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Nikisch(지휘), Berlin Philharmoic Orchestra
“Beethoven - Symphony Nº 5 in C minor, Op.67”
SP 4장(음반사 : Grammophon, 음반번호 : 69504-07)
동유럽의 헝가리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성인”이라 불린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을 탄생시켰다. 비타민 C로 1937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알베르트 센트 디외르디(Albert Szent-Gyorgyi), 1963년 기본 대칭입자 발견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진 위그너(Eugene Paul Wigner),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현대 컴퓨터의 구조를 제안하여 에니악을 탄생시킨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대표적인 예이다. 헝가리는 고전음악에도 굵직한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벨라 바르톡(Béla Bartók),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할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 1855년 10월 12일~1922년 1월 23일) 역시 헝가리 태생의 음악가이다.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자, 금세기 지휘자의 출발점이라 불린다. 헝가리 Mosonszentmiklós에서 태어난 그는 비엔나음악원에서 요제프 헬메스베어거(Joseph Hellmesberger, Jr.)에게 바이올린을, 펠릭스 오토 데소프(Felix Otto Dessoff)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이후 빈 궁정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이 오케스트라들은 브람스, 바그너, 베르디, 브루크너, 리햐르트 슈트라우스 등 당대의 대음악가들이 지휘봉을 잡는 곳이었기에 그들의 지휘 하에 니키쉬는 자연스럽게 낭만주의 음악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되고 향후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낭만주의 음악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특히 브루크너의 제2번 교향곡 초연에 함께 한 이후 브루크너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바이올린에서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하게 된 그는 23세인 1878년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의 제2지휘자가 되었다. 1884년에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지휘하여 브루크너 7번 교향곡을 초연하였는데, 이 연주는 대성공을 거두어 브루크너가 더욱 대중적 인지도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브람스 또한 니키쉬가 지휘하는 그의 교향곡 4번 연주를 듣고 이보다 더 나은 연주는 불가능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어 1889년 그는 보스톤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1893년에는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 극장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1895년부터 칼 라이네케(Carl Reinecke)를 이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카펠마이스터를 역임함과 동시에 한스 폰 뷜로(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상임지휘자가 되어 남은 생을 이 악단들과 함께 했다. 그는 악단의 명성을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확산시켰고, 1912년 유럽의 교향악단으로는 최초로 런던필을 이끌고 미국에서 연주회를 가져 대서양 너머까지 명성을 날렸다.
니키쉬가 1913년 11월 20일 베를린필을 이끌어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녹음이다. 니키쉬가 활동하던 때는 아직 녹음기술이 발전하기 전이라 당시 음반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녹음에도 많은 한계가 따랐다. 이 음반 또한 나팔관 녹음 기술의 한계로 녹음 가능한 주파수 대역과 음량이 매우 협소했고, 금관악기 음향을 제대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악단 편성을 바꾸어 녹음했고, 나팔관 주위에 연주자들이 모여 앉아 녹음해야 했기에 연주자의 수도 대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녹음시간의 한계로 인해 곡의 반복되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기도 했다.1)이 때문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이 음반을 듣고 니키슈의 예풍을 완전히 왜곡해 전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녹음이 전달하는 연주의 파급력은 막강하다. 니키쉬의 지극히 개인적인 템포와 낭만주의적 해석은 오늘날 들을 수 있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성과 화려한 녹음과는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녹음시간의 한계로 인해 곡의 반복되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기도 했다.1)
이 음반은 흔히 노란딱지로 널리 알려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보라색과 금색 레이블로 초판이 제작되었다. 오케스트라 명칭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만 표기되어있다. SP 음반이 장시간 녹음이 어려웠던 관계로 “운명”은 4장의 SP(축음기) 음반에 담겨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가장 초창기의 오케스트라 녹음 중 하나이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최초 교향곡 녹음으로 음반역사와 클래식음악사에서 매우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도이치 그라모폰의 베를린 필하모닉 100주년 및 120주년 기념 세트를 비롯하여 다양한 베토벤의 역사적인 레코딩 음반에 빠지지 않고 수록되고 있다.
필자는 이 전설적인 SP 음반을 구하기 위해 참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일단 초판은 극도로 희귀하여 인터넷에도 물품이 나오지 않았고 경매기록도 극히 적었다. 그러다 독일의 한 SP 음반 전문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구하게 되었다.
아르투르 니키쉬는 지휘자의 해석과 개성을 중시하여 현대 지휘법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의 힘은 악보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휘봉 없이 눈만으로도 오케스트라 단원 한 명 한 명의 음악을 이끌어 내고 전체의 소리를 조화롭게 하나로 이끌었던 ‘최면술사’와 같은 카리스마였다. 이는 훗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프리츠 라이너 등 대지휘자들을 통해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2월 31일 오후 11시 라이프치히, 독일 노동자들의 음악 운동 주최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회가 열렸다. 지휘는 아르투르 니키쉬. 이 역사적인 음악회는 전쟁의 종료와 왕정의 종료,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환희의 송가에 담아 잿빛 독일에 희망을 선사했고, 이후 세계적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음악회의 전통이 되었다. 니키쉬는 1920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해 1922년 라이프치히에서 타계했다. 그의 사후 라이프치히 시는 그의 집 광장을 니키쉬광장이라 명명하며 추모했다. 2020년에는 제1회 아르투르 니키쉬 국제콩쿠르가 열렸고 우리나라의 박준성이 우승을 차지했다.
1)당시 음악사조가 반복을 자주 생략했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