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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여행과 현대연구비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며 장차 국가의 필수 산업인 조선산업과 항공산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조선항공학과가 설립되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던 1959년 봄에는 조선항공학과 교수들 모두가 서울대학의 전쟁 피해에서 벗어나 교육 정상화가 이루어지도록 시행하고 있던 미네소타 계획으로 MIT에서 연수를 마쳤으며 학과에는 ICA 원조로 최신의 실험 실습 기자재가 도입되어 신설학과였으나 당시로는 첨단학과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4.19와 5.16을 거치는 동안 여러 학과에서는 학생들의 정풍운동으로 일부 학과에서는 교수가 학교를 떠나기도 하였으나 조선항공공학과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는 1966년 조선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조선 분야가 아닌 광산에 취업하여 기계 설계를 담당하였다. 1968년 신입 사원을 모집하려 공과대학을 찾았는데 조교 임용기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대학으로 되돌아와 가을 학기에 유급조교로 발령을 받았다.

유급조교에게는 학문적 연구 활동을 통하여 학술지에 2편 이상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면 전임강사로 승진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다. 일부 과목의 실험실습 조교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광탄성 실험실을 담당하며 선체 구조부재의 응력분포 상태를 실험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로 실험논문을 작성하였으며 Fourier 해석법으로 구조부재의 응력을 해석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1970년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교수님들과 연구계획을 협의하여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하여 선박건조 기술로 자리 잡은 용접공학 분야를 담당하였다. 이때 대한조선공사는 대만에 원양어선 수출한 것을 계기로 선박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만재배수량이 18,000톤인 팬 코리아호를 진수시켜 국제항로에 취역함으로 선박 건조능력을 국제사회에 알리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조선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력한 조선산업 육성정책을 펼치며 대형조선소 건설을 독려하였다.

정부의 시책에 따라 1973년 대한조선공사는 현재의 대우조선해양인 옥포조선소를 착공하였으며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을 설립하였다. 현대중공업의 정주영 회장은 1973년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 설립 장소를 마련한 상태에서 선박 수주 활동에 나섰다. 조선소를 건설할 해안가 백사장 사진과 500원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이며 그리스의 선주 리바노스를 설득하여 300,000톤급 초대형 유조선 Atlantic Baron을 수주하였다. 현대적인 선박건조 경험이 일천한 우리나라가 무모하다고 보이는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동지역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로 스에즈 운하가 폐쇄되었을 때는 희망봉을 우회하더라도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초대형 유조선의 수요가 폭발하였다. 그리고 사우디는 초대형 유조선이 자유롭게 원유를 적재할 수 있는 쥬베일 산업 항을 해상에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10,000톤급 선박을 최초로 건조한 것이 1972년이었는데 현대중공업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건조를 동시에 추진하여 1974년에 6월에는 선박의 명명식과 조선소 준공식을 함께 가졌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호를 명명하는 자리에 정주영 회장과 선주인 리바노스가 함께하고 있다.
출처: https://www.seoulwire.com/news/articleView.html?idxno=431921


국내에서는 혁명정부의 산업화 정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에 시작한 새마을 운동이 결실을 보기 시작하였다. 아침이면 박정희 대통령이 작사하고 작곡한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월남 파병 후 널리 보급된 브라운관 방식의 흑백 TV에는 연속 방송 “꽃피는 팔도강산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정부는 조선산업에 대한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며 중동의 특수로 건설산업 수요뿐 아니라 선박의 수요도 상당 기간 지속하리라 예상되어 새로이 출발한 조선산업은 순조롭게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76년경에 정부는 순조롭게 산업화의 물결에 올라서서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주요 산업체들에 주식을 공개토록 하여 국민기업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주영 회장은 1977년 7월 아산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현대그룹은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성실하게 환원하고 있는 국민을 위한 모범적 기업이라 주장하며 기업공개 대상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아산 사회복지재단은 단순한 기업공개 이상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구체적 사업으로 전국 8개 지역에 대규모 종합병원을 설립하기로 선언하였다. 1977년에 정읍, 보성으로부터 차례로 착공하였으며 1978년부터 개원하였다. 사회 복지 사업과 학술연구 지원사업 그리고 장학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전국 대학 주요 학과에 막대한 연구기금을 제공하였다. 현대그룹은 사원 전원의 출신대학을 조사하고 직종과 직급에 따라서 가산점을 적용하여 그룹발전에 기여도를 대학과 학과별로 추계하고 이를 기준으로 연구기금 규모를 결정하였다. 전국에서 6개 대학을 지원대상으로 선정하였으며 현대그룹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되는 공과대학의 여러 학과와 경제학과 등이 포함되었다. 1977년 늦가을 기금 규모를 결정하고 학과별로 배정하였는데 조선공학과에는 3,500만 원을 연구기금으로 배정하고 매년 발생 이자를 연구 활동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1978년 정초에는 지원대상 학과의 학과장들을 현대건설의 중동 지역사업장으로 초대하였다. 전국의 지원대상 학과 학과장들이 현대그룹이 제공하는 전세기를 타고 타이베이와 홍콩 그리고 방콕을 경유하여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등지를 방문하였다.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잊혔으나 한겨울 여행이었는데 방콕 공항에서 잠시 내려 보세구역으로 이동하며 습기를 머금은 더운 열기를 느끼며 도착지인 사막의 열기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막상 사우디에 도착하였을 때는 여행 중 야간에 필요하리라며 지급하는 방한 점퍼를 받아 여행 중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지금도 모래뿐인 사막에서 건설 공사를 하며 모래의 굵기와 강도가 적합한 모래를 찾기 어려워하던 공사 현장이 기억난다. 쥬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에서는 울산에서 거대한 해상구조물을 제작하여 현장까지 10,000km 이상의 장거리 항로를 보험에 들지도 않고 바지선으로 운송하였으며 이를 해상에서 정밀시공하는 현장설명을 듣던 일이다.

초대형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원유를 적재할 수 있는 쥬베일항
출처: https://www.hdec.kr/kr/tech/project.aspx?bizIntro=235&bizCate=OCEAN&searchType=CIVIL#.YIC7959xe70


쥬베일 산업항을 경비하는 사우디 군부대의 장교 숙소 건설현장에서는 4면에 출입구가 있는 지휘관의 숙소를 설명하는 안내자의 말이 규정상 지휘관은 출근할 때 나온 문으로 퇴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지휘관이라면 4명까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는 중동지역의 풍습이 어느 한 부인을 편애하여서 안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또 쿠웨이트를 방문하였을 때는 내게 침실이 2개인 호텔의 객실이 배정되었는데 같은 구조인 인접 객실과 필요에 따라 연결 가능한 구조였다. 현지 안내인에 물으니 이는 여러 부인과 함께 여행하는 경우를 위한 호텔구조라 하며 4 부인이 함께 왔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하였다. 그리고 바레인에서는 현대건설의 업무를 지원하는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마호메트가 이끈 전쟁과 승전 후 귀환한 장병들에게 전사자 유족을 위한 보훈 정책의 하나로 4 부인까지 거느리게 하였고 이후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접하였던 일들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는 현대중공업이 배정한 연구기금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는 은행의 정기예금 이자가 높아서 원금 3,500만 원에 대하여 첫해에 지급되는 이자 중에서 500만 원을 연구비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학과로서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매년 지급되는 연구비였으므로 학과의 원로교수인 김재근 교수로부터 순차로 연구 활동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학교 행정부서에 보고하였는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내가 1970년 대학에 전임강사로 발령받았을 때 급여는 34,800원이었으며 1978년 6월에 지급받은 급여가 201,000원이었다. 문교부 연구비는 1975년에 비로소 과제당 100만 원을 넘기 시작하였고 교수들은 연구 규모를 키우려 여러 연구자가 참여하는 대형과제를 제안하던 시기였는데 학과가 당시로는 큰 규모의 과제를 한 교수에 집중하여 집행하겠다는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차례 학장실로 불려 갔으며 공과대학이 연구비의 5%를 기여금으로 연구기금을 조성하고 있는 이유, 산업시설은 전공의 장벽을 넘는 시스템 융합으로 가능해진다는 이유 등으로 연구비 집행에서 학과의 장벽을 헐고 공과대학 전체에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집요한 설득을 듣게 되었다.

1970년 공무원 봉급인상 일람표 중 일부
1978년 6월 조교수급여


선박을 훌륭하게 설계하고 건조하더라도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하거나 페인트를 칠할 수 없으면 진수할 수도 없다는 설명에 동의하지 않고 첫해의 연구비는 원로이신 김재근 교수가 단독으로 수행하도록 한다는 학과의 결정을 지키기는 조교수로 승진하여 학과장업무를 맡고 있던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김재근 교수는 연구비를 사용하여 “선박기본설계과정에서 경제성검토와 최적화 기법의 응용”를 수행하여 현대중공업의 선박설계에 도움이 될 결과를 발표하였으나 다음 해부터는 연구비를 학과 내 2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여야만 하였다. 현대연구비는 은행이자에 따라서 변동되었는데 1979년에는 513만원 그리고 1980년에는 750만 원이 지급되어 조선공학과는 매년 2개의 중형 규모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바뀌며 3,500만 원의 가치는 줄어들었으며 법정이자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연구비로 효력을 가질만한 규모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수년간 이자를 적립하여도 연구비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연구기금을 받았던 모든 학과가 기금의 원금 소재조차 잊은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