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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마음의 궁전




전효택
에너지자원공학과 명예교수,수필가





전효택
에너지자원공학과 명예교수, 수필가
2021년 3.1절에 즈음하여 우연히 ‘딜쿠샤’를 소개한 신문 기사를 접했다. 딜쿠샤(Dilkusha)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에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 1948)의 가옥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일반인들에게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보기 전에는 딜쿠샤라는 용어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딜쿠샤란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이상향’, ‘희망’ 등을 뜻하는 단어로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대문과 광화문 사이의 언덕에 강북 삼성병원이 있다. 병원 입구로 향하는 오르막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돈의문(서대문) 박물관 마을이 보인다. 길을 따라 언덕길을 더 오르면 작곡가 홍난파 가옥을 지나 골목길 끄트머리 막다른 곳에 붉은 벽돌 양옥 2층 건물인 딜쿠샤와 임진왜란 때에 행주대첩을 거둔 권율(1537-1599)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가 위용을 드러낸다. 수령이 470여 년이나 되는 이 나무의 높이는 24m, 둘레는 680cm나 되는 거목이다. 이 좁은 도로의 오른쪽은 일반 가옥이나 연립 주택이고, 과거의 골목길이 남아 있다. 왼쪽은 재개발된 고층 아파트의 밀집으로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고층 아파트 단지와 연립 주택으로 가두어 놓고 있다. 사직터널과 독립문이 가까이에 있다.

딜쿠샤 전경(국가등록 문화재 제687호). 오른쪽은 딜쿠샤의 1929년 사진.

딜쿠샤 오른쪽에 권율 장군 생가터 은행나무.
앨버트는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 조지(George Taylor)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입국하여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그는 연합통신 통신원으로도 활동하며 1919년 고종의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 독립운동가의 재판 등을 취재하여 세계에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강점기 내내 감시 대상이 되었고, 6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하자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된다.

1945년 해방 이후 앨버트는 그가 사랑하는 한국으로 돌아와 살기를 소망하지만, 1948년 6월 캘리포니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유골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아버지(조지) 무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인 메리(Mary Taylor, 1889-1982) 여사는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여 남편 앨버트의 유해를 선교사 묘원에 있는 그의 부친 옆에 안치했다. 나는 지난 2021년 6월 하순, 이 묘원을 답사하며 테일러 부자의 비석과 무덤을 확인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역의 테일러 부자 묘소. 오른쪽 큰 비석이 부친(조지 테일러) 비석이고, 왼쪽의 작은 비석이 아들 앨버트 테일러 (2021년 6월 29일 저자 촬영).
딜쿠샤는 1963년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정부의 방치로 주민들이 공동주택으로 사용하면서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자칫 그대로 묻혀 버릴 뻔한 이 건물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앨버트의 유일한 아들 브루스(Bruce) 테일러가 2006년에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였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딜쿠샤의 복원 사업을 진행하였고 2021년 3.1운동 102주년 기념일을 맞으며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딜쿠샤에 들어서면 1층과 2층의 거실이 방문객을 맞는다. 건물의 역사, 테일러 부부의 결혼과 조선 입국에 대한 사연 및 테일러 부부를 소개하고 있다. 부인 메리의 호박 목걸이와의 인연이나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 및 금 광산과 테일러 상회에 대한 것도 보인다. 부인 메리가 그린 그림을 통하여 조선 풍경과 당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또한 일제의 테일러 부부 강제 추방과 해방 후 테일러의 미국에서의 사망과 한국 재입국 사연 및 유해의 양화진 묘역 안치 등에 대한 자료도 볼 수 있다. 다시 세상에 알려진 딜쿠샤와 더불어 연합통신 통신원 앨버트 테일러의 3.1 독립선언서의 해외 타전 기사 자료들과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도 제암리 학살 사건 취재, 딜쿠샤의 복원, 딜쿠샤 건축과 벽돌 쌓기의 특징이나 딜쿠샤 역사 영상실 등 많은 문헌 및 기사와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보는 이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딜쿠샤 1층(왼쪽) 및 2층(오른쪽) 거실.
호박 목걸이와의 인연이다. 테일러와 메리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처음 만났다. 앨버트는 준설기를 구입하기 위해 머무는 중이었고 연극배우인 메리는 순회공연 중이었다. 당시 남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픔에 잠겨있던 메리는 친구의 설득으로 참석했던 극단 단원들과의 파티에서 앨버트를 만났다. 둘은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앨버트는 메리에게 이 아름다운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앨버트는 한국으로 돌아가며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열 달 후 인도에서 재회했고, 1917년 6월 인도 뭄바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딜쿠샤는 메리의 뜻에 따라 붙인 이름이며, 인도 북부 러크나우 지역에 자리 잡은 딜쿠샤 궁전에서 따왔다고 한다.

테일러 부부와 호박 목걸이.
세상에 알려진 딜쿠샤 가문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서일대학교 김익상 교수는 앨버트의 유일한 아들 브루스의 지인으로서 2005년 브루스의 의뢰로 그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의 지명만으로 집의 위치를 가늠해야 했기 때문에 딜쿠샤를 찾는 데 약 2개월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공동 거주로 인해 장독대로 가려진 정초석(定礎石) ‘딜쿠샤 1923’이 다행히 발견되었다. 브루스는 아내와 딸 제니퍼와 함께 2006년 딜쿠샤를 방문하여 이곳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임을 확인하였다. 1942년 한국을 떠난 지 64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는 딜쿠샤가 보존되어 집이 없는 주민들의 안식처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2015년 브루스가 세상을 떠난 후 딸 제니퍼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2년에 걸쳐 테일러 가문의 자료 및 고가의 유물 등 1,026건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로써 테일러 일가의 한국을 사랑한 이야기와 딜쿠샤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23년 정초석 발견으로 딜쿠샤 복원이 이루어짐.
딜쿠샤를 통해 테일러 가문의 4대에 걸친 한국과 관련된 생애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만약 내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며 독립운동에까지 일조하는 삶으로 일관할 수 있었을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한국을 헌신적으로 돕고 사랑했던 벽안의 이방인인 테일러 가족들에게 숙연한 마음으로 감사드린다. 테일러 가족과 자손은 얼마나 헌신적으로 한국을 사랑했는지 한국인인 내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이다. 입만 열면 애국심이니 국민을 위한다느니 하는 내로남불 형 인사들이 적지 않은 시기라 그런지 그는 내게 큰 울림과 감동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