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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에 작은 바다를 만들다.





조선해양공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은 1962년 5월에 종합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 시기에 공과대학은 미네소타 계획으로 ICA 자금을 사용하여 각종 실험 실습 장비를 도입 설치하였다. 특히 조선항공과의 기본시설로 도입한 선박의 성능시험을 할 수 있는 선형시험수조와 항공기의 성능시험을 하는 풍동은 공과대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실험시설이었다.

이중 선형시험수조는 Abkowitz 교수가 MIT에서 사용하던 자신의 실험실보다 조금 큰 길이 26.58m로 설계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선박연구시설이었다. Abkowitz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선박연구시설로 1962년에 준공한 공과대학의 선형시험수조를 국제선형시험수조회의(International Towing Tank Conference : ITTC)의 회원기관으로 추천하였으며 실험실은 현재까지 60년을 국제기구의 회원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 2학년 때 김정훈 교수께서 계산을 도와줄 학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이 수행하고 있는 수치 계산을 도운 일이 있었다. 계산할 숫자를 다이얼을 돌려 설정하고 손으로 핸들을 돌리면 덧셈과 뺄셈 그리고 곱셈과 나눗셈이 되는 신기한 기계식 계산기였다. 계산기 사용이 재미있어 무엇을 계산하는지도 모르고 계산을 도왔는데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에 적분방정식을 풀어 선박의 파도 중 거동을 구하는 계산이라고 알았으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름 방학이 지나며 선형시험 수조에서 김정훈 교수가 수행하던 시험용 모형선 제작과 수중익선 건조 작업에 참여하였으나 진수를 보지 못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였을 때는 김정훈 교수께서 학위취득을 위해 유럽으로 출국하신 상태여서 선형시험 수조와는 인연이 멀어졌다.
대학원에서 탄성학 실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산업체에 취업하였다가 1968년 조선항공공학과는 조선공학과와 항공공학과로 분리하였으며 학과에 조교로 임용 기회가 있어 모교로 돌아왔다. 당시 유급조교는 학교가 지정하는 임용요건에 맞추어 연구 업적을 쌓으면 학과는 전임강사로 승진 채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실험실에 늦도록 남아 광탄성학 실험으로 논문을 작성하였고 선체 구조 부재에 발생하는 응력을 Fourier 해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0년 봄학기에 학과의 전임강사로 임용되었을 때 학과에는 4분의 교수만이 있었으므로 학과 교수들은 학과의 발전을 위하여 독자적인 학문 분야를 개척하라 요청하였다. 학과가 지정하는 분야 중에서 용접 분야를 공부하며 문헌에서 얻은 용접에 관한 일반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1968년 4월에는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이 확정되었는데 1962년부터 시행하던 서울대학교 종합화 5개년 계획이 연건 캠퍼스와 공릉동 캠퍼스 그리고 수원 캠퍼스로 나뉘어 있었으나 의학 캠퍼스와 관악캠퍼스로 집중하는 형태로 변모하였으며 공릉 캠퍼스도 이전에 포함되었다. 마침 1969년 4월부터 황종흘 교수가 콜롬보 계획으로 1년간 동경대학에 체류하였는데, 구상선수 선형을 개발하여 선박의 조파저항을 획기적으로 감축시킨 T. Inui 교수와 교류하며 관악캠퍼스에 새로이 건설할 선형시험수조의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황종흘 교수의 요청을 받은 T. Inui 교수는 동경대학 실험실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여 계획하였으므로 관악캠퍼스에는 길이가 110m인 수조를 계획하였는데 이는 대학의 교육 및 연구용 수조 치수의 기준이 되었다.

공과대학은 캠퍼스 종합화하며 이전하는 대형 실험실들은 관악캠퍼스 설계에 반영하여야 하였다. T. Inui 교수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선형시험수조의 계획은 공릉동 수조의 규모보다 훨씬 컸으므로 캠퍼스 위원회는 단일 실험실로 규모가 과다하다며 난색을 보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조선산업 육성 정책으로 1971년에 인하대학이 대일 청구권자금을 배정받아 길이 75m × 폭 5m × 깊이 3m인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였으며 1973년에는 부산대학도 길이가 87.3m로 늘어난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게 되자 길이 110m × 폭 8m × 깊이 3.5m로 계획된 선형시험수조 계획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공과대학의 실험 실습 장비 이전에 예산 확보가 어려운 사정이었으며 학과의 시설인 선형시험수조 건설에 필요한 예산 확보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공과대학 이전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1973년 연말에 일본대사가 Colombo 계획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던 교수들을 만찬에 초청하였는데 서울대에서는 조경국 교수와 황종흘 교수가 초청받았다. 만찬 자리에서 한국의 주요 대학을 지원하는 선진국의 예를 들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선형시험수조나 풍동과 같은 대형 시설의 이전 지원을 요청하였다. 일본 정부는 공과대학 지원이 일본 계측기 산업의 시장 확대에도 도움이 된다 생각하여 일본 정부 무상원조 자금 (Japanese Government Grant:JGG)을 마련하여 공과대학의 이전에 필요한 기자재를 지원하였다. JGG 자금이 외교적 행정절차를 거쳐 1974년 12월 공과대학에 배정하였고 조선공학과는 배정받은 자금으로 예인 전차와 각종 계측 장비를 계획하고 1975년부터 차례로 조달청 입찰 방식으로 도입하였다.

학과로서는 공학 캠퍼스에 새롭게 건설하는 선형시험수조와 각종 계측 장비를 주문생산 형식으로 발주하여야 하였다. 마침 나는 학위논문 준비를 하는 한편으로 학과의 캠퍼스 이전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1974년 선형시험수조의 예인전차를 발주하였는데 일본의 제조 업체는 설계도서의 승인을 요청했다. 산업체에서 경험한 실무 경험이 있었기에 도면을 시간에 쫓기며 검토하여 순조로운 장비도입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용접과정을 과도적 열탄성학 문제로 이상화하고 그린 함수를 이용하여 이론 해석하였으며 실험장치를 설계 제작하여 실험한 결과를 정리하여 학위청구 논문을 제출하였다. 1975년 9월경 학위논문이 승인되어 1976년 봄 졸업식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구제학위제도에 따른 마지막 공학박사가 되었다.

학위를 취득하며 다소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는가 하였더니 학과는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였다. 대학 입학 후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선형시험수조는 지도교수의 해외 유학으로 주인이 없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학과로서는 미시간 대학의 김훈철 박사 미국해군연구소의 이정묵 박사 등 경험이 있는 연구자가 귀국하여 실험실을 맡아주기를 기대하였으나 학과 이전 계획과 시기가 맞지 않았다. 학과는 이전을 준비하며 핵심시설인 수조를 가장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 선형시험수조를 담당하라 하였다. 이 무렵 대학은 실험실의 건설 타당성을 다시 논의하였는데 정부가 조선공학과를 경제개발 특성화 자금으로 지원하고 있고 선형시험수조는 국제선형시험수조회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회원기관이었으므로 규모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학과 주장을 인정하였다.

1976년 여름 고심 끝에 학과 요청에 따라 실험실을 담당하기로 하고 12월부터 3개월간 콜롬보 계획으로 일본의 선형시험수조를 살피는 기회를 얻었다. 1977년 봄 귀국하여 관악캠퍼스에 건설할 선형시험수조 설계에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반영하였다. 이전계획 초기부터 학과는 JGG 자금을 집중하여 큰 규모의 선형시험수조 건설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국내에서 서울대학에 대한 지원은 장차 일본의 경쟁자를 키우는 일이라는 반발이 일어나 JGG 자금지원을 중단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형시험수조는 배정받은 86,000,000¥으로 1977년까지 3개년에 걸쳐 예인전차와 속도제어 장치 그리고 일부 계측 장비를 3개년에 걸쳐 도입하였으나 공과대학이 관악산으로 이전하기까지 공릉동 캠퍼스에 보관하여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 정부의 JGG 자금지원으로 대부분의 실험실은 완성되었으나 대형실험시설인 조선과의 선형시험 수조와 항공과의 풍동실험실은 미완성 상태에 있었다. JGG 자금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들 시설이 완공되지 못하면 자금지원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설득에 일본 정부는 다시금 해외경제협력자금 (Oversea Economic Cooperation Fund : OECF)을 공과대학에 제공하였다. 조선공학과는 950,000$를 배정받아 선형시험수조에 필요한 각종 계측 장비를 발주하였다. 1979년 관악산에서 선형시험수조 착공을 기대하였으나 공과대학은 설계가 완료되고 예산도 마련된 선형시험수조가 아니라 식당 건설에 예산을 전용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특정 학과의 실험실인 선형시험수조보다더욱 시급하다며 대형강의동(43동) 건설에 전용하였다.

반복된 예산전용 사실이 감사에서 지적받자 본부기획위원회는 선형시험수조의 건설 여부를 최종적으로 심의하였다. 심의에서 수조에 사용하는 물은 교체하지 않고 반복 사용하며 실험실에 독립된 변전시설을 두어 전력 소모를 최소화하고 실험실 단독으로 난방설비를 갖추는 조건에서 건설을 최종 승인하였다. 1981년 봄 비로소 조선공학과의 선형시험수조를 착공하였으며 1983년 연말에 길이가 117m이고 폭이 8m 그리고 물 깊이가 3.5m인 수조를 포함하는 선형시험수조(42)동이 준공되었다. 1968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으로 시작한 선형시험수조 실험실 이전계획에 참여하였던 나에게 15년 동안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은 큰 자산이 되었다.

관악산에 설치한 선형시험수조는 42동 건물 안에 숨겨 있으나 실험실에서 수행한 연구결과는 많은 선박의 설계에 사용되었다. 한 사람이 승선하고 40노트의 속도를 내는 경정 보트로부터 30만톤의 원유를 적재하는 유조선에 이르기까지 설계지원을 하였다. 독도함을 비롯한 해군과 해양경찰청의 각종 함정설계를 지원하였으며 국내에서 사용하는 각종 어선, 화물선, 여객선 등의 설계에도 사용하였다. 튀니지의 세관 감시선이나 이란 국영석유회사의 유조선 설계는 해외선주에 설계도서를 공급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관악산에 세워진 선형시험수조는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성능을 모형으로 확인하여 실선을 탄생시키는 산실로써 대양을 축소한 작은 바다인 셈이다.


[선형시험수조의 건설 과정]
[사진1] 1981년 봄 본부 실무자들과 선형시험수조 위치 선정 기념사진
[사진2] 수조 바닥 콘크리트 타설 작업 현장 사진 1981년 10월
[사진3] 2차연도 공사현장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교수회관이다.(1882년4월)
[사진4] 건물공사 종료단계 (1982년 8월) 현장 사진 1981년 10월
[사진5] 건물 준공 후 수조 내부(1982년 10월)
[사진6] 실험실 내부 예인전차가 모형을 끌고 5 m/s 속도로 달린다.(1983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