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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튀어 오른 고속선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1990년에 일본은 선박 526만GT를 건조하여 수출하였는데 한국은 357만GT를 수출하며 뒤따르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오래도록 세계 조선산업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던 일본은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앞서나가지 않으면 조선산업 경쟁력을 잃게 되리라 걱정하였다. 일본 운수성과 Ship & Ocean 재단은 예비타당성 연구를 거쳐 일본조선연구협회로 하여금 조선-해운 환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새로운 수송시스템을 개발하는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새로운 연구는 화물 1,000ton을 적재하고 거리 500해리의 항로에서 50 knot의 속도로 운항할 수 있는 초고속 운송시스템을 개발하는 연구로 최종 연구단계에 5년간 100억엔을 연구비로 배정하였다.

새로운 고속상선을 Techno–Super-Liner:TSL 이라 하였는데 이 고속상선이 개발된다면 항공기가 적재할 수 있는 한계 중량 이상을 적재하고 항공기가 경제성을 가질 수 없는 단거리 항로에서 운항하므로 항공수송과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또 이 선박은 새로운 도로망을 건설하지 않고 해면을 고속도로처럼 이용함으로 단거리 연안항로 또는 도서 지역에 취역할 수 있어서 추가의 도로 건설 없이 육상 운송수단을 능가하는 새로운 수송 수단이 되리라 판단하여 기술을 선점하려 한 연구과제이었다. 연안항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통망이 정비되어야 하므로 거점 항만과 하역시설의 개선 그리고 육상운송 도로망의 정비가 필요하지만, 파급효과가 매우 큰 연구이었다.

우리나라의 소형 고속선 설계는 1970년대 초반에 해양경찰청 경비함, KIST Boat로 불리는 어업지도선, 방위성금으로 건조한 학생호 등의 설계가 학과 교수들의 참여로 성공적으로 설계되었으며 국외시설에서 실험 검증하여 40 knot 이상의 최고 속력을 달성하였다. 서울대학교는 선형시험수조를 1983년 완공하였고 1984년 튀니지 세관이 사용할 고속감시선의 저항 시험을 하였다. 이 선박은 한국해사기술이 설계한 활주형 고속선으로 길이가 20.3m이고 최대속도는 32knot 이었다. 학교 실험시설의 측정 한계에서 실험하였는데 1986년경 이 고속감시선이 튀니지 세관에 인도되었으며 이 감시선을 건조한 조선소는 같은 선박을 주변 국가에도 공급하는 기회를 잡았다.

1990년대에 들면서 학과 실험실에서는 한국해사기술의 요청으로 제주도청이 발주한 어로 지도선, 서울시가 발주한 비상시 한강 도강에 사용할 고속선박, 해양경찰청의 60ton급 경비함 등의 저항성능을 추정하며 여러 종류의 고속선에 대한 저항 시험을 하였었다. 1996년 연말에는 해양경찰이 발주한 35knot급 고속선박의 저항을 추정하는 시험을 하였는데 선박의 길이가 18m를 조금 넘는 활주형 선박으로 총톤수 25ton 정도이었다. 튜니지 세관 감시선보다 조금 작고 속도는 조금 빠른 선박이었는데 신뢰할 수 있는 실험 결과를 얻으려면 모형선의 크기를 키우고 실험 속도를 높여야 하였으나 시설의 제약을 넘어서지 못하여 외부기관에서 검증하여야 하였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알루미늄 프로파일로 가볍게 제작하여 시험수조에 설치하여 2010년까지 사용한 고속 예인전차

고속선 연구에 참여하는 동안 활주형 선박의 저항성능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였다. 선박의 속도가 느릴 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속도가 높아지면 저항이 속도의 기하급수로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40knot 속도를 내는 소형 고속 함정에서는 선체 중량을 줄이기 위하여 선체구조를 알루미늄으로 제작하여 배수 중량을 줄여야만 선박의 저항을 줄일 수 있었다. 선박의 배수량이 결정된 상태에서는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흔히 쓰이는 선박용 엔진 거치 공간을 선체 내부에 마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장을 탑재할 수 있는 공간확보가 어려워지고 심할 때는 연료를 적재할 공간마저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일본이 대형 국책연구과제로 시행하는 Techno–Super-Liner:TSL 개발사업은 순항 속도를 50knot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40knot 이상의 고속선 건조실적이 있으므로 우리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학교 실험시설에서 50knot 선박의 저항성능을 실험적으로 추정하려면 모형선이 지나치게 작아져 계측 값의 정도가 떨어지고 모형선의 크기를 키우면 예인전차의 속도를 높여야만 하였다. 기존의 길이가 정해져 있는 실험시설에서 예인전차의 속도를 높이려면 급히 가속할 때 요구되는 동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모터 출력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동력을 높여 급가속하면 전차가 가속하지 못하고 차륜이 레일 위에서 미끄러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이 계획한 과제가 성공하면 조선기술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항공운송과 육상운송을 보완하는 새로운 해상운송시스템이 될 것이어서 실험실을 책임진 나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과제이었다. 자연스럽게 연구과제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며 우리나라에서도 고속선실험에 관심을 두는 연구자들이 나타났다. 실험실에서 초고속선박 설계 개발에 관심을 두었으나 시설제약으로 실험적 연구가 어려워 고심하던 차에 인하대학이 고속으로 모형선을 예인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하여왔다. 개인적으로 몹시 아쉽게 생각하던 문제를 풀 기회가 주어졌으므로 새로운 고속 예인전차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인하대학의 선형 수조는 일반상선 개발에 필요한 실험 목적으로 예인 전차가 최대속도 2.7m/s를 낼 수 있도록 건설한 수조로 길이가 75m이었다. 예인 수조에는 파도 중 실험에 쓰이는 조파기와 소파기 그리고 예인전차가 설치되어 있어서 실제로 예인전차는 60m를 조금 넘는 구간을 주행에 사용할 수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길이가 제한된 조건에서 1s 정도의 계측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최고 속도를 얻는 것을 설계목표로 삼았다. 차륜이 레일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와이어로프로 예인전차를 끌어당기는 방법을 채택하고 예인전차를 최소 중량으로 설계하여 1999년 인하대학에 설치하였으며 시험 운전하여 20m/s 속도를 1s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실험실에서 개발한 경정보트 시험선으로 미사리 경정 경기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경정 경기용 모터보트로 전시되어 있다.

경기 중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경정 보트 선체가 완전히 공중에 떠오른 상태.
고속전차를 최고 속도 20m/s에 도달하는데 만 관심을 두고 설계하며 어렵게 목표에 성능을 내는 고속전차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가속할 때 나타나는 큰 관성력과 고속 상태에서 나타나는 큰 저항에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측정 장비를 별도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서울대학에는 예인전차의 최대속도를 15m/s로 줄이고 정속 상태가 5s 이상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조건을 바꾸어 설계하였다. 2000년 겨울 고속전차를 실험실에 설치하고 시험 운전하였는데 최고 속도는 낮아졌으나 계측기 탑재 능력이 향상되어 실질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고속전차가 얻어져 2001년 대한조선학회 춘계행사에서 개발 결과를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실험실에서는 경정준비단이 1999년부터 경정사업에서 사용할 경정 경기용 고속선 국산화에 매달려 있었으므로 고속전차를 설치하며 바로 고속정의 성능시험에 활용하였다. 경정운영본부는 2001년 7월 경정 국산 모터보트 개발계획을 확정하고 발주하였는데 ㈜어드밴스드 마린테크가 실험실에서 개발한 경정보트를 건조하여 2002년 2월 경정선수 훈련용으로 납품할 수 있었다. 2002년 6월 18일 경정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실제 경정 모터보트가 경기 중 순간 속도 42knot에서 수면 밖으로 완전히 노출되며 배가 공기 중에 떠오르기도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결과는 경정 보트의 길이를 2.95m로부터 4.2m 정도로 키워주면 50knot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결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50knot의 속도를 고속선박을 건조하였을 때 특수한 고속선을 사용할 선주를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이 TSL 계획으로 115억¥을 들여 건조하였으나 한 번도 정식취항하지 못하고 폐선한 차량운반선 OGASAWARA호

이 시점에 일본은 새로운 수송 수단이 되리라 50knot 속도를 목표로 꿈을 담아 추진한 TSL 사업은 결실을 보아 시험선을 건조하기까지 하였으나 경제성을 가진 항로를 개설하지 못하여 사업화를 포기하였다. 모처럼 일본의 연구사업에 자극받아 달려들었던 연구과제이었는데 갑자기 쫓아가던 경쟁대상이 일순간에 없어진 것이었다. 나 또한 정년까지 남은 기간이 2년 정도에 불과하여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중단하였는데 정년 후 16년을 지난 요즈음도 출퇴근 길 전철 안에서 고속선 시험을 궁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