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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여행과 방콕의 악어 핸드백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1978년 정초에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건설사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해외의 건설사업에도 폭넓게 진출하고 있었다. 중동전쟁과 석유파동으로 중동지역에 일어난 대규모 건설 열풍으로 현대건설은 세계 굴지의 업체들과 경쟁하여 초대형 건설사업인 주베일 산업항 건설사업을 수주하였다. 정부는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국민 기업으로 상장할 것과 새로이 확보되는 자금으로 산업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을 요구하였다. 현대그룹은 이미 자동차와 조선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산 재단의 설립, 아산병원의 건설 그리고 전국 대학의 지원 등으로 기업의 소득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공개를 피하려 하였다.

나는 젊은 나이의 조교수였으나 학과의 관악 캠퍼스 이전 준비업무를 담당하여야 하였으며 1976년 12월부터 3개월간은 콜롬보 계획으로 일본 히로시마대학에서 연수를 받기도 하였다. 1977년부터는 관악산에 설치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 무상원조자금(Japanese Government Grant:JGG)으로 사들인 각종 실험 실습 장비들이 차례로 수입되었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현대그룹은 그룹 임직원의 출신학교를 조사하고 이를 계량화하여 전국 대학의 학과가 그룹발전에 기여 정도를 평가하고 그에 따라 대학과 학과에 연구기금을 제공했다. 이후 1978년에는 정초에 학과장들을 중동지역의 현대건설 공사현장으로 초청하였다.

나는 학과장이기는 하였으나 현대 그룹발전에 도움이 된 학과에 대한 사은의 초청이었으므로 실제로 도움을 주신 원로 교수가 초청에 응하여야 한다 생각하여 중동여행을 고사하였다. 나와 같이 생각한 몇몇 학과장들이 있었던 탓에 참석자의 확정이 늦어져 현대그룹은 초청대상이 학과장임을 분명히 하고 초청자를 바꿀 수 없다고 단호한 결정을 통보하였다. 뒤늦게 초청에 응하게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여행 관련 행정업무를 현대중공업에서 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인적사항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에도 촉박하였다. 출국을 앞두고 여권을 발급받았으나 환전을 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300$ 남짓한 현금을 용돈 삼아 여행하게 되었다.

현대그룹은 중동지역의 공사를 계기로 대한항공의 항공기를 전세 내어 유럽지역까지 독자 전세항로를 개설하고 있었다. 120명 정도의 중동방문 교수단이 탑승한 전세기는 타이베이를 거쳐 홍콩, 방콕에 기항하였는데 기내 청소시간을 보내라며 일행을 보세구역으로 안내하였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는 추운 날씨여서 겨울옷을 차려입었는데 공항에서 보세구역으로 옮겨갈 때는 높은 습도에 한여름과 같은 열기에 숨이 막히는 듯하였다. 보세구역은 냉방이 잘되어 있어 일행 대부분이 더위를 피하며 귀국길에 살 기념품을 눈여겨 살피었다. 비행기에 다시 탑승하였을 때 일행 중 한 분이 고급스럽게 보이는 악어가죽으로 만든 지갑을 자랑하였다. 보세구역이지만 흥정하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어렵게 흥정하여 정가보다 30% 이상 싸게 샀다고 자랑하였다.
방콕을 떠난 후에는 인도를 횡단하여 바로 바레인에 도착하였는데 입국절차를 밟고 숙소에 도착하여 일정을 안내받았다. 방콕에서 습기를 머금은 열기를 받았을 때는 앞으로 방문할 사우디의 공사현장을 영화에서 보던 사막의 건조하고 따가운 열기로 연상하며 몹시 두려워 했다. 하지만 바레인에서는 뜻하지 않게 여행 중 필요한데 준비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며 점퍼를 나누어 주었다. 생각과 달리 낮에는 따갑더라도 해가 지면 밤에는 한기를 느낄 만큼 기온이 급히 떨어져서 방한 점퍼를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어느 날 저녁 중동여행을 나서는 나에게 사막의 모래를 선물로 가져오라는 원로 교수의 말씀이 생각나 숙소 뒤에서 땅콩을 담았던 용기에 모래를 담았다. 이를 본 현지 기술자는 주 야간의 큰 일교차가 풍화 작용을 촉진하여 사막의 모래는 입자 크기가 두드러지게 작아진다고 했다. 실제로 모래뿐인 사막에서 건설 공사를 하면 모래의 굵기와 강도가 적합한 모래를 찾기 어렵다며 한강의 모래를 가져오면 큰돈이 되리라던 사우디의 공사현장 기술자의 말에 봉이 김선달처럼 모래를 가져갈 방법을 궁리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바레인에서는 현지 시장에 잠시 들릴 기회가 생겨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에 선물할 미니카와 레고 블록을 산 후 달러로 값을 내고 디나르 화폐로 거스름을 받았다. 이후 중동의 동전은 여행 기념품이 될듯하여 사우디와 쿠웨이트 현지에서 담배를 사서 피며 거스름은 사우디의 리얄 그리고 쿠웨이트의 디나르 받았으며 동전은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다. 특히 쿠웨이트의 디나르는 달러화보다 높은 평가의 화폐이어서 충분히 기념품이 될 만하였다. 2주 정도의 일정을 마치는 동안 단체 일정을 철저히 따랐으므로 비용이 필요 없었으나 귀국을 앞두었을 때 200$ 미만이 남아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120명 남짓한 규모의 인원이었는데 함께 귀국길에 오른 인원은 80명이 되지 않았다. 건설현장의 기술적 문제를 자문받으려 어렵게 찾은 일부 원로교수에게 공식 사우디 체류 기간연장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몇몇 원로 교수에게는 사은의 뜻을 담아 귀국길에 유럽여행 또는 미국으로 돌아서 귀국하는 별도의 추가 일정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기계공학과 학과장이 가장 젊은 교수였으며 학과의 이전준비와 관련한 업무들이 기다리고 있어 일정에 따라 귀국길에 올랐다. 리야드 공항을 떠나 인도양을 지날 때쯤 연세대 원로교수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다음 기항지인 방콕에서 일을 보고 하루 늦게 홍콩 일정에 합류하겠다며 본인의 짐을 호텔까지 옮겨달라 하였다. 방콕에서 일시단기 방문 허가를 받아 일을 보려던 교수는 입국허가를 절차를 밟았으며 나머지 일행은 보세구역에서 다시 시간을 보냈다. 항공기에 다시 탑승하였을 때 인하대 원로교수 한 분은 사모님께 선물할 악어 핸드백을 샀는데 수 일전 싸게 샀다고 자랑하던 핸드백 안의 지갑을 제외하는 조건이었으나 훨씬 비싼 핸드백을 지갑 값으로 산 셈이 되었다며 자랑하였다.

탑승이 늦어진 일행을 기다리며 조금씩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마지막으로 탑승한 교수 한 분이 악어 핸드백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세구역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흥정하다 포기하고 탑승하려 하자 지갑이 포함된 핸드백을 들고 점원이 쫓아와 물건을 샀으나 항공기 탑승이 늦어졌다며 사과하였다. 비록 시차는 있으나 일행 세 사람이 같은 상점에서 같은 값에 산 선물 세 가지의 품질은 어떠하였을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물을 받는 세 사람은 선물을 준비하는 마음을 함께 받았을 것이므로 모두가 소중한 선물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