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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소에 뿌리 내린 이민자 가정의 초상
-영화 <미나리>(2021)




이수향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평론가
“1945년 가을, 나는 태어났다. 해방둥이인 나와 내 또래들은 태어난 팔자대로 한창 꿈과 동심에 잠겨 있을 어린 나이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그리고 따발총 맞아 죽은 시체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었다. 미군들을 보면 엉터리 영어로 '헤이, 헤이, 기브 미 츄잉 껌, 기브미'하고 소리 지르기도 했었다. 그때 미국이라면 천국처럼 느껴지고 지상의 유토피아처럼 생각됐던 때문인지 우리 동창생들은 너도나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 위해서 닭의 엉덩이를 까뒤집어 암수를 가리는 병아리 감별사가 되기도 했고, 가발 장사에, 청소에, 고속도로에서 죽은 시체를 치우는 장의사 노릇으로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아까운 놈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총 맞아 죽기도 하고…” (최인호, 『나는 나를 기억한다』, 여백, 2015, pp.13-14.)
소설가 최인호는 1970년대를 회고하는 글에서 당시 미국을 ‘천국’이나 ‘지상의 유토피아’인 것처럼 여겼다고 말한다.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최인호가 한국 문단의 조숙한 문사로 이름을 알리고 있을 무렵 동창생인 누군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지의 땅 미국에서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병아리 감별사나 장의사 혹은 슈퍼마켓이나 세탁소 등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점에서 열려 있었지만, 반대로 이민 이전의 삶 즉, 모국에서의 삶의 수준이나 사회적 계층 등은 무화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 돌아왔다. 영화 <미나리>(2021, 정이삭 감독)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7-80년대 한국계 미국 이민자들의 삶을 경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 영화는 한국계 미국인 2세인 정이삭 감독(Lee Isaac Chung)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계 미국인 1세대의 삶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이다. 정감독은 78년생이고 콜로라도 덴버에서 출생한 이후, 5세 때 미국 남부 아칸소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는데 영화는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매우 부드러운 회고조의 분위기를 띤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80년대 초반, 한국을 떠나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살던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을 데리고, 아칸소로 이사를 한다. 이는 제이콥이 땅을 사서 큰 농장(극 중 표현대로라면 ‘Big garden’)을 가꾸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땅을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려서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 집에 살아야하고, 시내와 거리가 있어 병원 등 여러가지로 불편한 환경임을 알게 된 모니카는 불만을 표한다.

그러나 제이콥은 농장일과 병아리감별사 일을 번갈아가며 해냈고, 모니카 역시 곧 적응하여 살림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병아리감별사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 심장에 병이 있어 오래 뛰면 안 되는 어린 데이빗과 의젓한 누나 앤도 심심한 환경에 적응을 하며 지내던 중, 부모가 일하는 동안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한국에서 모니카의 친정 엄마 순자(윤여정)가 오게 된다. 데이빗은 ‘진짜 할머니같지 않은 할머니’인 순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갈등을 일으킨다. 할머니는 숲 깊은 곳에 위치한 개울물에 미나리씨를 뿌리며 잘 자랄 거라고 말하고, 제이콥의 농장의 채소들이 자라듯 데이빗도 점점 자라가고 할머니와도 가까워진다. 그러나 불행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가족들의 작은 평화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한 이래, 한국계 감독 영화 최초로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90관왕 이상의 타이틀을 얻었다. 또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명단에 작품상·남우주연상·여우조연상·감독상·각본상·음악상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기생충>과 상당히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아카데미상의 수상 소식들도 기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개봉에 앞서 서포트를 해주고 있기도 한데, 영화의 성격은 <기생충>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기생충>이 날카롭고 비판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영화라면, 이 영화는 좀 더 서정적인 영화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두 작품은 매우 정교하게 세공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 영화는 쇼트의 유연한 연결, 카메라의 심도 조절, 다양한 앵글과 쇼트로 인물의 표정과 감성을 담는 방식이 매우 섬세하다. 또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간간히 가미되는 은은한 허밍조의 음악은 잔잔한 가스펠 같으면서도 묘하게 슬픈 느낌을 주고 있어서 영화의 톤을 한 층 더 차분하게 이끌어낸다. 시대적 배경에 맞게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화면의 색감이 굉장히 아름답다. 제이콥이 개간해야하는 너른 땅의 초록빛들과 건물이라곤 보이지 않는 배경의 수풀들, 베이지색 컨테이너 외관의 대비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상과 소품들이 특히 그러하다. 제이콥의 빨간 모자나 데이비드의 줄무늬 티셔츠와 장화, 할머니의 물방울 무늬 원피스같은 것의 색감들이 오래된 옛 추억의 향수를 일으키게 한다.

고전적인 우아함을 풍기는 화면은 빛의 세기와 앵글의 각도, 인물 클로즈업 등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적인 특징과도 잘 연결된다. 내리쬐는 낮의 태양 아래서 땅을 파고 씨앗을 심기위해 땀 흘리는 제이콥의 모습은 혈기왕성한 젊은 가장의 낙관적인 모습이지만, 어스름하게 어두워가는 들판에서 담배를 피우는 얼굴의 클로즈업은 그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과 불안함의 무게를 더한다. 모니카는 컨테이너 안의 구식 싱크대와 가구들에 그릇을 정리하고 카펫을 깔고 장식품들을 놓으며 살림살이의 구색을 갖춰나가지만 간간히 새어나오는 한숨과 피로를 숨기지 못한다.

영화는 크게 부부와 조손 두 축의 갈등을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진행한다. 모니카와 제이콥 부부의 이민 이전의 삶에 대한 힌트는 1972년 3월 1일이 찍힌 약혼 사진 빼고는 거의 없다. 다만 이들이 “사랑해 당신을~”이 반복되는 노래를 늘 같이 부를 만큼 사랑했었다는 것,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라고 말할 만큼 한국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부부는 서로 다른 방향의 구원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모니카에게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정과 평안이 중요한데 남편이 농장이라는 꿈에 사로잡혀 무모한 욕망에만 돌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이콥은 자식들에게 뭔가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자신의 시간을 모니카가 기다려 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는 ‘물’이다. 물은 제이콥의 농사의 향배를 결정짓기도 하고, 데이빗과 할머니를 연결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꼬마 데이빗의 고민은 화장실에서 오줌(‘pipi’)을 싸는 꿈을 꾸고 나면 이부자리에 지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할머니는 자신의 이런 부끄러운 비밀을 동네방네 떠벌린다. 데이빗은 쿠키를 만들어 주거나 요리를 해주는 대신 자신의 ‘마운틴 듀’(할머니 표현으로는 ‘산에서 온 이슬 물’)를 뺏어먹고 티비만 보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냄새(‘granma smell’)’ 난다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나기도 한다. 할머니는 이런 손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엄마의 염려와 보호에서 벗어나 더 멀리가고 더 뛰고 더 강해지기를 바란다.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원더풀’한 채소 미나리처럼 커 나가길 바라면서도 때때로 안 보이는 게 보이는 것 보다 더욱 무섭다는 진리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두 축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영화의 후반부는 달려간다. 결국 모든 키는 할머니가 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부부는 끝내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서도 서로가 겨우 남아 있음을 깨닫고 안도한다. 할머니는 죽기가 무섭다는 손자에게 혼자두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pipi’를 상징적으로 나눠가짐으로써 손자를 건강하게 한다. 손자는 절망 가운데 놓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할머니의 손을 이끌어 다시 가족 안으로 돌려놓는다.

한편,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안온한 정서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낭만적인 향수의 시선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들의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관계와 불편한 시선에도 노출되어 있어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갈등들이 미세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가난한 동양인 이민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게 된 남부의 아칸소 지방은 노예 농장의 역사를 지닌 곳으로 보수적인 정치색과 근본주의 기독교의 전통이 깊으며 아시아계 인구가 적고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기도 하다.

젊은 아버지는 수로 관개 관련 인부를 만날 때나 은행가를 만날 때, 교회에서 처음 가족을 소개할 때 예의바르고 짐짓 여유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노력하지만 어색함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모니카는 교회에 가고 싶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고 자신들이 구경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지자 큰 돈을 과감히 헌금으로 내며 기가 죽지 않은 척을 하려한다. 아이들은 ‘chingga chingga’나 ‘flat face’ 등으로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속이 상한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은 큰 적의가 있지는 않다고 해도 이들을 계속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지게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족은 그러한 시선에 매몰되어 고립이나 도피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아무리 혼탁한 물도 깨끗이 정화시켜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미나리처럼 이들 가족도 결국 ‘strong’하게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이 영화가 놓인 영화 밖의 위치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국 내에서의 관심과 인정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극심해지고 있는 동양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에 반향을 기대하기도 한다. 모두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자식들인 나라에서,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 보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의미한 것이다. 피부색이 어떻든 누구에게나 할머니는 있고, 근면과 성실함으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울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보편적인 공감의 정서를 확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거나 자식을 위해 고생을 마다않는 부모를 둔 경우, 혹은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감정의 소요를 일으키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대다수가 해당될 것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