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향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카이(新海)의 세카이계(セカイ系)
일본 애니메이션(통칭 ‘アニメ’ 혹은 ‘anime’)은 일본 서브컬쳐계의 핵심 콘텐츠이다. 대중문화 장르 중 영화와 드라마에서 한국에 주도권을 뺏기고 있다는 위기감을 갖는 일본에서 한국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자신감을 갖는 분야이기도 하다. 한국의 관객들도 윗세대들에게는 지브리사의 작품들이나 <공각기동대>류의 아니메를 보고 자라온 기억이 있을테고, 어린 세대들에게는 ‘짱구’, ‘포켓몬’에서 ‘탄지로(<귀멸의 칼날>)’로 이어지는 캐릭터들의 인기가 광범위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지브리 이후, 즉 포스트 지브리 시대의 거장이 될 만한 감독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우려가 많았는데,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 아이>의 호소다 마모루와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정도가 거론되고 있다.
최근 몇 작품에서 다소 주춤한 호소다 마모루와 달리 점점 더 흥행과 비평 면에서 고르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다. 신카이 마코토(新津誠)는 아름답고 세밀한 배경 묘사와 학원물 느낌의 인물 작화를 어우러지게 하여, ‘세카이계’(セカイ系.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의 문제가, '세계의 위기', '이 세계의 마지막'과 같은 추상적이면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는 스토리를 묘사하는 작품군)의 세계관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이 주를 이루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의 세카이계 작품들에 대한 평가, 즉 비사회적이고 비정치적인 성격으로 현실을 외면한 사춘기 소년 소녀 감성의 ‘라이트ライトノベル(Light Novel)’한 유폐적 세계관에 불과하다는 비판들은 신카이 마코토에 이르면, ‘두 사람만의 세계’가 ‘대재난’이라는 일본의 실제 현실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지브리 이후, 즉 포스트 지브리 시대의 거장이 될 만한 감독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우려가 많았는데, <시간을 달리는 소녀>, <늑대 아이>의 호소다 마모루와 <초속 5센티미터>,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정도가 거론되고 있다.
최근 몇 작품에서 다소 주춤한 호소다 마모루와 달리 점점 더 흥행과 비평 면에서 고르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다. 신카이 마코토(新津誠)는 아름답고 세밀한 배경 묘사와 학원물 느낌의 인물 작화를 어우러지게 하여, ‘세카이계’(セカイ系.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의 문제가, '세계의 위기', '이 세계의 마지막'과 같은 추상적이면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는 스토리를 묘사하는 작품군)의 세계관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이 주를 이루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기존의 세카이계 작품들에 대한 평가, 즉 비사회적이고 비정치적인 성격으로 현실을 외면한 사춘기 소년 소녀 감성의 ‘라이트ライトノベル(Light Novel)’한 유폐적 세계관에 불과하다는 비판들은 신카이 마코토에 이르면, ‘두 사람만의 세계’가 ‘대재난’이라는 일본의 실제 현실 상황과 맞물리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위 감독이 여러 경로를 통해 말했듯이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東日本大震災)’은 감독의 재난 3연작인 <너의 이름은>(2016, 일본 개봉 기준), <날씨의 아이>(2019), <스즈메의 문단속>(2022)의 내면으로 작용한다. 두 사람만의 자족적 세계가 불가항력의 재난, 즉 자연 재해라는 외부로부터의 침탈에 의해 흔들리게 된다는 설정을 고르게 갖고 있는 영화들이다. <너의 이름은>이 과거로부터의 신호를 받아 혜성충돌에서 희생된 소녀를 살려내기 위해 남녀의 몸을 바꾸는 타임리프(Timeleap)물이라면, <날씨의 아이>는 폭우와 홍수라는 재앙을 겪어야 하는 세계를 구해낼 것이냐, ‘맑음 여자’인 연인의 희생을 용인할 것이냐의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과거의 재앙(3.11)과 이어질 재앙의 연속성 상에서 이를 막아보려는 남녀가 대의와 사적 애정 모두를 지켜내려는 고군분투를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감성적인 미장센의 작화
<스즈메의 문단속>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규슈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17살 소녀 스즈메는 어느 날 등굣길에 잘생긴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근처에 ‘폐허’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 청년은 문을 찾아 여행 중인 ‘소타’였는데 스즈메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려 뒤를 쫓았다가 산속 폐허에서 물 위에 떠 있는 낡은 문을 발견한다. ‘스즈메’는 그 문을 열자 나타난 기이한 풍경에 놀라고, 옆에 있던 고양이 석상을 무심코 뽑아드는데 그것은 실제로 움직이는 고양이로 바뀌어 사라져 버린다, 이후 마을에 재난의 위기가 닥쳐온다. 스즈메는 급박한 상황에서 소타가 문을 닫는 것을 돕는데, 소타는 자신을 가문 대대로 ‘토지시’라고 소개하며 문을 닫아 일본 열도 아래에 있는 재앙의 힘, ‘미미즈’를 봉인해 재난을 막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후, 사라졌던 고양이 ‘다이진’이 나타나 ‘소타’를 나무 의자로 바꿔 버리고, 일본 각지의 폐허에 재난을 발생시키는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도는 여정에 나선다. 소타와 필사적으로 문을 닫아가던 중 스즈메는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늘 꿈 속에서 보곤 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문,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관객을 유인하는 것은 특유의 미장센이 강력하게 환기하는 감성적인 부분이다.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영화에는 늘 그만의 표지를 드러내는 미장센들이 있다. 만화 작화인지 실제 영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된 배경들이다. 창으로 들어와 사물을 비추는 아침 햇살, 빈 교실에 그늘을 드리우는 늦은 오후의 햇빛, 보도 블록에 떨어져 튀어오르는 빗방울들, 도시의 뒷골목의 바닥에 널부러진 캔이나 쓰레기들의 음습한 잿빛 풍경까지 실제의 사진처럼 그려지면서도 만화 특유의 명암 대비와 분위기가 더해져 감성이 극대화되어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CG 작업에 대해 할리우드에서는 캐릭터를 포함하는 전부를 3D로 작성하는 풀3D CG가 주류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내려온 셀 아니메에 가까운 그림(2차원, 2D)을 디지털화해서 거기에 3D에 의한 배경이나 메카닉 또는 에펙트(빛이나 폭발, 비나 눈 등의 자연현상)를 합성하는 기법을 취하고 있어 2D 캐릭터 그림과 3D 소재를 위화감 없이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하는 기술이 특이하게 발달했다고 본다.1) 또 일본 아니메에서는 현재도 아날로그적인 손 감각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CG의 이론이나 수단으로서의 기능 자체보다 그 기능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CG 기술자의 테크닉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첨단의 기술과 장르 고유의 색깔이 더해져서 현재 신카이 감독의 작품 세계가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작화의 기술력만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해내는 감성과 분위기가 결합되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관객을 유인하는 것은 특유의 미장센이 강력하게 환기하는 감성적인 부분이다. 신카이마코토 감독의 영화에는 늘 그만의 표지를 드러내는 미장센들이 있다. 만화 작화인지 실제 영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된 배경들이다. 창으로 들어와 사물을 비추는 아침 햇살, 빈 교실에 그늘을 드리우는 늦은 오후의 햇빛, 보도 블록에 떨어져 튀어오르는 빗방울들, 도시의 뒷골목의 바닥에 널부러진 캔이나 쓰레기들의 음습한 잿빛 풍경까지 실제의 사진처럼 그려지면서도 만화 특유의 명암 대비와 분위기가 더해져 감성이 극대화되어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CG 작업에 대해 할리우드에서는 캐릭터를 포함하는 전부를 3D로 작성하는 풀3D CG가 주류가 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내려온 셀 아니메에 가까운 그림(2차원, 2D)을 디지털화해서 거기에 3D에 의한 배경이나 메카닉 또는 에펙트(빛이나 폭발, 비나 눈 등의 자연현상)를 합성하는 기법을 취하고 있어 2D 캐릭터 그림과 3D 소재를 위화감 없이 하나의 화면으로 구성하는 기술이 특이하게 발달했다고 본다.1) 또 일본 아니메에서는 현재도 아날로그적인 손 감각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CG의 이론이나 수단으로서의 기능 자체보다 그 기능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CG 기술자의 테크닉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첨단의 기술과 장르 고유의 색깔이 더해져서 현재 신카이 감독의 작품 세계가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작화의 기술력만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해내는 감성과 분위기가 결합되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 쓰가타 노부유키, 『일본 아니메 무엇이 대단한가』, 고혜정·유양근 역, 박영사, 2018, 16-17면.
두 개의 세계와 ‘기억’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그려지는 세계는 두 개로 분기된다. 큐슈에서 헌신적인 이모와 함께 사는 고교생, 스즈메의 일상적 현실과 거대한 재앙의 힘 미미즈와 그것을 막는 힘이 길항하는 현실 이면의 세계이다. 또 미미즈가 있는 지하 세계는 죽음 이후의 사람들이 과거의 기억들로 그리는 ‘저 세상’과 중첩된다. 스즈메는 우연히 ‘문’을 열면서 자신이 모르고 있던 대재앙의 기운을 알게 되고, 또 문 너머 ‘기억’의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은 재난 이후의 삶이 평범한 하루 일과에 가려져 모두 잊은 것처럼 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그 고통이 끝내지 못한 애도로 남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큐슈에서 고베로, 다시 도쿄에서 도호쿠로 이어지는 스즈메와 소타의 여정은 재앙을 막는 과정이자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스즈메가 과거를 직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두 개의 세계를 매개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이 사라진 쓸쓸한 장소’인 ‘폐허’이다. 큐슈의 쇠락한 온천거리, 에히메의 산사태로 폐허가 된 중학교, 도쿠시마의 폐장한 놀이공원, 도쿄 황궁의 수로, 센다이 이와테의 버려진 옛집에 각각 존재하는 문들은 일본의 대지진의 역사를 가진 공간들을 배경으로 한다. 재난이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 쓸쓸한 폐허의 자리에 ‘문’은 존재한다.
소타와 스즈메가 문을 닫으려 할 때, 거대한 재앙의 힘에 맞서기 위해 물리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그 공간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스즈메에게 기억은 엄마의 유품인 다리가 한 개 부러진 유아용 의자로 상징된다. 의자는 오래되어 낡고 버려질 만도 하나 시간과 기억이 적층되었기에 소중해진 물건이다. 소타가 의자로 변하는 것은 스즈메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의 매개체여야 세계를 뒤덮을 재앙의 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과거의 기억을 벗어나 미래의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가능성을 소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타는 문을 닫으려는 스즈메에게 “눈을 감고 여기 있었던 사람들, 감정을 생각하며 목소리를 듣는 거야”라고 말하고, 과거에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들이 회색빛으로 상기된다. 이는 폐허가 된 장소에도 여전히 지나간 사람들의 기억과 온기가 남아있으며 그곳에서 다시 현실을 타개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은 재난 이후의 삶이 평범한 하루 일과에 가려져 모두 잊은 것처럼 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그 고통이 끝내지 못한 애도로 남아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큐슈에서 고베로, 다시 도쿄에서 도호쿠로 이어지는 스즈메와 소타의 여정은 재앙을 막는 과정이자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스즈메가 과거를 직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두 개의 세계를 매개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이 사라진 쓸쓸한 장소’인 ‘폐허’이다. 큐슈의 쇠락한 온천거리, 에히메의 산사태로 폐허가 된 중학교, 도쿠시마의 폐장한 놀이공원, 도쿄 황궁의 수로, 센다이 이와테의 버려진 옛집에 각각 존재하는 문들은 일본의 대지진의 역사를 가진 공간들을 배경으로 한다. 재난이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 쓸쓸한 폐허의 자리에 ‘문’은 존재한다.
소타와 스즈메가 문을 닫으려 할 때, 거대한 재앙의 힘에 맞서기 위해 물리력을 증폭시키는 것은 그 공간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기억’이다. 스즈메에게 기억은 엄마의 유품인 다리가 한 개 부러진 유아용 의자로 상징된다. 의자는 오래되어 낡고 버려질 만도 하나 시간과 기억이 적층되었기에 소중해진 물건이다. 소타가 의자로 변하는 것은 스즈메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의 매개체여야 세계를 뒤덮을 재앙의 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과거의 기억을 벗어나 미래의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가능성을 소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소타는 문을 닫으려는 스즈메에게 “눈을 감고 여기 있었던 사람들, 감정을 생각하며 목소리를 듣는 거야”라고 말하고, 과거에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들이 회색빛으로 상기된다. 이는 폐허가 된 장소에도 여전히 지나간 사람들의 기억과 온기가 남아있으며 그곳에서 다시 현실을 타개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行ってらっしゃい다녀오세요”와 “行ってきます다녀오겠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상적 삶의 지속 문제를 묻고 있다. 평온한 하루에 별일 없는 듯 무심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에게 발작적인 경고음처럼 울리는 것이 바로 지진재난문자이다. 재난 문자는 사태의 발생을 알리기는 하지만 이를 예방하지는 못한다. 평화로운 도시 위에 촉수처럼 미미즈라는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도 일상적 차원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사후적인 알람에 불과한 소음으로만 감지할 뿐인 것이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대해 인간이 지닌 무력함과 한계를 보여준다. 다만, 감독은 이를 비관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폐허의 자리에 절망만 놓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폐허의 문 앞에서 지나간 기억들이 상기되면서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의 인사말과 대답들이 이어진다. “다녀오세요”, “다녀올게”, “다녀와”, “다녀왔어”,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로 무수히 교차되는 말들은 갔다가 돌아왔다는 ‘다다이마(ただいま)’의 평범한 일상적 힘이 결국 그 자리에 남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거대 악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이 엄청난 영웅적 결기나 파워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의지의 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전작 <날씨의 아이>와 연결되는데, 영웅의 공적 임무와 한 인간으로서의 사적 생존 욕망 사이에서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리는 게 당연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소타로서는 대재앙을 막아 그 자신이 요석이 되어야한다는 토지시로서의 임무와 살아있고 싶고 스즈메와 함께 하고 싶다는 사적 욕망이 부딪힌다. 스즈메 역시 소타의 공적 임무를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기반에 “소타씨가 없는 세상이 저는 두려워요” 라고 외치며, 대의에 소거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즈메의 여정 동안 선의로 도움을 준 타마키 이모, 치카와 루미, 세리자와의 역할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적은 힘들의 합이 지니는 강력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폐허의 문 앞에서 지나간 기억들이 상기되면서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의 인사말과 대답들이 이어진다. “다녀오세요”, “다녀올게”, “다녀와”, “다녀왔어”,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로 무수히 교차되는 말들은 갔다가 돌아왔다는 ‘다다이마(ただいま)’의 평범한 일상적 힘이 결국 그 자리에 남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거대 악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이 엄청난 영웅적 결기나 파워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평범한 개인들의 의지의 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전작 <날씨의 아이>와 연결되는데, 영웅의 공적 임무와 한 인간으로서의 사적 생존 욕망 사이에서 한 명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리는 게 당연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소타로서는 대재앙을 막아 그 자신이 요석이 되어야한다는 토지시로서의 임무와 살아있고 싶고 스즈메와 함께 하고 싶다는 사적 욕망이 부딪힌다. 스즈메 역시 소타의 공적 임무를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기반에 “소타씨가 없는 세상이 저는 두려워요” 라고 외치며, 대의에 소거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즈메의 여정 동안 선의로 도움을 준 타마키 이모, 치카와 루미, 세리자와의 역할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적은 힘들의 합이 지니는 강력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돌려드리옵니다”라는 설정의 문제
애니메이션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미학적 쾌감은 부족한 사실성을 무한한 가상성으로 채워 현실에서 이뤄지기 어려운 일을 손쉽게 이뤄낸다는 점에 있다. 이는 양날의 검처럼 작용해 때로는 작품의 흥미와 이채로움을 극대화해서 관객들의 즐거움을 배가시키지만, 때로는 허상에 불과하다거나 현실을 도외시한 채 핍진하게 이루어져야 할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신카이 감독의 재난 3부작은 일본으로서는 세기적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엄청난 자연재해의 참사와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위무하기 위한 의도를 일정하게 보여준다. 참사와 재난이 일본만의 것이 아니며, 작품에서 묘사된 예의 그 재난 문자가 코로나 당시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음을 상기할 때 이는 보편적인 주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중한 건 이미 오래 전에 받은 거였어”라는 평범성의 진리가 제시되기 위해 이 작품이 재난의 원인으로 구축한 것은 ‘신’적인 세계이다. 요컨대 일본 특유의 다신적 성격을 지닌 신도(神道)로 설명되는 가치관이 사태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진 재해를 일으키는 것도, 이를 막는 것도 ‘신’들의 섭리이다. 그래서 문을 닫으면서 “아뢰옵기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 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오래도록 배령받은 산과 하천이여, 경외하고 경외하오며 삼가 돌려드립니다.”를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덕은 신의 특징이니까.”라는 대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재난 3부작에 고르게 투영된 것으로 이 작품들에서는 종종 인물들에게, 특히 현대를 사는 어린 여성 인물에게 샤머니즘적인 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작품 외적 측면에서 당면한 동일본대지진의 원인과 문제 해결, 사후 처리를 도외시한 채, 회복과 재건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을 유비시킨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시스템과 인적 관리의 미비 등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 대신 신적인 비호 아래 안정되게 통제되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아무래도 자폐적인 것처럼 비춰질 혐의가 있다. 닫힌 문이 숨겨져 있던 장소 중의 하나로 황궁 지하로 설정한 것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는 2011년 3월11일 도호쿠의 이와테현이 스즈메의 여정의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아름답고 유려한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전히 세카이계의 한계를 일정 부분 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작품 외적 측면에서 당면한 동일본대지진의 원인과 문제 해결, 사후 처리를 도외시한 채, 회복과 재건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을 유비시킨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시스템과 인적 관리의 미비 등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 대신 신적인 비호 아래 안정되게 통제되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아무래도 자폐적인 것처럼 비춰질 혐의가 있다. 닫힌 문이 숨겨져 있던 장소 중의 하나로 황궁 지하로 설정한 것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는 2011년 3월11일 도호쿠의 이와테현이 스즈메의 여정의 최종심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카이 마코토의 아름답고 유려한 작품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전히 세카이계의 한계를 일정 부분 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