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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물의 쾌락원칙과 탈주하는 욕망을 넘어서 - 영화 <반도>(2020)




이수향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강사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20』, 『영화광의 탄생』, 『영화와 관계』 등.


이수향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강사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20] [영화광의 탄생]등.
한국형 좀비물의 활황 시대
‘좀비물’은 역사가 짧은 만큼 장르적 양식화 역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좀비’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조지 로메 로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등의 3부작에서 그 기초가 만들어졌고, 이후 블랙코미디의 사회풍자물이거나 고어나 슬래셔 무비의 공포물로 클리셰들을 쌓았다. 구태의연하거나 한물갔다는 느낌의 좀비물에 다시 후광을 부여한 영화는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로, 좀비들이 시체가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라거나 빠르게 움직인다는 설정은 최근까지도 좀비물에 고루 통용되고 있다. 이후, 마크 포스터 감독의 <월드워 Z>(2013)에서 보여준 상징적인 씬, 즉 이스라엘 성벽을 타고 넘기위해 좀비 떼들이 기어오르는 장면은 좀비들의 엄청난 물량공세로 인한 공포감과 블록버스터적 쾌감을 극대화시켰다. 미국 영화의 하위 장르에 지나지 않았던 좀비물은 초기엔 주로 호러나 스릴러물이었으나 최근에는 액션이나 드라마의 외피가 덧입혀지면서 좀 더 진화중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간간히 영화화되기는 했으나 한국의 좀비영화들의 대중적 인지도는 낮은 편이었다. 우리의 관객들에게 좀비처럼 보이는 존재가 등장해서 각인된 영화는 <곡성>(2016, 나홍진) 정도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죽은 트럭 기사가 살아난 시체처럼 변신해 인물들에게 달려드는데 외양적 특징과 공격적인 모습, 물어뜯으려는 습성이 좀비와 비슷하게 그려진다. 다만, <곡성> 자체가 오컬트 장르라는 점과 악마와 무당의 주술적 행위가 갈등의 근원이라는 점을 볼 때 트럭 기사는 좀비가 아니라 혼령이 조종당한 상태이거나 독버섯을 먹고 괴력이 극대화된 기이한 상태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의 좀비(처럼 보이는 존재)는 좀비물 초창기의 영화적 비전, 즉 부두교의 주술적 행위에서 비롯되며 죽었다가 살아난 시체라는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좀비물로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2016)의 성과는 여러모로 두드러졌다. 한국에서 드문 좀비물이라는 점, 비대중적 장르에 블록버스터급의 물량 공세를 들였다는 점, 개봉 전 칸느영화제에 출품되어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분에서 상영되며 독특한 세일링 포인트를 선점했다는 점,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감독의 첫 상업 장편영화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등이 <부산행>과 관련해서 오고갔던 유의미한 논의들이었다. 결국 <부산행>은 천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좀비물의 대중적 인지도를 올렸고, ‘K-좀비’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내며 해외의 호평도 이끌어냈다. 이후 <창궐>(2018), <킹덤>(네플릭스, 2019), <# 살아있다>(2020) 등의 영화들이 연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나름의 성취를 거두면서 한국형 좀비물의 활황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반도>(2020)는 이러한 ‘K-좀비’의 유행과 더불어 한동안 모이지 못했던 관객들이 가장 성수기인 여름의 텐트폴 영화를 즐기러 극장에 모여들게 할 것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기존에 쌓아올린 좀비물들의 성과를 넘어서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 <부산행>과 <염력>(2017)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 연상호감독의 차기작,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상상해야 하는 현재의 관객들에게 느낄 시의성 등의 측면에서 여러 겹의 부담을 안은 채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행>이라는 원천에 대한 불안
<반도>의 영어제목은 ‘PENINSULA’이고 IMDB(Internet Movie Database)의 공식 명칭으로는 <Train to Busan 2>로 되어 있다. 감독이 여러 인터뷰들에서 언급했듯이 <부산행>과 세계관을 공유하며 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4년이 지난 시점이 <반도>의 시간적 배경인 데서 영어 제목을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반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4년 전, 좀비의 창궐로 전국토가 파괴된 한국에서 가족과 직업을 잃고 탈출한 정석(강동원)은 홍콩에 머물던 중, 2000만 달러가 든 트럭을 반도에서 빼내와 달라는 거래를 제안 받는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반도로 다시 들어가는 무리에 자신의 매형 철민(김도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좀비들이 점령해서 폐허가 된 반도에 잠입한 정석 일행은 트럭 탈취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좀비 떼의 추격을 받고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나타난 준(이레)과 유진(이예원)의 도움으로 정석만이 겨우 탈출해서 그들의 은신처로 피신하는데, 거기에서 소녀들의 엄마인 민정(이정현), 같이 가족을 이루고 있는 전직 군인 김노인(권해효)을 만난다. 한편 정석과 헤어져 트럭에 갇혀있던 철민은 군인으로서의 공적 목적을 모두 잃은 채 야만적인 공격성만이 남은 황중사(김민재)와 631부대원들에게 끌려간다. 한편, 631부대의 지휘관인 서대위(구교환)는 절망적인 상황에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으나 트럭에 실린 위성전화를 통해 탈출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혼자 반도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트럭을 다시 탈취해서 반도를 탈출하려는 정석과 민정 가족, 혼자 살아남으려는 서대위, 정석을 쫓는 황중사와 부대원들 그리고 먹잇감을 찾아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좀비들 까지 모두 중국으로 가는 선박이 대기중인 인천항을 향해 질주한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Train to Busan 2> 라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거의 <부산행>과 관련이 없다. 실제로 IMDB의 해외 유저들의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냉혹한 편인데, 특히 전작과 별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마치 <부산행>의 속편 같은 제목을 달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즉, <부산행>의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여자아이 수안(김수안)과 만삭의 임신부인 성경(정유미)이 부산에서 군인들과 대치하다가 구조되었는데 <반도>에서는 전혀 이들과 관계가 없는 인물들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안과 성경이 구조되면서 미래에 대해 낙관의 기대를 품은 결말로 끝났었는데, 4년 후의 상황은 갑자기 완전히 버려진 땅이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과연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 것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도>의 기획은 헤럴드 블룸의 ‘영향에 대한 불안(Anxiety of influence)’을 상기시킨다. 이는 앞선 세대의 선취된 작품을 읽고 그 장점들을 인정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다음 세대의 작가가 느끼는 불안함의 기제를 의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독해를 통해 앞선 작품에 대한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필요한데, ‘강력한 오독(strong misreading)’을 도리어 적극적인 창조성의 발로로 사용하여 앞선 작품의 영향력에 잠식되는 것을 피하려 하는 것이 다음 세대 창작자의 숙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Train to Busan’이라는 제목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전작인 <부산행>의 인기와 유명세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반도>가 가진 난맥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목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반도>에 부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징후적 독법으로 볼 때 <반도>에서 부산행 열차를 다시 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도>가 <부산행>의 성취에 많은 빚을 진 채 속편격으로 등장했으나 그다지 <부산행>을 의식하지 않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오히려 영리한 선택일 수 있는 것이다. 속편은 전편을 넘어서야만 의미가 있고, 전편의 많은 구성과 설정들을 과감히 삭제하거나 적극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강력한 오독을 통한 새로운 창조라는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의도가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납작한 휴머니티와 사물화 되는 좀비
<부산행>과 <반도>가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전자가 좀비들의 무작위적인 확산이라는 국가적 재난 상황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면, 후자는 재난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행>에서는 빠르게 관절을 꺾으며 다가오는 한국형 좀비의 구현이나 좀비를 피해 달아나야하는 인물의 공포감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반해 <반도>는 좀비물로서의 새로움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대신 <반도>에서는 폐허가 된 반도를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세트장과 VFX(Visual Effects)효과에 공을 들이고, 낮 시간 동안 밤 시간대 내용을 촬영하는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 등을 시도한다. 이러한 기술적 노력들을 통해 정석 일행이 반도에 잠입해 이동하는 동안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괴된 도시의 풍경들이 관객들에게 익숙한 서울의 공간들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만드는 데서 오는 시각적인 이채로움이 있다.
또한 전작에서 물리적 도구나 몸싸움으로 좀비들을 상대하던 것과는 달리 <반도>에서는 현란한 카체이싱이나 총기류를 사용하여 대응하는 것이 더 강조된다. 장장 20분에 육박하는 카체이싱 장면은 감독이 가장 공을 들였다고 설명한 부분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블록버스터로서 관객의 쾌감을 이끌어내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반도>의 가장 뚜렷한 장점으로 설명되는 그러한 특징들은 영화적으로는 가장 왜소하게 만드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즉, 좀비물로서의 새로운 표현이나 기발함 대신 기존의 액션영화의 장르적 양식화에 좀 더 편리하게 기댄 부분이 이 영화를 볼거리 위주의 흔한 킬링타임용 영화 정도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한계는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인간들이 보여주는 휴머니즘이라는 서사적 구조와 인물 설정이 지나치게 납작해서 공감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정석이 매형에 대해 가지는 과도한 부채의식 등을 비롯해 극중 인물들의 심리나 선택이 이해를 얻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몇몇 장면들에서는 갈등을 유발하기 위해 다소 작위적으로 연출되는 상황들도 눈에 띈다. <부산행>에서 지적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주요인물의 죽음 직전에 의도적으로 화면의 흐름을 늦춘다든지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파조의 대사를 늘어놓는다든지 하는 부분들도 다소 아쉽다.
또한 제목으로 제시된 ‘반도’라는 설정의 영화적인 효율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반도 밖으로 좀비가 나가지는 못한다는 점, 역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버려진 나라로 고립되었다는 설정 외엔 인물들의 행동이나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며, 결국 반도만 떠나면 좀비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창작자 입장에서 그저 구성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어진 공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휴머니티에 대해 말하거나 묻고 싶었다면 ‘좀비’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엄청난 수의 좀비 떼들이 좀비물의 스릴을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일 텐데, <반도>에서는 예의 그 카체이싱 장면 등을 통해 좀비들이 너무 쉽게 밀어져 버리거나 차에 부딪쳐 던져져 버리고 시체 더미(dummy)처럼 처리되어버린다. 그 결과 좀비들에 대한 공포감이 유발되는 장면은 현저히 줄어들고 심지어 이러한 장면이 반복되자 점점 영화적 실감보다는 온라인 RPG 게임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게 되기도 한다. 좀비들이 귀찮은 존재 정도로 무감각해지며 그들이 총 한방에 머리가 날아가거나 차바퀴에 깔려 나가떨어지는 장면들은 오히려 무자비한 공포를 유발하는 주체가 좀비가 아니라 인간 쪽에 기운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최근 영화 뿐 아니라 다른 대중문화에서 좀비들이 범람하는 것은 현시대를 사는 인간 주체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 것이다. 인간처럼 보이나 인간이 아닌 존재, 뇌를 파먹힌다는 설정으로 상징되는-사고가 마비된 그로기 상태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주체성을 빼앗긴 인간이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그리고 그러한 좀비화되는 인간의 저열화가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는 설정이 사회적 관계로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파국일지까지도 숙고해볼 만한 지점이다. 다만, 최근의 일반 대중적인 좀비물들-극소수 매니악한 고어물 팬들을 위한 영화가 아닌-에서 우려스러운 점은 좀비에 대한 시각적 재현에 있어 스릴과 공포심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로 자행되는 과도한 표현들이다. 좀비에게 파먹히는 장면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거나 좀비화가 진행되었다는 증거로 가족 간의 인륜마저 저버리는 모습을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영화의 전시적 욕망이 장르적 특성을 탈주해서 과도하게 작동한 경우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사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