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공릉동 캠퍼스에서 조선공학과 학과장 업무를 맡고 있던 1978년 가을에는 학생지도 문제가 캠퍼스 이전 준비업무에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끊이지 않아 학교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 심지어 여름방학에는 문제 학생을 지도하기 위하여 지방에 있는 학생의 가정을 방문하여 학부모를 만나야만 하기도 하였다. 학기 말에는 제식훈련 분열식으로 교육을 마치는 교련 시간에 학생대열 후미에 임석하기도 하였다. 또 가벼운 차림이었지만 군장을 갖추고 행군 훈련에 나서는 학생대열을 따라 공릉동 캠퍼스에서 불암사까지 상당 거리를 왕복하여야만 하였다.
강의 시간에 수직 하중을 받는 기둥의 붕괴 문제를 다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침 중간시험문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통근버스 창밖으로 청량리 대왕 코너 앞 지하철 공사장에 발생한 붕괴 사건을 보고, 붕괴를 일으킨 흙압력을 추정하라는 문제를 내었다. 흙막이 벽을 버텨주는 H 빔의 치수를 주었으므로 하중 방향만 바꾸어 생각하면 교과서의 문제와 같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바로 전해에는 성냥개비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눌러 부러트리는데 필요한 손가락 힘을 구하라는 문제를 낸 일이 있었기에 조금만 응용하면 당연히 풀 수 있어야 했다.
정답자가 없어 실망하여 교실에서 학생들 머릿속에는 응용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꾸짖은 일이 있었다. 꾸중을 들었던 몇몇 학생이 하교 후 어울려 주점에서 시험성적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성적이 나쁘니 골빈당을 만들자 하였다. 골빈당의 당직을 성적의 역순으로 정하자 하였으며 당헌에는 지도교수 의견을 넣어야 한다며 서로 당직을 예상하며 웃고 떠든 일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 드나들던 청량리 경찰서 형사가 학생들이 활빈당을 민다고 대화를 잘못 전하여 듣고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과장이며 지도교수였던 나의 연구실까지 찾아와 활빈당을 캐어물은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당시는 유신체제 말기로 학생 동태를 민감하게 관찰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졸업반 학생들이 수학여행 계획을 들고 찾아왔다. 설악산 여행 계획이었는데 당시 학교의 방침은 반드시 전공과 관련 있는 산업현장을 거치도록 하고 있어서 승인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학생들은 설악산 여행을 간절하게 원하여 여러 차례 계획을 들고 찾아왔기에 지도교수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설악산 여행을 허락하였다. 학생들은 당시 공대 기숙사 사감이었던 이기표 교수의 기숙사 일정이 비는 기간에 맞추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학교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서류상으로는 산업현장 견학한다며 거짓 일정을 보고하였다.
학교의 규정을 어기고 학생들의 뜻을 받아주었는데 학생들이 출발한 아침에 기숙사 식당 벽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벽서가 발견되어 학장주재로 긴급 사감 회의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학생을 인솔하여 수학여행을 떠난 이기표 교수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학장은 학과장인 나를 호출하였다. 사감이지만 비번이어서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인솔하도록 학과에서 결정하였다 하였다. 학장은 학교에 제출한 여행 일정을 살피고 일행이 조선소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전화 연락하여 사감을 즉시 귀환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강경한 학장 명을 더는 거스를 수 없어 점심시간에 긴급학과 교수회의를 개최하였다.
내심 원로 교수님들이 학장을 찾아뵙고 양해를 구해주시리라 지레짐작하였으나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이르렀다. 학과의 업무는 원로교수들이 처리할 터이니 학과장이 설악산으로 학생을 찾아 나서서 사감이 다음날까지는 돌아올 수 있도록 하라는 결정이었다. 수학여행의 구체적 일정은 학생대표와 인솔 교수가 결정하도록 하였기에 현지에서 일행을 만나는 것이 시급하였다. 황종흘 교수께서 여비를 마련해주셨고 임상전 교수께서 학과장 업무를 맡아주시기로 결정되었다. 결국, 오후 강의는 휴강하고 평상 출근복 차림으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사고 나서 갑작스럽게 출장하게 되었다고 집에 전화 연락하였다.
학과 회의 후 서둘러 출발하였으나 고속버스가 터미널에서 떠날 때는 오후 15:00쯤이었다 기억한다. 버스가 떠나 얼마 지나서 비로소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갈아입을 내의도 없는 상태임을 깨달았으며 가는 곳은 막연히 설악산이어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매우 걱정되었다. 학생들이 출발 직전까지 일정을 확정하지 못하여 학교의 설악산 수련원 사용승인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릉에 도착하였을 때는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수소문 끝에 학생들이 찬거리를 사서 들고 설악동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히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택시를 전세하여 설악동에 이르러 수소문 끝에 학교 수련원으로 학생들이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수련원 이용자가 없었으나 시설사용 허가 없이 찾아온 학생들에 시설사용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행한 지도교수가 정식으로 시설사용 허가를 받아 보완하는 조건으로 관리인을 설득하여 시설을 사용하게 되었다. 자연히 저녁 준비가 늦어져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에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과장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학생들의 술자리에 나타난 격이 되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거북하여 술자리가 생각나 설악산까지 학생들을 찾아왔다 하였다.
말 한마디 잘못이 화근이 되어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고 피하려 하였으나 술을 잘한다는 학생과 마주 안자 대작하게 되었다. 네 번째 학생까지 차례로 내 앞자리에 술잔을 비우다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나는 주선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내가 술꾼 넷을 물리쳤다며 오관참장(五關斬將)의 관우(關羽)를 예우하듯 나를 어깨 위로 들어 메고 방안을 돌았다. 나는 늘어진 전구를 피하려 자세를 낮추어야만 하였는데 아마도 밖에서 보았다면 주선이 아니라 통나무로 보였을 것이다. 요즘도 체력 훈련을 받는 병사들이 대오를 짜 통나무를 들어 올리는 영상을 볼 때면 1978년 가을 설악산을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된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니 오랜 시간 파도에 시달리다 육상에 내린 후에도 배의 움직임을 느끼듯이 취기가 남아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한두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이 절인 채소처럼 활기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하던 자리는 마치 큰 전쟁을 치른 장소인 듯 어지럽혀져 있고 미닫이 유리창은 문틀에서 벗겨져 마당에 눕혀져 있었다. 사정을 물으니 학생들이 통나무 나르는 것을 사진에 담는다고 뒷걸음치던 학생이 창문과 함께 마당으로 떨어졌다 하였다. 마침 군에서 의무병으로 제대하고 복학하였던 학생들이 깨진 유리에 팔을 다친 학생을 응급 처치하였다. 학생들이 수학여행 중 마시려 넉넉히 준비하였던 강원도의 유명한 경월 소주를 하루 저녁에 모두 비워버린 후유증이었다.
아침에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찬물에 세수시키고 어지럽혀진 현장을 정리하고 아침 식사 후 사감과 함께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함께 돌아가거나 모두 하나 되어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칠지 결정하라 하였다. 결국, 통나무가 된 주선을 기록으로 남기려다 팔에 유리 관통상을 입은 학생만은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하여 함께 귀경하기로 하였다. 학생들에게는 밝은 정신이 돌아오려면 몸을 움직여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것이 필요하니 다소 무리할지라도 가까운 산이나 계곡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고 수련원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10시경이었다고 기억한다.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에 이르니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빠르게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 편이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야 있었다. 버스 시간까지의 시간을 메우려 버스터미널 근처를 돌아보다가 재래식 시장에 들어서 어시장에 이르니 싱싱한 생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세 사람이 활어회로 점심 식사하자고 의견이 쉽게 모였다. 시장 안 좌판에 앉으니 해산물 밑반찬이 깔리고 시키지도 않은 소주병이 함께 나왔고 좀 지나자 광어회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몸은 저며져 있으나 아가미가 들썩이는 광어의 원망하는 듯한 눈빛을 피하려 상추로 머리를 덮어 놓고 광어의 살점에 소주를 곁들인 점심을 하였다.
오후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을 떠나 대관령을 오를 때는 옅은 안갯속을 지나며 해장 효과인 듯 차츰 머릿속에 드리운 안개도 걷히고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 드리웠던 안개가 동풍을 타고 우리와 함께 대관령을 넘고 있었는데 미처 대관령을 넘지 못한 구름이 발아래 드리워 있었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발아래 구름 너머 보이는 동해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마실 때 가슴속까지 트이는 듯하였다. 그 순간 마음속으로는 속세에서 구름 속을 지나 선계에 이르렀으니 이 순간을 그림에 담으면 그림의 이름은 영상관해(嶺上觀海)이고 그림 속 세 사람은 대관령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주선이리라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