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단기 4292년 봄, 나는 공과대학 조선항공학과에 입학하여 201356이라는 학번을 받았다. 첫 숫자 2는 입학 연도를 뜻하고 다음 두 자리 숫자 01은 가나다순으로 가장 앞선 공과대학을 나타내며 이어지는 3자리 숫자는 학과 가나다순으로 합격자 모두에게 부여된 일련번호였다. 입학 후 1년간 고등학교 교육과 별로 다르지 않은 교양 교육을 받으며 선박과 직접 관련된 전공 과목 수강을 갈망하였다. 4293년 봄학기에 수강 신청한 선박제도(I)이 선박과 직접 관련이 있는 최초의 전공 과목이었다. 선박 관련 지식이 전혀 없는 학생들이 학교 도서실에서 선박 관련 잡지에 실린 흥미로운 선박의 일반 배치도를 조사하여 제도 용지 규격에 맞게 확대하여 제출하는 과목이었다. 공릉동 캠퍼스는 아침저녁 운행하는 통학 열차를 이용하여야 하였으므로 시내에서 일어나는 4·19 학생운동에 참석하지 않고 제도 교실에 모이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학생운동의 여파로 휴강이 잦았고 도면을 작성하며 교실에서 교수와 대화로 선박을 이해하도록 하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1964년 조선과 학생들이 수중익선에 승선하여 찍은 기념사진
1964년 조선과 학생들이 수중익선에 승선하여 찍은 기념사진

콘센트로 지어진 학과의 모형 공작실 앞에는 소형 요트가 있었다. 이는 선배들이 ICA 원조 자금으로 도입한 실험 장비를 포장했던 목재를 재활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또 해당 요트는 한강에서 개최한 전국 대학생 요트 경기에 출전하였으나 배가 무거워 성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의 조선학 지식은 잡지에 소개된 화물선의 일반 배치도를 옮겨 그리는 것일 뿐이었으나 선배들처럼 배를 지어보고 싶었다. 마침 김정훈 교수는 육군 특무부대의 지원으로 간첩선 나포에 쓰일 고속 수중익선을 개발하고 있었다. 작업을 도울 학생이 필요하다는 말에 강의 시간이 빌 때마다 모형 공작실 앞에서 선배들이 작업한 선박의 외판 사이에 방수재를 끼워넣는 일을 하였다. 간단한 일이었으나 마음으로는 일류 조선 기술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4294년 봄에 군에 입대하며 배 만드는 일은 그만두었고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첫 번째 휴가를 나와 수중익선이 진수될 때 크레인 사고로 손상되어 정상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 몹시 안타까웠다.

단기 4295년 새해에 들며 나는 단기 복무 혜택이 있는 독자여서 일찍 제대하였다. 바로 이해부터 연호가 서기 1962년으로 바뀌었기에 나의 학번도 4292년 입학한 92학번이 아니라 1959년 입학인 59학번이 되었다. 복학하였을 때는 군사정부의 조직 개편 영향으로 수중익선 개발 연구비 지급이 중단되었고 손상된 수중익선은 5호관 선형시험수조 건물 옆 노천에 보관되어 있었다. 수중익선 과제 중단으로 김정훈 교수는 새롭게 파도 중에서 선박의 운동을 해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김 교수가 문제를 32차 연립방정식으로 정식화한 적분 방정식을 풀어 해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하였음을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나는 문제의 내용이나 풀이 과정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한 상태였지만 통학 열차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계산을 돕곤 하였다. 계산 내용도 모르며 6자리 유효 숫자를 수동계산기로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과학자가 된 듯 자랑스러웠다. 지금이라면 간단한 문제이지만 한 달의 계산으로도 32×32 행렬식의 올바른 해를 구하지 못하였고 김 교수는 과제를 중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김정훈 교수는 MIT의 Abkowitz 교수가 설계한 중력식 선형시험수조를 공릉 캠퍼스에 건설하며 감리를 맡았다. 건축 공사에 이어 전자공학과의 최계근 교수와 함께 계측 시스템을 구축하고 계측 장비들을 교정하여 1962년 6월 16일 선형시험수조를 준공하였다. 마침 이 시기에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연구비 지원으로 한국 특유의 조기잡이 어선인 권현망 어선을 연구하던 김재근 교수가 어선의 저항시험을 하였다. 소형 어선의 저항시험은 새로 지은 공릉동 선형시험수조의 첫 번째 모형 시험이었으며 결과를 정리하여 인도-태평양 어선회의에서 발표하였는데 이는 조선 분야 최초의 국제회의 발표 논문이 되었다. 시험수조 건설의 실질적 공로로 선형시험수조의 책임자가 되었던 김정훈 교수는 Abkowitz 교수의 도움을 받아 선형시험수조에 대해 ITTC 회원 기관 가입을 신청하였다. 선형시험수조는 학과의 실험실이었으나 국제기구 가입이 승인되었으며 이때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선형시험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혁명정부는 산림 녹화를 계획하고 석탄 중심 연료 정책을 지원하려 석탄 해상운송용 4000톤급 운반선을 설계하며 김정훈 교수에게 수조 실험을 위임하였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이미 수중익선 건조를 도운 일이 있었기에 나에게 실험에 사용할 모형선 제작 참여 기회가 주어졌다. 모형 제작 정밀도가 걱정스러웠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김정훈 교수가 확인하고 모형이 저항시험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실험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실험을 준비하며 뜻하지 않게 모형선 예인 장치의 속도 검출 신호가 나오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였다. 모형선 속도 측정 장치는 실험실의 양단에 설치한 바퀴의 홈에 예인줄을 걸어주고 바퀴가 회전할 때 모형선에 붙은 브래킷과 연결된 예인줄이 모형을 예인하는 실험 장치였다. 한쪽 바퀴에 감긴 줄에 추를 달아주면 추가 중력 작용으로 우물 속으로 풀려 내려갈 때 모형선이 당겨진다. 이때 모형선의 저항이 추가 발생하는 예인력과 평형을 이루는 모형선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바퀴 둘레에 방사상으로 2000개의 가는 선을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고 일정한 위치를 지나는 선의 개수를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측정하여 바퀴의 회전 속도를 환산했다. 한쪽에 고정 배치한 진공관에서 발생한 평행 광선이 방사상으로 배치한 가는 선의 그림자를 만드는 곳에 광전관의 초점이 놓이도록 하면 바퀴를 돌며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전기신호가 나타나고 한 바퀴를 돌리면 2000개의 신호가 나타난다. 그리고 일정 시간 간격에 지나는 그림자의 숫자와 같은 전기신호를 세어 모형선의 속도로 환산하는 계측 장비였다. 고장 원인은 수중익선 모형선을 고속으로 예인하다 예인줄이 끊어지며 진공관과 광전관의 위치가 흩어져 정상적인 신호가 나오지 않는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정훈 교수는 토요일 오전 중 조정 작업을 마치기로 계획하였기에 나는 오후 불암산 트레킹을 제안한 친구에게 실험실로 찾아오라 하였다.

김정훈 교수의 논문에 실린 저항시험장치 개념도
김정훈 교수의 논문에 실린 저항시험장치 개념도

지금은 같은 기능을 가지는 로터리 엔코더가 하나의 부품으로 공급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진공관과 광전관의 위치를 맞추는 일이 매우 섬세한 작업이었다. 곧 끝나리라 기대한 조정 작업이 오후까지 이어졌으며 기대하던 불암산 트레킹은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김정훈 교수가 작은 공구로 미세 조정을 하면 친구와 나는 Event Per Unit Time meter : EPUT meter로 출력 신호를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하였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지만 쓸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결과가 얻어졌을 때는 허기를 느낄 만큼 늦어진 시간이었다. 학교 앞 가게에 나가 김정훈 교수가 주신 돈으로 단팥빵 2개를 살 수 있었다. 빵 하나를 더 사려 주머니의 돈을 확인하니 집에 갈 버스비를 남기고 값싼 찐빵 하나를 더 살 수 있었다. 실험실에서 김정훈 교수가 아무 말씀 없이 마지막으로 산 찐빵을 집으셨는데 공릉동 실험실을 회상할 때면 항상 마지막 빵에서 시간이 멈추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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