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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프로젝트(1954-1962)를 생각한다




민기복
서울대학교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



민기복
서울대학교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
어려울 때 받은 도움에 대하여 잊지 않고, 이를 되갚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필자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대가 한국전쟁 직후 어려운 시기에 받은 도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도움을 이제는 되갚아야 할 때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서울대학교는 해방직후 1946년 10월 종합국립대학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당시 강사를 포함한 교원의 수는 378명(공대의 경우 8개학과 42명)이며, 학생의 수는 7,161명(공대 1,371명)이었다(서울대학교, 2016). 현재는 조교수 이상 교원의 수가 2,100여명(공대 320여명)이고, 재학생은 27,000여명(공대 5,500여명)이니, 현재와 비교하여 공대 교원의 숫자는 13%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서울대 전체적으로 현재에 비해 13%~25% 내외의 인원으로 출발한 셈이다. 특히,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1950년-1953년)으로 인한 시설의 피해와 교원의 사망 및 월북 등으로 인해 서울대학교는 현대적인 교육을 시행하기에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전봉희, 2019). 이 시기에 미네소타대학이 1954년부터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교육원조 사업이 미네소타 프로젝트 1) 이다(표 1, 그림 1, 2 참조).
그림 1. 서울대 학장단과 미네소타대학 수석자문관
(Fowler S, 1955년 1월 서울에서 촬영; 좌로부터 황영모 공대학장, 조백현 농대학장,
Arthur E Schneider 수석 자문관, 이제구 의대 학장).
Schneider 수석자문관은 1954년 9월부터 1961년 10월까지 7년간 서울대학교에 상주하였다.
그림 2. 공릉동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 전경(Schulte PFC, 1955년 4월 촬영).
사진 가운데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이 보인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공학, 농학, 의학 등 전쟁 직후 재건에 필요한 실용적 학문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교원, 장비, 시설 등에 투자가 이루어졌다. 8년 동안 지원된 금액은 미화 약 천만달러로 1954년-1962년에 걸쳐 실시된 미국 정부 주도의 한국 고등교육 원조 총액의 78%에 달할 정도로 서울대에 집중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55년의 경우 서울대학교 예산지출의 34%를 외국원조액이 차지(김명진, 2009)하는 등 학교 운영에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표1. 미네소타 프로젝트 개괄
(이왕준, 2006; 김명진, 2009 등에서 취합)
기간
1954.9.28 – 1962.6.30
비 고

재원

미화 9,452,000 달러

당시 화폐 기준이며 현재 환산기준
1,240억원 (서울대학교, 2019)

미국 파견교원

218
(공대 64, 농대/수의대 45/12, 의대 77, 행정대학원 8, 총장 1)

연수기간 평균 16개월

자문관

60(미네소타대 39명등)

공대 파견 자문관 12(3개월~15개월 체류)

지원기관

미국 대외활동본부 (FOA)

국제협조처 (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1955년 개편됨.

시행기관

미국 미네소타 대학

필요한 경우 미국 타 대학도 참여

수혜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행정대학원, 수의과대학

행정대학원과
수의과대학은
프로젝트 착수
이후 추가

프로젝트의 핵심은 교원의 연수로 총 218명의 교원이(짧게는 3개월부터 길게는 4년간; 평균 1년6개월) 미국 연수를 지원받았으며, 이 중 71명이 석사학위, 15명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공대의 경우 전임강사 이상의 교원 54명을 포함하여 64명이 지원받았다. 이는 1955년 당시 공대의 전임강사 이상 교원이 66명(조교 및 시간강사 포함 161명, 전봉희, 2019)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전임교수 이상 공대 교원의 80% 이상이 미국 연수를 다녀왔으며 연수교원의 75%이상이 1년 이상 체류하였다. 이러한 지원은 교원 중 전쟁직후부터 1955년 사이에 해외유학에서 돌아온 공과대학 교원이 불과 12명에 불과(김명진, 2009)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인 지원이었다 할 수 있다.

표2.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연수한 교원의 학과별 현황(김명진, 2009)
전공
연수인원
비 고

건축학

3

부교수 1, 조교수 1,
전임강사 1

광산학

5

교수 1, 부교수 2,
전임강사 2

금속공학

5

부교수 3, 조교수 1,
강사 1

기계공학

7

교수 3, 부교수 2,
조교수 2

섬유공학

6

교수 2, 조교수 2,
전임강사 1, 조교 1

원자핵공학

4

조교수 1, 강사 1,
조교 2

전기공학

7

교수 2, 부교수 2,
조교수 3

전자공학

3

부교수 2, 전임강사 1

토목공학

6

교수 1, 부교수 1,
조교수 2, 전임강사 1,
강사 1

항공조선공학

5

조교수 3, 전임강사 2

화학공학

8

부교수 3, 조교수 1,
전임강사 1, 강사 2,
조교 1

기타(기초수학, 기초물리, 기초화학 등)

5

교수 2, 조교수 1,
전임강사 1 강사 1

64

전임강사 이상 54,
강사 및 조교 10

또한 총 57명의 자문관과 비서 3명 등 총 60명이 분야별로 서울대학교에 파견되어 당시 서울대학교의 교육 연구에 대한 자문을 하였는데 자문의 범위는 교과과정, 연구 방향, 건물복구 등 매우 포괄적이었다. 파견된 자문관들은 통상 3개월에서 1년이상(평균 9개월)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공과대학의 현황을 개괄하고, 문제점과 개선 방안 등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김명진, 2009). 아래는 서울공대에 파견된 자문관들의 보고서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자문관들의 보고서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최초로 시행된 해외석학평가의 의미를 지닌다.

“...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업 중 실험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실험시간을 늘리기 위한 노력이 형식적으로나마 이루어지고 있다...” (W.W.Staley, 1957년 8월 광산학과에 대한 보고서, 그림 3)

“...파손된 건물의 복구는 많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수업중 교과서가 부족한 것이 미국 대학과 다른 점이다. 어떤 수업은 교재 없이 판서나 구두 강의만으로 이루어진다....많은 교원이 봉급이 적어 강의 외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교원들은 대체로 능력이 있어 보인다...그들은 새로운 실험장비가 구축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S.C.Larson, 1955년 12월 전기공학과에 대한 보고서)

“...화학공학과의 증기발생기에 대한 보험 가입을 추천하며, 학과에 있는 보일러는 매년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모든 화학실험실에 비상샤워설비를 구비하여 혹시 모를 위험물질 노출에 대비해야 한다....화학공학과의 교과과정을 제시된 리스트를 참고하여 개편하기를 추천한다...” (C.E.Schwartz, 1959년 8월, 화학공학과에 대한 보고서)
그림 3.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광산학과(현 에너지자원공학과)에 파견된 자문관의 보고서 목차(Staley, 1957).
오른쪽은 자문관이 체류하는 동안 방문한 지역이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건물과 장비에 대한 지원도 하였는데 공과대학 기숙사 청암사가 대표적이다. 또한 한국전쟁에서 공과대학이 가장 큰 피해를 받았는데 화재와 폭격으로 피해받은 공과대학 건물을 원조에 힘입어 복구하였다(서울대학교 역사, 2017). 이와 같이 교원, 장비, 시설에 대한 지원을 통해 현대적인 공학교육 및 연구의 기틀을 잡고, 공학교육의 성격이 기술관료양성을 위한 강의위주에서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실험위주로 바뀌는 데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전봉희, 2019). 가장 많은 교원이 연수를 다녀온 의과대학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 덕분에 1950년대 후반의 현대적 시설과 장비를 갖출 수 있었고, 현대 의학교육과 연구의 밑그림이 그려졌다는 평가를 하고 있으며 간호대학과 보건대학원 건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이왕준, 2006).

필자는 2004년 어느 국제학술대회에서 내 전공인 암석역학/지오메카닉스 분야 최고의 석학으로 존경받는 미네소타 대학의 Charles Fairhurst 명예교수의 주제강연을 청취하다 본인의 첫 제자 중 한명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놀란 기억이 있다. 그 후 2009년에는 필자의 은사이신 이정인 명예교수님의 회고담을 통해 교수님께서 광산학과에 1959년 입학하였으나 전공 내용이 본인의 지향과 맞지 않아 낙심하고 있던 차에 마침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김동기 교수님이 암석역학이란 전공이 비전이 좋다고 소개를 해주신데 용기를 얻어 전공에 매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이정인, 2009). 이를 통해 Fairhurst교수의 첫 한국인 제자가 바로 우리학과 김동기 교수임을 알게 된 것이다. 김동기 교수님은 1969년 산악사고로 요절하시어 미네소타 대학과 우리 학과와의 인연은 안타깝게 이어지지 못하였으나 미네소타 프로젝트 덕에 Charles Fairhurst 교수 - 김동기 교수님 - 이정인 교수님 – 필자로 이어지는 인연이 생겼고, 이러한 인연을 생각할 때 필자 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서명된 1954년 9월 28일은 한국전쟁이 중단된 지 불과 1년 후로 한국은 대학교육의 여건이 부족함은 물론 외국인이 보기에 전쟁의 재발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최근 수년간 서울대학교 글로벌사회공헌단을 통해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네팔, 인도네시아 등 우리보다 어려운 여건에 있는 나라들을 방학 중에 방문하여 교육봉사 등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나라의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아마 우리나라 전쟁직후가 이랬을 것이란 짐작을 하며 내가 만약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성장을 하였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곤 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종료되던 196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Gross National Income)은 120달러로 케냐(100달러)와 비슷하고, 필리핀(220달러)의 절반정도였으며, 일본(610달러)의 1/5 정도였다(그림 4). 하물며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1954년은 전쟁직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나라가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종료된 지 60여년이 지나서는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철강, 조선 등 분야에서 세계 일류 산업을 갖추고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모범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를 달성하는 데 서울대학교 특히 공과대학 졸업생들이 매우 큰 역할을 한 점이 구성원으로서 너무나 자랑스럽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 이외의 30 여개국에서도 유사한 공적원조를 수행하였지만 서울대학교가 월등히 우수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우리 선배 교수와 학생들의 피나는 노력을 높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같은 원조가 없었다면 서울대학교의 발전과정은 훨씬 더 지난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누군가를 대신해서 받았을 그 도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림 4. 주요 10여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 변화
(1962년-2019년, 세계은행 2021년 자료, https://data.worldbank.org)
물론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같은 미국의 원조는 한국전쟁 직후 당시 지정학적 정세의 산물인 측면이 있다. 또한 8년간의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의 문화충돌, 자문관의 권고 내용 이행 등과 관련한 갈등, 연수를 통해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도 서울공대에 정착하지 못했던 사례가 많았던 점 등 교훈도 많았다고 할 수 있다(김명진, 2009). 그러나 이러한 수혜자로서의 경험은 오히려 해외 원조를 보다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될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총장 펠로우쉽(SPF, SNU President Fellowship)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도상국 출신 교수요원 양성에 나서고 있고, 2012년 의과대학에 설립된 이종욱 글로벌의학센터를 통해 국제사회에 대한 사회적 책무 이행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미네소타대학에서는 프로젝트를 기념하여 683종의 행정문서, 보고서, 사진, 메모, 서신, 자문관 보고서, 개인자료, 신문기사 등 방대한 자료를 디지털도서로 공개하고 있다 2) (Morken, 2020). 최근 서울대에서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대한 재평가를 추진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나(서울대학교, 2019), 아직 서울대학교 구성원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며, 이에 따라 이를 계승하려는 노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속한 에너지자원공학과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대한 보답으로 최근 ‘에너지자원국제인력양성 장학금’을 조성하여 한국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 있는 나라들의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3) 이 기금은 지난 2019년 4월에 시작되어 2029년까지 10년간 총 6억원의 모금(1단계 5년 및 2단계 5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에너지자원공학과에서 60여 년 전에 5명의 교수님이 지원을 받았으니 그 2배인 10명을 양성하여 외국에서 받았던 도움을 되갚자는 것으로 아직까지는 약소한 수준이다. 특히, 이 사업을 통해 학과의 지명도를 높이고, 국제협력도 강화할 수 있으니 1석 2조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현재까지 취지에 공감하신 전 현직교수님, 졸업생, 동문 기업인 등 기부자 20여명의 협조로 1단계 목표금액 3억원의 약 50%가 달성되었으며 계속적인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어려울 때 받은 도움에 대하여 잊지 않고 이를 되갚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서울대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받은 도움을 이제는 되갚아야 할 때이다. 에너지자원공학과의 조그만 노력이 씨앗이 되어 보다 대규모의 저개발국가 과학기술분야 교육원조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정인 교수(왼쪽 세 번째), 차국헌 공대학장(오른쪽 세 번째)과 교수일동
희송지오텍 김기석 대표(오른쪽 세 번째)와 교수일동
그림 5. 에너지자원국제인력양성 장학금 출연 모습


[참고문헌]


• 김명진, 2009, 1950년대 고등교육 협력에 관한 연구: 서울대-미네소타대 프로젝트 사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박사학위논문
• 서울대학교, 2016, 서울대학교 70년사
• 서울대학교, 2017, 서울대학교 역사(1946-2016)
• 서울대학교, 2019,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영향과 의미 토론회 자료집(2019년 12월4일).
• 이왕준, 2006,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교육에 미친 영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사학위 논문
• 이정인, 2009, 나의 암반공학과의 첫 만남 이야기, 한국암반공학회 웹진 U-Space, 제 5 호, p.1-8
• 전봉희, 2019,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한 서울대학교 공학교육의 변화,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영향과 의미 토론회 자료집, 2019년 12월4일 개최.
• Fowler S. Seoul National University, Schneider with Deans.. 1955-01-04.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University Archives., umedia.lib.umn.edu/item/p16022coll175:20890 (방문일: 2021년 2월21일).
• Larson SC, 1955, The Electrical Engineering(Power) and Telecommunications Department of the College of Engineering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Korea: A Report by Sidney C. Larson, Seoul National University Cooperative Project
• Morken K, 2020, ‘Sister Relationsihp’: Cooperative Project with Seoul National University, 미네소타 대학 도서관 자료, https://www.continuum.umn.edu/2020/05/seoul-national-university/ (방문일: 2021년 2월21일)
• Schulte PFC. Seoul National University, Aerial Views. 1955-04-14. University of Minnesota Libraries, University Archives, umedia.lib.umn.edu/item/p16022coll175:20889 (방문일: 2021년 2월21일)
• Staley WW, 1957, Report on the College of Engineering, Seoul, Korea; Seoul National University Cooperative Project
• Schwartz CE, 1959, Report on the Department of Chemical Enginering, College of Engineer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Seoul National University Cooperative Project

1) 이 프로젝트의 공식명칭은 서울대학교 협력 프로젝트(Seoul National University Cooperative Project)이나, 미국에서는 한국 프로젝트(Korean Project) 혹은 한국협력 프로젝트(Korean Cooperative Project) 등으로 통상 불리었으며, 한국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불리었다(Morken, 2020).

2) https://umedia.lib.umn.edu/search?facets%5Bsuper_collection_name_ss%5D%5B%5D=Seoul+National+University&rows=10

3) 에너지자원국제인력양성장학금 모금 페이지 (https://engerf.snu.ac.kr/fundinfo/my_fund_view.php?idx=29)




조선산업의 세계화에 공헌하신 김극천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평소 연락하시는 일이 없었던 김극천 명예교수가 전화 연락을 주신 것은 2020년이 다 지나고 있던 12월 28일 오후 늦어서였다. 대학에 재임하던 시기에 퇴근 후 집에서 지렛대를 이용하면 정원석도 옮길 수 있다고 홀로 작업하며 허리를 혹사한 일이 있었다 하셨는데 정년퇴임 후 점차 상태가 악화하여 근래에는 보행이 자유롭지 못하셨다. 전화로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며 지난날 매일 소주를 한 병을 비우신다던 말씀을 기억할 만큼 건강하시다 생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전화하는 이유가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전화하게 되었다 하셨다.

주변에 알리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하며 선생님의 첫 제자인 이재욱 인하대 명예교수와 함께 12월 30일 오후 댁으로 방문하였다. 병상에 누워계셔 몸은 쇠약해 보였으나 다과를 함께하며 또렷한 정신으로 여러 말씀을 나누었다. 조선산업의 장래와 원로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두셨으며 관심사인 본인의 건강문제에 이르러서는 가족에 짐이 되지 않도록 요양병원을 알려 달라 하셔서 구정을 지나 다시 찾아뵙기로 하였다. 댁을 나설 때는 요양병원으로 옮기시더라도 찾아뵙고 도움이 될 지혜를 오래도록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1월 22일 신종계 명예교수로부터 김극천 교수께서 별세하셨다는 뜻밖의 소식이 전하여 왔다. 신 교수는 불과 수일 전 김 교수와 통화에서 퇴임 후 활동을 보고드렸는데 조선 업계의 발전을 위한 원로의 바람직한 활동 방향을 말씀하셨다며 몹시 아쉬워하였다. 오후 이재욱 교수와 함께 김 선생 빈소를 찾았으며 빈소에서 만난 황성혁 사장 그리고 뒤늦게 부산에서 올라오신 조선계의 원로인 구자영 KTE 회장과 함께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 시간 잠 이루지 못하며 떠올린 갑자기 떠나신 김 선생님과 있었던 수많은 일 들을 회상하였기에 짧은 글로 간추려 소개한다.

김 선생은 함경북도에서 월남하여 조선공학과를 졸업하고 인천조선을 거쳐 대한조선공사에 취업하였다. 대한조선공사에서 근무하며 ICA 자금으로 1958년까지 미국 MIT 조선공학과에서 연수하였다. 미국에서 연수하는 기간 중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선박의 다량건조에 도입하였던 방식인 선체형상을 평면에 쉽게 전개할 수 있는 선형에 관심을 두었다. 이 방법을 국내 어선건조에 적용하면 중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소의 시설 현대화 사업을 담당하며 모교의 시간강사로 근무하던 중 1961년 5월에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김 선생이 1961년 모교의 전임강사로 임용되었을 때에는 선형문제를 김정훈 교수가 담당하시며 수중익선을 개발하는 한편으로 학과의 핵심 실험시설인 선형시험수조를 관장하고 있었다. 김극천 교수는 학과에서 김정훈 교수와 선형문제로 연구 분야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려 하였다. 김 선생은 대한조선공사에 재직하며 정부가 주도하는 저인망 어선건조 사업에서 선박 건조가격의 상승원인이 되지만 어민 처지에서 보면 선박의 추진 효율이 더욱 중요하다고 설득하여 고성능 특수 추진장치인 가변 피치 프로펠러를 어선에 채택하기도 하였으므로 대학부임 후 연구 방향을 선박용 기관과 추진방식으로 바꾸게 되었다.

김 교수는 어선 선형개량에 활용하고자 생각하였던 전개 가능한 선형에 관한 연구 내용을 정리하여 1964년 12월에 창간된 대한조선학회지 제1권 제1호에 발표하였다. 김 교수의 어선에 관한 남다른 관심을 잘 알고 있던 상공부 조선과는 김 교수를 수산업을 위하여 어선을 개량할 적임자로 수산청 어선 과장으로 혁명정부에 추천하였다. 김 교수는 평소의 뜻을 펼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여 제안을 받아들여 어선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어선과장으로 부임하여 미국해군이 2차대전 중 개발한 FRP 선박 건조기술 도입하여 어선 선형을 개량과 합리화를 이루어 우리나라에 FRP 산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김 교수는 1969년 대학으로 복귀하였는데 1976년까지의 발표하신 연구 내용을 보면 한국 전통어선 선형의 조선학적 특성을 조사하는 연구로부터 점차 선체 단면의 유체환경에서의 진동문제로 옮겨가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김 선생의 선형으로부터 추진기관 그리고 유체 역학으로부터 구조 진동에 이르는 폭넓은 학문적 식견과 산업체에서의 경험 그리고 어선 과장으로의 행정 경험을 높이 평가하여 정부는 1977년 한국선박연구소의 소장으로 선임하였다. 김교수는 같은 해 11월에 대한조선학회 제14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1979년 늦은 가을까지 선박연구소 소장직과 대한조선학회 회장직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김 교수가 선박연구소 소장직무와 대한조선학회 회장 직무를 동시에 수행하던 시기에 한일 조선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일본조선학회는 세계 최대의 조선국가인 일본 주도로 선박설계 분야의 국제회의를 창설하였는데 이를 국제적 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국이 두 번째 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김 교수의 노력으로 업계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 1981년 2월 일본조선학회의 요청을 수락할 수 있었다. 대한조선학회는 국제회의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을 세계에 알리는데 김교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회원들은 김교수를 1982년 제16대 대한조선학회 회장으로 재차 선임하였다.

김 교수는 1983년에 International Symposium on Practical Design of Ship and mobile structure : PRADS 83의 집행위원장이 되어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주요 조선국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김극천 교수는 이 행사 이후 PRADS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며 회의를 국제회의로 발전시키는 한편으로 조선분야의 주요 학술회의인 International Towing Tank Conference : ITTC와 International Ship Structure Conference : ISSC의 위원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조선산업과 학문 수준을 세계선진 수준으로 이끄는데 큰 족적을 남기시었다.

김 선생이 1961년 대학에 부임하던 시기 학생으로 처음으로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산업체에 취업하였다가 1968년 학교로 돌아와 선생님과는 28년간을 같은 학과에서 생활하였기에 선생님과의 60년에 걸친 기억을 되살려 짧은 글로 정리하였다. 김 선생께서 조선분야에 남기신 큰 업적을 소개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나 부정확한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하며 김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으려 하였습니다. 이 글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선생님을 회상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