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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에서 바라본 동해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공릉동 캠퍼스에서 조선공학과 학과장 업무를 맡고 있던 1978년 가을에는 학생지도 문제가 캠퍼스 이전 준비업무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끊이지 않아 학교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심지어 여름방학에는 문제 학생을 지도하기 위하여 지방에 있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여 학부모를 만나야만 하기도 하였다. 학기 말에는 제식훈련 분열식으로 교육을 마치는 교련 시간에 학생대열 후미에 임석하기도 하였다. 또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군장을 갖추고 행군 훈련에 나서는 학생대열을 따라 공릉동 캠퍼스에서 불암사까지 상당 거리를 왕복하여야만 하였다.

대학생 간부들의 입영 군사훈련 대한 뉴스 1041 (1975-07-26)


강의 시간에 수직 하중을 받는 기둥의 붕괴 문제를 다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침 중간시험문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통근버스 창밖으로 청량리 대왕 코너 앞 지하철 공사장에 발생한 붕괴 사건을 보고, 붕괴를 일으킨 흙압력을 추정하라는 문제를 내었다. 흙막이 벽을 버텨주는 H 빔의 치수를 주었으므로 하중 방향만 바꾸어 생각하면 교과서의 문제와 같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바로 전해에는 성냥개비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눌러 부러트리는데 필요한 손가락 힘을 구하라는 문제를 낸 일이 있었기에 조금만 응용하면 당연히 풀 수 있어야 했다.

정답자가 없어 실망하여 교실에서 학생들 머릿속에는 응용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꾸짖은 일이 있었다. 꾸중을 들었던 몇몇 학생이 하교 후 어울려 주점에서 시험성적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성적이 나쁘니 골빈당을 만들자 하였다. 골빈당의 당직을 성적의 역순으로 정하자 하였으며 당헌에는 지도교수 의견을 넣어야 한다며 서로 당직을 예상하며 웃고 떠든 일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 드나들던 청량리 경찰서 형사가 학생들이 활빈당을 민다고 대화를 잘못 전하여 듣고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과장이며 지도교수였던 나의 연구실까지 찾아와 활빈당을 캐어물은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당시는 유신체제 말기로 학생 동태를 민감하게 관찰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졸업반 학생들이 수학여행 계획을 들고 찾아왔다. 설악산 여행 계획이었는데 당시 학교의 방침은 반드시 전공과 관련 있는 산업현장을 거치도록 하고 있어서 승인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학생들은 설악산 여행을 간절하게 원하여 여러 차례 계획을 들고 찾아왔기에 지도교수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설악산 여행을 허락하였다. 학생들은 당시 공대 기숙사 사감이었던 이기표 교수의 기숙사 일정이 비는 기간에 맞추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학교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서류상으로는 산업현장 견학한다며 거짓 일정을 보고하였다.

학교의 규정을 어기고 학생들의 뜻을 받아주었는데 학생들이 출발한 아침에 기숙사 식당 벽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벽서가 발견되어 학장주재로 긴급 사감 회의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학생을 인솔하여 수학여행을 떠난 이기표 교수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학장은 학과장인 나를 호출하였다. 사감이지만 비번이어서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인솔하도록 학과에서 결정하였다 하였다. 학장은 학교에 제출한 여행 일정을 살피고 일행이 조선소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전화 연락하여 사감을 즉시 귀환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강경한 학장 명을 더는 거스를 수 없어 점심시간에 긴급학과 교수회의를 개최하였다.

내심 원로 교수님들이 학장을 찾아뵙고 양해를 구해주시리라 지레짐작하였으나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학과의 업무는 원로교수들이 처리할 터이니 학과장이 설악산으로 학생을 찾아 나서서 사감이 다음날까지는 돌아올 수 있도록 하라는 결정이었다. 수학여행의 구체적 일정은 학생대표와 인솔 교수가 결정하도록 하였기에 현지에서 일행을 만나는 것이 시급하였다. 황종흘 교수께서 여비를 마련해주셨고 임상전 교수께서 학과장 업무를 맡아주시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오후 강의는 휴강하고 평상 출근복 차림으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사고 나서 갑작스럽게 출장하게 되었다고 집에 전화 연락하였다.

울진 삼척 사태 이후 시작한 교련교육은 초기로부터 반대 운동에 휩싸여 휴강이 잦았다.


학과 회의 후 서둘러 출발하였으나 고속버스가 터미널에서 떠날 때는 오후 15:00쯤이었다 기억한다. 버스가 떠나 얼마 지나서 비로소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갈아입을 내의도 없는 상태임을 깨달았으며 가는 곳은 막연히 설악산이어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매우 걱정되었다. 학생들이 출발 직전까지 일정을 확정하지 못하여 학교의 설악산 수련원 사용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릉에 도착하였을 때는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수소문 끝에 학생들이 찬거리를 사서 들고 설악동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히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전세하여 설악동에 이르러 수소문 끝에 학교 수련원으로 학생들이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수련원 이용자가 없었으나 시설사용 허가 없이 찾아온 학생들에 시설사용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행한 지도교수가 정식으로 시설사용 허가를 받아 보완하는 조건으로 관리인을 설득하여 시설을 사용하게 되었다. 자연히 저녁 준비가 늦어져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에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과장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학생들의 술자리에 나타난 격이 되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거북하여 술자리가 생각나 설악산까지 학생들을 찾아왔다 하였다.

말 한마디 잘못이 화근이 되어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고 피하려 하였으나 술을 잘한다는 학생과 마주 안자 대작하게 되었다. 네 번째 학생까지 차례로 내 앞자리에 술잔을 비우다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나는 주선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내가 술꾼 넷을 물리쳤다며 오관참장(五關斬將)의 관우(關羽)를 예우하듯 나를 어깨 위로 들어 메고 방안을 돌았다. 나는 늘어진 전구를 피하려 자세를 낮추어야만 하였는데 아마도 밖에서 보았다면 주선이 아니라 통나무로 보였을 것이다. 요즘도 체력 훈련을 받는 병사들이 대오를 짜 통나무를 들어 올리는 영상을 볼 때면 1978년 가을 설악산을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된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니 오랜 시간 파도에 시달리다 육상에 내린 후에도 배의 움직임을 느끼듯이 취기가 남아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한두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절인 채소처럼 활기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하던 자리는 마치 큰 전쟁을 치른 장소인 듯 어지럽혀져 있고 미닫이 유리창은 문틀에서 벗겨져 마당에 눕혀져 있었다. 사정을 물으니 학생들이 통나무 나르는 것을 사진에 담는다고 뒷걸음치던 학생이 창문과 함께 마당으로 떨어졌다 하였다. 마침 군에서 의무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였던 학생들이 깨진 유리에 팔을 다친 학생을 응급 처치하였다. 학생들이 수학여행 중 마시려 넉넉히 준비하였던 강원도의 유명한 경월 소주를 하루 저녁에 모두 비워버린 후유증이었다.

아침에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찬물에 세수시키고 어지럽혀진 현장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 후 사감과 함께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함께 돌아가거나 모두 하나 되어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칠지 결정하라 하였다. 결국, 통나무가 된 주선을 기록으로 남기려다 팔에 유리 관통상을 입은 학생만은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하여 함께 귀경하기로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밝은 정신이 돌아오려면 몸을 움직여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것이 필요하니 다소 무리할지라도 가까운 산이나 계곡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고 수련원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10시경이었다고 기억한다.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에 이르니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빠르게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 편이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있었다. 버스 시간까지의 시간을 메우려 버스터미널 근처를 돌아보다가 재래식 시장에 들어서 어시장에 이르니 싱싱한 생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세 사람이 활어회로 점심 식사하자고 의견이 쉽게 모였다. 시장 안 좌판에 앉으니 해산물 밑반찬이 깔리고 시키지도 않은 소주병이 함께 나왔고 좀 지나자 광어회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몸은 저며져 있으나 아가미가 들썩이는 광어의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피하려 상추로 머리를 덮어 놓고 광어의 살점에 소주를 곁들인 점심을 하였다.

오후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을 떠나 대관령을 오를 때는 옅은 안갯속을 지나며 해장 효과인 듯 차츰 머릿속에 드리운 안개도 걷히고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 드리웠던 안개가 동풍을 타고 우리와 함께 대관령을 넘고 있었는데 미처 대관령을 넘지 못한 구름이 발아래 드리워 있었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발아래 구름 너머 보이는 동해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마실 때 가슴속까지 트이는 듯하였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는 속세에서 구름 속을 지나 선계에 이르렀으니 이 순간을 그림에 담으면 그림의 이름은 영상관해(嶺上觀海)이고 그림 속 세 사람은 대관령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주선이리라 생각하였다.
대관령에서 바라보이는 강릉 (http://getabout.hanatour.com/archives/259768)


나의 지도교수 앨런 피어슨




권욱현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



권욱현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
대학에서 석사나 박사학위를 한 모든 사람은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 분의 학문적인 것은 물론이고 그 분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는 미국대학 박사학위 과정에서 만난 지도교수가 앨런 피어슨( Allan Pearson) 교수님이다. 보통 이공계통에서는 학문 분야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데, 나는 피어슨 교수의 인간성과 배려심에 더 큰 감명을 받았다.

나는 1972년도에 브라운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사과정에서 졸업 성적이 전체 차석이라 MIT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또 한 미국 정부에서 주는 Fulbright 장학금도 받았다. Brown대학에서도 입학허가와 함께 연구장학금을 주겠다는 연락도 왔다. 플라이트 장학금은 어느 대학에 가든 5년간 매년 학비 3,000 달러를 주고 왕복 항공료와 하계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 참가비를 지원해 주었다. 상식적으로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MIT로 가는 데, 나는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비교적 소규모 대학인 브라운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MIT는 학비와 생활비가 6,000달러 정도였는데 플브라이트 장학금으로는 학자금이 모자랐다. 우리 집는 가난해서 학비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나의 꿈은 유학을 빨리 마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어느 대학에 가나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하는 데는 큰 차이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재정적 지원이 충분한 브라운대학으로 정했다. 브라운대학에 가서 면담과정을 거쳐 지도교수로 피어슨 교수님을 만나게 되어 인연을 맺었다.
사진 1 피어슨 지도교수님
피어슨 교수님의 부모님은 스웨덴에서 미국에 이민 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키가 훤칠하고 눈이 푸른 전형적인 서구인이었다. 한국에서 유학온 한 친구가 브라운대학에서 가장 잘 생긴 교수라고 말할 정도였다(사진1). 지도교수 사모님 Myrna Pearson 교수님은 인근의 한 작은 규모의 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소박하고, 단정하고, 맑은 인상이었는데 다리를 절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만났다고 했다. 외모가 출중한 지도교수님이 장애가 있는 분과 결혼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피어슨 교수님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큰 감명을 받았다. 학기 말이면 지도학생들을 지도교수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다니엘과 매티우 두 아들이 있었고 남편이 매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사모님도 학식이나 특히 인성 면에서도 교양있는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도교수님의 배려를 많이 받았는데, 처음 경험한 것은 브라운대학에 입학한 후 나의 서울대학교 석사과정을 인정하여 줄 것인가 결정할 때였다. 학사 학위를 갖고 브라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려면 최소 몇 년간 등록금을 지불해야 하고, 석사학위를 갖고 입학하면 1년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학칙이 있었다. 미국 타 대학에서의 석사학위는 인정하여 주었지만, 외국대학에서의 석사학위는 꼼꼼하게 심사를 하였다. 내가 서울대학교 석사과정에 다닌 1970년경에는 대학원 교육프로그램은 국제적인 기준에서 수준이 낮을 때였다. 예를 들어 교과과정을 봐도 한 과목이 1학점과 2학점으로 되어있어 한 학기에 6개 과목을 수강했을 정도였고, 교과서도 해외원서를 사용하지 않을 때였다. 심사서류로 석사과정에서 배운 교과서 제목도 요구해서, 제출하였는데 거의 한국어로 된 교과서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서울대학교의 석사학위를 인정하여 주었다. 지도교수님 입장에서는 1년간 등록비 지원을 절약할 수 있는 점도 있겠지만, 나에 대한 큰 배려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열심히 잘하면 1년 더 빨리 졸업할 수 도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시절에는 보통 한 주에 한 번씩 지도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연구에 대해 논의를 한다. 내가 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지도교수님이 아주 세심하게 읽어보고 문장을 고쳐주었다. 새로 수정된 문장은 훨씬 세련되게 보였다. 논문이 거의 완성되어 외부 학술지에 제출할 때에는 저자의 순위를 정해야 한다. 나는 한국 사람의 정서상, 내가 논문 연구에 더 많이 기여하였더라도 항상 지도교수님을 제1 저자로 적고 그다음에 나의 이름을 적어 가져갔다. 그러면 반드시 수정하면서 나의 이름을 맨 앞으로 적어 주었다. 논문에서 제1저자가 가장 업적이 많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직장을 구하거나 평가받을 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나와 지도교수님이 같이 작성한 논문은 거의 전부가 내 이름이 제1 저자로 앞에 나와 있다. 이것도 나의 발전을 바라는 지도교수님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나는 브라운대학에서 1972년 9월 학기부터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였다. 보통 석사학위가 없으면 5년 정도 지나야 박사학위를 받고, 석사과정을 인정받으면 4년 정도 지나야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했지만, 내용이 선진국 대학 수준 이하라서 5년에 마치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3년 만인 1975년 10월에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박사후(post doctor)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박사후연구원은 전임 연구원이라 대학원생보다 월급이 훨씬 많이 받고 단독 연구실도 갖는다. 나는 박사학위 하는 데 5년 걸릴 거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에, 지도교수님이 나를 5년간 대학원생 신분으로 데리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브라운대학에 간 지 2년 반 정도 지났을 때, 지도교수님이 나한테 박사 마치고 1년간 박사후연구원을 할 수 있는지 내 의견을 물어보았다. 당시 나는 미국에 유학올 때 풀브라이트에서 왕복 항공료와 2개월간의 하계 오리엔테이션 참가비를 받는 조건으로, 5년 후에는 귀국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박사후연구원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좋은 기회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곧바로 박사후연구원을 하자고 하셨다. 나는 매우 기뻤다. 졸업논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되어 문의드렸더니, 이제까지 발표한 논문을 결합하여 졸업논문을 작성하면 될 거라고 하였다. 나는 5년 후에는 무조건 한국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브라운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짧은 내용의 논문이라도 서둘러 학술지에 발표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2년 반 지난 후에는 2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 승인되었고 2편을 더 준비하고 있었다. 지도교수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나의 능력을 믿고 박사를 빨리 주려고 결정한 것 같았다. 박사후연구원의 경비가 대학원생의 배는 될 텐데도 그렇게 결정한 것은, 나에게 큰 배려를 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배려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1년간 연구를 더 열심히 하였다. 브라운대학에 입학한 후 4년 만에 브라운대학을 떠났다. 이 기간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도교수님과 공동저자로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 학술지에 논문 9편을 게재하었다. 지도교수님에게 보답한 셈이었다. 그 후 1년간 다른 대학에 있다가 계획대로 미국으로 떠난 지 5년 만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돌아왔다.

사진 2 BEAM 상장 앞면

사진 3 BEAM 상장 뒷면
나는 브라운대학을 떠난 후, 피어슨 교수님에게 새해 연하카드를 보내면서 내가 지내온 내용을 간단히 알렸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도교수는 대략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피어슨 교수님이 2003년도 초에 브라운대학 공학 분야에서 최고 상인 BEAM(Brown Engineering Alumni Medal) 상에 나를 추천하려고 한다고 했다. 만약 수상자로 선정되면 브라운대학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브라운공학부 학장으로부터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브라운대학 졸업식 전날에 개최되는 수상식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이 왔다. 왕복 차비와 숙박비는 브라운대학에서 부담한다고 하였다. 나는 지도교수님의 이러한 배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상은 서울대학교의 공과대학에서도 매년 졸업생 중에 가장 성공한 분을 선정하여 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누군가 추천하고, 추천서를 정성 들여 작성하고, 심사위원회에 설명을 잘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지도교수님이 직접 맡아서 한 것이었다. 내가 수상하려고 집사람과 함께 브라운대학이 있는 프로비던스 (Providence) 공항에 도착하니, 피어슨 교수님과 사모님이 공항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사모님은 그때는 혼자 걷기 어려워서 지도교수님 팔에 의지하여 걸으면서도,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키운 제자가 브라운 공학 분야의 최고상을 받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사모님도 대학교수였기 때문에 이 상의 의미와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와 함께 개최되는 수상식에도 피어슨 교수님 부부가 참석하였다. BEAM 시상은 맨 마지막에 있었다. 학장이 상세한 업적을 소개한 후, BEAM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액자에 든 상장(사진 2)을 수여하였고, 수상자에게 연설하는 기회까지 주었다. 연설하는 동안 수상자에 관한 여러 장의 슬라이드 사진을 스크린에 비추어 주었다. 그날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브라운대학에 유학 올 때의 아주 어려웠던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설명하고, 브라운대학과 지도교수님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이 발전되었다고 연설하였는데 참석했던 모든 분이 경청하였다. 학장이 A4 용지 한장 정도의 나의 업적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 상장 뒷면에 기록하여 둔 것이 독특했다(사진 3). 아마도 피어슨 교수님이 내용을 직접 적어 주었을 거로 생각한다. 여러 내용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브라운대학에 있을 때 두 편의 ground-breaking (지각을 깨는) 논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었다. 프로비던스 공항에서 출발할 때도 피어슨 교수 사모님은 불편한 몸으로 배웅해 주셨다. 이 모든 배려가 너무 감사하다.
사진 4 지도교수님께 영문책 헌정
나는 피어슨 교수님의 이러한 배려에 보답하고 싶었다. 내가 저술한 Receding Horizon Control 라는 영문교과서가 2005년 Springer 출판사에서 발행되었다. 위의 BEAM 수상식에서 ground-breaking 논문 두 편을 발표하였다고 했는데 그 논문을 기반으로 확대한 책이었다. 보통 책을 쓰면 누구에게 헌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부인이나 부모 혹은 가족에게 헌정하기도 한다. 나는 "Dedicated to Allan and Myrna Pearson"이라고 써서 피어슨 교수님 부부에게 헌정하였다. 책 표지 다음 한 페이지에 헌정 내용만 표시되기 때문에 눈에 잘 띄게 되어있다. 나와 집사람은 이 책을 증정하려고 2008년에 피어슨 교수님 댁을 방문하였다. 그때는 피어슨교수님 부부가 이미 은퇴한 후였다. 지난번 BEAM상을 받으러 브라운대학을 방문한 지 5년만 이었다. 피어슨교수님 부부는 자신들이 현정 대상이 되는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하고 매우 좋아하셨다. 헌정 장면을 사진 촬영을 하였다(사진 4).


브라운대학 공학부(Engineering Division)가 공대 형태의 Engineering School 로 변모하면서 공학빌딩을 신축할 때인 2013년, 나도 조금 기부하려고 집사람과 함께 브라운대학을 방문하였다. 지난번 책을 헌정하려 피어슨 교수님을 방문한지 5년 만이었다. 이때는 피어슨 교수님이 은퇴한 지 한참 후라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문하기 전 브라운대학에 계시는 김경석 교수에게 미리 연락하여, 브라운대학 공대학장과의 면담과 피어슨 교수님 연락처를 알아봐 주도록 부탁하여 두었다. 김 교수의 안내로 브라운대학교 공대학장을 만나 공학빌딩의 설명을 듣고 100,000달러를 기부하는데 서명하였다. 기부할 때 기부 이유를 적을 수 있는데 나는 이렇게 적었다: " Donation in honor of Professor Allan Pearson". 지도교수님을 기념하여 기부한다는 뜻이다. 김 교수가 어렵게 피어슨 교수님 연락처를 알아내어 전화로 시내의 식당으로 초청했더니, 사모님이 외부에서 식사하기가 불편하니 본인이 있는 곳에서 간단히 식사할 수 있으니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김 교수 차로 함께 찾아가니 피어슨 교수님 두 분 내외가 거주하고 있는 실버타운이었다. 널찍한 땅에 2층 아파트가 여러 채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피어슨 교수님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도 무척 반가웠다. 사모님이 혹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언뜻 초기 치매증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복도에 사모님이 휠체어를 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알아보면서 아주 반가워했다. 그런데 휠체어에는 바퀴를 돌리는 손잡이가 없었다. 환자가 스스로 이동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이동이 가능한 것이었다. 세월이 무상함을 느꼈다. 외부 방문객을 위한 방에서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담소하였다.
사진 5 2013년 피어슨 교수 부부
김 교수가 내가 브라운대학에 피어슨 교수님을 기념하여 1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고 전해주었더니, 피어슨 교수님 부부는 매우 고마워했다. 1 년 전에 사모님이 몸이 불편하여 두 분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식사 후 사는 방으로 안내하였는데 단독 방 2개를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 방을 하나만 사용하는데 부인이 몸이 불편하여 방 2개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방 안에 개인 가구는 1개만 허용되는데, 피어슨 교수 아버님이 만든 책상 1개를 가지고 들어 왔다고 했다. 여기는 컴퓨터가 없어 요즘은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간 나와 이메일로 연락이 안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기념으로 방안에서 사진 촬영하였다(사진 5). 사모님을 생전에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헤어졌다.

피어슨 교수님 부부는 실버타운에 와서 4년간 함께 생활하다가, 사모님은 몸이 더 나빠져서 집중적으로 치료받기 위하여 실버타운 안의 다른 병동에서 홀로 있어야 했다고 한다. 피어슨 교수님이 매일 문안가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작년 2020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피어슨 지도교수님은 연세가 지금 만 84세다. 지도교수님의 사모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제자인 나에게도 늘 배려해 주신 지도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의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받은 배려를 나의 지도 학생들에게도 내가 베풀었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