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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동 중력식 선형시험수조의 회상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1950년 연말을 앞두고, 한국전쟁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며 유엔군이 후퇴할 때 우리 가족도 피난 길에 올라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인천에서 기독교 단체가 주선한 일본 상선학교의 실습선을 타고 피난했는데 돛을 사용하는 고풍스러운 선박이어서 세계대전 중 폭격대상에서 벗어나 살아남은 선박이었다. 많은 피난민을 태우고 북한군이 연안에 부설한 기뢰 등을 피하며 돛 대신 보조 기관인 소형디젤엔진만으로 느린 속도로 항해해야 했으므로 배에서 성탄절과 새해를 지내야만 했다. 피난선에서 이름이 ‘하라다’라던 일본인 선원이 수많은 피난민 중 초등학생인 나를 귀엽게 보아 배 안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이때의 경험과 후일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며 부산항에 드나드는 함선들과 스웨덴의 병원선을 바라보던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에서는 조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단기 4292년에 공과대학 조선항공과에 입학하였는데 학번으로 201356을 부여받았다. 학번의 첫 숫자 2는 단기 연대의 마지막 숫자를 뜻하며 01은 공과대학 그리고 마지막 356은 학생 순번이라 하였다. 대학의 번호는 단과대학 명칭의 가나다순으로 가장 앞선 공과대학을 01로 정하고 학번은 학과명칭 가나다순으로 학번을 부여하였는데 학과 창설 당시 명칭이 항공조선과이어서 나는 그해 입학생 중 마지막에 가까운 356번째 학생으로 학번을 부여받았다. 2학년이 되던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혼란기에 있을 때 김정훈 교수가 육군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개발하던 대 간첩선 작전용 수중익선 건조에 작업원으로 방과 후 시간을 보내며 조선 분야의 선구자가 된 듯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던 해 5월, 군에 입대하며 수중익선 진수를 보지 못했는데 진수하며 크레인 사고로 수중익이 손상되어 기대하던 성능을 내지 못하였음을 듣고 몹시 아쉽게 생각하였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미국의 해외개발본부(FOA: 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는 1954년부터 Minnesota 계획으로 서울대를 지원하였다. 조선항공과 교수들은 조선공학과가 있는 MIT에서 조선공학 교육을 도입하였으며, MIT의 Evans 교수가 조선공학과에 3개월간 고문으로 체류하며 교육 연구시설 계획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학과 실험실은 MIT 시설을 복제한 듯 닮은 실험시설이 되었다. FOA 원조 계획이 국제협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Administration) 사업으로 전환되어 종결되던 해인 1962년 6월에 공릉동 캠퍼스 5호관에 MIT 시설을 복제한 길이가 120ft이고 폭이 10ft 그리고 깊이가 5ft인 중력식 선형시험 수조가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김정훈 교수의 연구실에 복귀하여 선생님의 연구를 돕는 학생이 되었다.

실험실은 MIT의 중력식 시험수조를 담당하던 Abkowitz 교수가 설계하였고 김정훈 교수가 건설과정을 감리하였으며 전자공학과의 최계근 교수의 지원으로 성능검증이 이루어졌다. 실험실이 완공된 초기에 김재근 교수는 소형 어선의 모형시험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여 인도-태평양 어선 회의에서 발표하였는데, 이는 조선 분야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도 가장 빠른 국제회의 논문 발표에 속한다. 그리고 김정훈 교수는 Abkowitz 교수의 도움을 받아 학과의 중력식 시험수조를 ITTC에 회원기관으로 가입신청을 하였으며 1963년 London에서 개최된 제10차 ITTC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선박 연구기관으로 가입이 승인되었다. 국제기구에서 승인받은 실험실에서 선배들과 함께 대한조선공사가 상공부의 지원으로 건조할 4000톤급 석탄 운반선의 모형선을 만들며 조선 기술자가 다 되었다고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1963년 여름까지는 김정훈 교수가 구하고 있던 부유체 운동을 해석하는 적분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32×32 행렬식의 수치 연산을 도우며 과학자가 된 듯이 착각하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지나도록 해를 구하지 못하였으나 Hamburg 대학은 연구내용에 관심을 보여 김정훈 교수는 그해 가을 독일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나는 수조에서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냈으나 김정훈 교수의 출국으로 1964년 대학원에서는 임상전 교수 연구실에서 새롭게 선체구조를 수학하였다. 대학원 학생으로 대한조선학회에 가입하고는 학회지 창간을 준비하던 황종흘 교수와 임상전 교수를 돕는 학회간사로 활동하였다. 1965년 학회는 상공부의 표준형선 설계사업을 수행하며 선형시험수조에서 설계 선박 7종의 저항성능을 확인하는 모형시험을 중력식 선형시험수조에서 수행하였다.

일본은 한국전쟁 중 조선산업을 재건하고 선박의 대형화를 이끌며 세계 선두에 나서 있었으며 학문적으로도 인정받기 위해 1966년 제10차 ITTC를 유치하여 동경에서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김재근 교수는 깊은 수역에 한정하여 해석한 동경대학 Inui 교수의 연구를 확장하여 구상선수 선형을 얕은 수심에서도 저항 감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김재근 교수는 서해안과 같은 지역에서 운항하는 선박의 구상선수가 미치는 저항감소 효과를 모형실험으로 조사하여 정리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서울대학에서 1968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조선 분야 최초의 박사가 되었다. 공릉동의 중력식 수조는 1962년에 대학에 설치된 작은 실험실이었으나 설립과 동시 국제기구에 회원이 되었으며 국가의 주요사업인 표준형선 설계사업을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업적을 내는 핵심시설이 된 셈이다.

나는 구조연구실에서 광탄성 실험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였으며 석사과정을 마치고 산업체에 취업하였다가 1967년 조선공학과와 항공공학과로 분리하며 마련된 조교 자리에 응모하여 1968년 가을 임용되었다. 당시 조교는 연구 업적을 쌓으면 심사를 거쳐 전임강사로 임용되는 길이 열려있었으므로 학과의 교수들은 내가 학과의 일원이 되어 담당할 역할을 논의하였다. 임상전 교수의 실험실 조교로 근무하며 선체구조 관련 실험논문을 준비하였는데 황종흘 교수가 학과의 교수라면 이론해석에도 밝아야 한다고 지적하여 다음 해에는 보강재 내부의 응력을 Fourier 해석법으로 해석하는 논문을 준비하였다. 이때 황종흘 교수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라면 독자적인 학문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이끌어야 하니 전임강사로 임용되면 조선산업의 핵심분야 하나를 개척하여야 한다는 학과 교수들의 뜻을 전해왔다.

1967년 여름 김정훈 교수가 해외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하며 귀국을 포기하고 사임하자 학과의 핵심시설인 선형시험수조는 담당 교수가 없는 상태였다. 학사과정에서 선체구조 이론을 담당하였던 황종흘 교수는 전공을 유체역학 분야로 바꾸어 선박의 운동과 조종이론을 개척할 계획이었으며 Colombo 계획의 지원으로 1969년부터 1년간 동경대학에 방문 교수로 체류하였다. 이때 황교수는 선형시험수조를 조선공학과의 핵심분야인 저항추진 분야의 학자가 귀국하여 맡아야만 학과가 인정될 수 있고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훈철, 이정묵, 정진수, 배광준 등의 석학 중 누군가 맡게 될 것이라 예단하였다. 나는 197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며 여러 길을 모색하다 선박건조 기술의 핵심인 용접기술 분야에 뜻을 두게 되었으며 1971년부터 김재근 교수와 함께 소형고속 경비정 건조에 사용할 알루미늄 소재의 용접문제부터 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인하대학은 대일 청구권자금의 지원으로 일본 동경대학 수조와 동등한 규모의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였으며 뒤를 이어 부산대학도 조금 더 큰 규모의 선형시험수조를 건설하였다. 두 수조 모두 예인 전차 방식의 현대적 시험수조로서 공릉동 캠퍼스의 중력식 선형시험수조의 3배 정도 규모의 수조이었다. 서울대학의 종합화 계획으로 관악캠퍼스로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일본에 체류하던 황종흘 교수는 Inui 교수의 조언을 받아 관악캠퍼스에 설치할 새로운 수조의 기본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항공공학과의 조경국 교수와 함께 일본대사에 공과대학의 관악캠퍼스 이전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며 1974년 일본 정부는 무상원조자금(Japanese Government Grant :JGG)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나는 구제학위 제도로 학위 청구 논문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황종흘 교수가 담당하고 있던 선형시험수조 계획을 지원하고 있었다.

공과대학의 관악캠퍼스로 이전계획이 확정되며 수조의 계획이 확정되고 계측 장비의 확보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수조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는 상태였다. 학과 교수들의 노력으로 KAIST에 재직하고 있던 김훈철 박사가 서울대 임용서류를 준비하다 대전에 대형 선형시험수조 건설이 확정되며 임용을 포기하였다. 이정묵 박사는 미국 해군연구처 연구조정관의 길을 택하였으며 정진수 박사는 미국에서 저명 학술지 발행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당시 선박 유체역학 분야에 유한요소 해석법을 도입하였던 배광준 교수는 미국 해군연구소에서 연구와 저술사업에 헌신하는 길을 택하였다. 결국, 학과의 핵심시설을 담당할 적임자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계획이 진행됐고, 뜻하지 않게 나는 실험실 계획 전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교수가 되었다. 그로 인해 학과는 용접으로 학위를 취득한 나에게 수조 관리를 책임져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뜻하지 않게 선형시험수조에서 실험을 담당하는 실험 유체역학으로 길을 다시 바꾸어야 했다. Colombo plan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수조실험 분야의 연구 동향을 살피는 한편으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새로운 선형시험수조 계획과 건설에 이르는 일체의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학과는 관악캠퍼스로 학과의 이전 업무를 처리하려면 학과업무를 총괄하는 것이 유리하다며 나를 학과장으로 지명하였다. 공교롭게도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애정을 가지고 드나들던 실험실을 우여곡절 끝에 맡았으나 실험실은 김정훈 교수가 1963년 출국한 이후 관리자가 없어 기능이 정지되었다. 1977년 공을 들여 기능을 회복하였으나 이전을 앞두고 있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1979년 캠퍼스 이전하며 시설을 폐기하는 역할을 담당하여야만 하였으니 이제 나는 공릉동 캠퍼스의 중력식 선형시험수조를 회상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