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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 생활과 기본 조선학의 인연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나는 1959년 조선항공학과에 입학하였는데 2학년이 되어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 장래를 위하여 선박과 항공기 관련 기술 인력을 양성하려고 공과대학에 학과를 신설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학과 교수 모두가 미네소타 계획으로 MIT에서 수학하였으며 MIT 실험실 장비와 같은 장비가 ICA 원조로 도입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60년 419 이후 여름에 들어서며 공릉 캠퍼스는 평온하였으며 나는 2학년 학생으로 김정훈 교수가 개발하여 건조하던 수중익선 건조 작업에 단순 작업원이었을 뿐이지만 때로는 스스로 조선 기술자라 착각하였다. 전공 교육이 역학 과목 위주로 시작되었으며 선박과 직접 관련된 전공과목은 선박제도 뿐이었다. 영국에서 조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정해룡 선생이 교수 발령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선박제도를 담당하였으며 조선공학과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선박의 도면을 놓고 구조와 기능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단기 복무 혜택을 받는 독자여서 3학년이 되던 1961년 봄에 입대하였으며 1962년 1월 제대하고 봄학기에 복학하였다. 짧은 군 복무기간이었으나 516 군사혁명이 있었으며 이 시기에 학생들은 학문적 발전과 교육 내용 변화에 소극적이던 교수를 배척하는 정풍운동을 일으켜 여러 교수가 대학을 떠나는 진통을 겪으며 대학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신설 학과였던 조선공학과는 모든 교수가 해외에서 수학한 젊은 교수들이었으므로 학과는 정풍운동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오히려 학과 교수들이 김재근 교수를 대한조선학회 회장으로 추대하고 학회 활성화에 나섰으며 이때 학회가 건의한 조선산업 육성 정책을 군사정부가 받아들인 것이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복학생의 눈에 비친 조선항공학과의 큰 변화는 선박 관련 과목을 맡았던 정해룡 선생이 병역 미필이어서 교수 발령을 받지 못하고 육군에 입대하여 사병으로 복무하며 조선공사 설계 과장이 된 것이었다.

1962년 여름 중력식 선형시험수조가 완공되었고 나는 실험용 선박 모형제작을 돕고 있었으나 선박 설계자가 된 상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가을학기에 본격적으로 조선공학 전공과목에 접하였으며 교육 내용이 미국 조선학회가 편찬한 기본조선학(Principles of Naval Architecture:PNA)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항공학과는 신설 학과였으며 국내에는 조선학을 전공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조선과의 교수와 학생은 1939년 미국조선학회가 발간한 PNA 초판본을 함께 읽으며 세미나로 조선학에 입문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PNA는 초판 발간 후 23년이 지나도록 큰 수정 없이 거듭 인쇄되고 있었는데 1963년 4학년 봄학기가 끝나갈 무렵 공학 도서를 취급하던 서점에서 1962년에 인쇄한 PNA를 발견하였다. 어렵게 책값을 마련하던 일과 조선학의 바이블을 손에 넣고 흥분하던 일 그리고 손상되지 않도록 제도지로 곱게 싸서 소중히 가지고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1963년 가을 김정훈 교수가 독일로 출국하였고 나는 1964년 대학원에 입학하여 임상전 교수 연구실에서 선체구조를 전공하게 되었다. 마침 1963년 6월부터 문교부가 학술연구조성비를 지급하였으며 박 대통령이 공과대학에 연구비를 집중지원 하였으므로 학과 교수들은 연구 결과를 발표할 대한조선학회지 창간을 계획하였다. 1964년 학교는 한일 협정 반대로 혼란한 시기였으나 나는 대학원 학생이었으므로 대한조선학회에 입회하였고 항종흘 교수와 임상전 교수의 학회지 창간을 돕는 간사로 선임되었다. 1965년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대한조선학회가 표준형선을 설계하여 중소 조선소에 도움이 될 선박 설계도서를 공급하도록 지원하였다. 대학원에 입학하여 새롭게 선체구조를 공부하는 한편으로 학회지 창간업무에 상당 시간을 써야 하였다. 학교 기숙사에서 저녁을 마치면 논문실험에 집중하여야 하였으므로 어렵게 손에 넣은 PNA는 읽지 못하고 서가에 꽂아 두게 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며 조선산업에 참여하려던 기업에 취업하여 기계설계를 담당하였으나 회사가 철강산업에 투자를 결정하여 회사를 그만두고 1968년 5월 임상전 교수 연구실로 돌아왔다. 학과는 학회의 표준형선 설계사업, 수산청의 어선 개량 사업, 국방부의 대북 상륙용 보트 개발사업 등으로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김극천 교수가 수산청에 파견 상태였으므로 학과 교수 3분이 업무를 분담하여야 하였으며 임상전 교수는 미국조선학회가 1967년 발간한 PNA 개정판을 문교부의 과학기술 도서 번역 사업으로 번역하여야만 하였다. 과학기술 서적 번역 사업으로 PNA 번역을 문교부에 신청할 때까지는 학과 모든 교수가 함께하려 하였으나 업무 폭주로 부득이 임상전 교수 홀로 담당하여야만 하였다. 임상전 교수는 외부 전문가와 일부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였는데 내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번역이 최종 단계에 있었다.

임상전 교수는 번역에 앞서 미국조선학회에 번역과 강의교재로 복사 사용을 승인 요청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조선산업과 조선학 교육을 갓 시작하였을 뿐이어서 미국조선학회는 흔쾌히 요청을 승인하였다. 당시 대한조선학회는 회원 수가 200명에 못 미치는 신생학회로 재정이 어려웠으나 어렵게 비용을 마련하여 PNA 개정판을 복사하여 대학에 보급하였다. 조선학 교육에 도움이 되려 하였을 뿐인데 뜻밖에도 PNA 복사 판매는 학회 재정에 도움이 되었다. 나도 학회가 복사한 PNA를 읽게 되어 졸업 전 어렵게 손에 넣었던 PNA는 서가에 꽂힌 고전이 되어버렸다. 1968년 여름에 임상전 교수는 보고 시한에 쫓기며 번역 원고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문교부에 보고하였다. 임상전 교수는 제출한 원고를 행정 처리가 끝난 후 올바른 원고로 바꾸려 하였으나 문교부는 출판 일정이 정해있어서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체결하고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었다.
임상전 교수는 출판사와 협의하여 원고를 되돌려 받아 간단히 수정 보완하려 하였는데 학생들이 번역한 부분에는 생각지 못한 수많은 오류가 발견되었다. 예컨대 한 학생이 시간에 쫓겨 번역 일부를 사귀던 영문과 여학생과 나누어 번역하였는데 Naval Architecture를 해군 건축으로 그리고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를 마사츄셑 기술 협회라 번역한 것이 발견되었다. 뜻밖의 번역을 볼 때마다 임상전 교수는 웃어넘겼으나 정작 괴로운 일은 제출한 원고의 모든 페이지에 접수인과 일련번호가 기록되어 있고 원고지 교체를 허용하지 않아 학생들이 작성한 원고를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작성해야 하는 일이었다. 많은 부분 원고가 연필로 작성되어 있어서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었으나 볼펜으로 작성한 원고는 타자 지우개로 지우다 뚫어지면 뒷면에 종이를 붙이고 원고를 수정하는 작업이었는데 임상전 교수는 매일 저녁 늦도록 연구실에 남아 원고를 수정하였다.

1968년 독일 정부는 서울대 조교를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유학 기간 중 조교 신분 유지를 요청하여 조교 발령을 기대하며 기본조선학 번역에 참여하였던 두 분 선배가 조교 발령을 포기하였다. 나는 전후 사정을 살피지도 않고 꾸준히 실험실 업무와 학회지 창간업무에 몰두하였는데 오히려 기회가 돌아와 11월 조교 발령을 받았다. 당시 유급조교는 연구 경력과 업적이 자격요건을 충족하면 전임강사로 임용되는 길이 열려있어서 나는 논문 준비에 몰두하였다. 1969년 봄학기에 임상전 교수가 번역한 기본조선학이 발간되었으며 대한조선학회는 PNA 복사본 공급을 중단하였다. 이 시기 황종흘 교수가 콜롬보 계획으로 1년간 동경대학에 체류하게 되었으며 김극천 교수의 수산청 파견과 규슈대학 연수 그리고 임상전 교수의 MIT 연수 등으로 나는 뜻하지 않게 차례로 여러 과목 강의를 한시적으로 맡게 되었으며 기본조선학 번역판은 나의 조선학 지식을 넓혀주는 바이블 역할을 하였다.

임상전 교수가 문교부의 과학기술 도서 번역사업으로 1969년 ~1971년 사이에 출간한 [기본조선학]
되돌아보면 실질적으로 조선공학 교육이 시작되던 1962년 나는 조선공학 전공과목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조선공학 교육의 핵심은 미국조선학회가 1939년 발간한 PNA 초판의 내용이었는데 나는 4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1962년 인쇄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선산업 육성 정책을 펼치던 1968년 조선공학과가 분리 독립하였으며 나는 그해 늦가을 유급조교가 되었다. 1970년 전임강사로 발령받으며 임상전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기본조선학은 나와 학생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며 1983년에는 선박설계에 관한 국제회의를 주최하여 국제사회에 주목받았으며 나는 관악 캠퍼스에 선형시험 수조를 건설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수조에서 국내 여러 기관과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결과를 1987년 Kobe ITTC(국제선형시험수조 회의)에 보고하여 국제사회에서 주목받았다.

미국조선학회가 PNA 3차 개정판을 발간한 1988년 나는 선박의 저항추진 과목과 선형시험법 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다. PNA 개정판의 강의와 직접 관련된 부분을 꾸준히 번역하였으며 상당 부분이 진행되었을 때 임상전 교수에 번역을 제안하였다. 임상전 교수는 이제 한국은 세계 굴지의 조선국이 되었고 학생들은 국제항로에 나서는 선박을 설계하게 될 것이니 PNA를 직접 읽도록 하는 것이 학생들의 장차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세계 선두가 되었으며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선박일수록 선주들은 한국을 찾고 있다. 나는 2006년 봄에 퇴임하였으나 선형시험수조 수조시험과 관련하여 중소기업이 요청하는 크고 작은 기술적 자문에 응하고 있다. 새해부터는 명예교수실에서 2008년 발간한 PNA 네 번째 개정판을 살피며 2028년까지 기본조선학의 새로운 변화를 가늠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