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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정 속의 미국 대학들




권욱현
서울공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



권욱현
서울공대 전기정보공학부 명예교수
1. 들어가며

나는 1966년 2월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통신학교에서 ROTC 장교로 근무하다가, 1968년 6월경에 제대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하 서울공대) 선배 교수님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서울대 대학원에 가서 교육공무원인 유급조교로 근무하다가 정식 교원인 전임강사로 임명되면, 경력을 쌓은 후에 교수가 되었다. 나도 그러한 길을 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1968년 9월에 서울공대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년 후에는 유급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차츰 해외 박사를 조교수로 선임하는 방식으로 대학 분위기가 바뀌어, 대학교수가 되고 싶은 나도 유학의 길을 택해야 했다. 미국 대학 하면 우선 떠오른 대학들이 하버드대, MIT, 스탠퍼드대이다. 이 대학들은 미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1, 2, 3 등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고, 대학 학부 성적이 뛰어나서 이러한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유학을 준비하는 도중에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병이 완치할 때까지 유학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유학 준비 기간이 남들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러한 과정 중에 1971년에 하버드대에서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받았다. 1972년에는 MIT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별도로 풀브라이트 장학금도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에는 미국대학 학자금 외에도 텍사스 대학에서의 여름학기 연수를 위한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비리그 대학인 브라운대로부터도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받았다. 어느 대학 어떤 장학금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후일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근무하다가 1981년 안식년을 떠날 때 스탠퍼드대와 MIT에서 초청장이 왔을 때도 어느 대학을 선택할지 고민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미국 대학 선택에 얽힌 사연을 돌이켜보고, 선택한 대학에서의 공부와 연구 경험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앞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 대학에 간다면 나의 경험이 그들에게 참고가 되기 바란다.


2. 유학, 병, 그리고 하버드대 장학금

보통 해외 대학원에 유학하러 갈 경우 국내 대학원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해외 대학의 대학원으로 간다. 국내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선진국 대학원에 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석사과정을 다시 공부하므로, 시간상 1년 또는 2년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1970년대에는 국내 대학원 수준이 선진국에 비하여 낮아서 다시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나는 곧장 유학을 가지 않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서울공대 대학원에 들어갔다가 교수 채용 방식이 바뀌어 유학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유학 준비를 하다가 1969년 6월에 정기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진단이 나왔다. 1년 반가량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도 건강하게 군대에서 ROTC 장교 생활도 하였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한국에는 폐결핵에 걸리기 경우가 많아서 모든 한국 유학생은 유학하러 갈 때 폐결핵 검사를 받고 건강진단서를 휴대하게 되어있었다. 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고, 더구나 병마와 싸워야 하고 언제 건강이 회복될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울공대 기숙사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 않아서 건강관리도 쉽지 않았다. 차츰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아서, 1970년도에 유학 준비해서 빠르면 1971년 여름에 유학하러 가려고 계획하게 되었다.

유학하러 가려면 대학 성적이 매우 중요하다. 대학교 성적이 우리나라에서 기업에 취직하거나 일할 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대학교 성적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유학을 하러 갈 때는 입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졸업할 때 공대 전체에서 2등을 했기 때문에 매우 유리하였다.

유학하러 가려면 영어 성적도 좋아야 한다. 나는 원래 어학 능력이 좀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기를 쓰고 영어를 공부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좀 사대주의적인 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최소한 입학이나 취직에 필요한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어가 미국과 영국의 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의 생각이 좀 모자랐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TOEFL 시험 준비를 위한 자료도 많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대부분 영어 실력도 우수하지 못했다. 그 당시 최고 점수가 677점이었는데 550점 정도면 좋은 대학에도 유학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 나의 점수도 그 정도이었을 것이다.

유학하기 위해서는 좋은 추천서도 필수적이다. 대학원에 있으면 교수님들과 자주 접할 수 있어 추천서를 받기 쉬운 편이다. 그 사절 많은 교수님에게는 영어가 생소한 시기여서, 영어 추천서 초안을 본인이 적어가서 교수님께 보여드리면, 내용이 틀리지 않는 경우 사인해주었다. 나는 추천서에 대학에서 성적이 뛰어났다는 내용을 적었다.

전공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여 학업계획서를 잘 작성하면, 해외 대학원 입학에 도움이 된다. 국내 대학원에 들어오면 자기의 전공을 선택하고 나서 연구하기 때문에 학업계획서를 잘 작성할 수 있다. 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자동제어 분야이었지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자동제어, 반도체, 컴퓨터가 나의 관심 있는 분야였다. 대학 신청할 때는 뛰어난 대학, 우수한 대학, 보통대학을 혼합하여 신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해는 뛰어난 대학으로,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던 하버드대에 신청하였다. 하버드대에는 공학 분야가 단과대학으로는 없어, 응용과학부에 신청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서울공대에는 응용물리과도 소속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일부 과목도 청강하였으며, 반도체 등 응용과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었다.

71년 초 몇 대학으로부터 입학 신청에 관한 결과가 왔다. 뛰어난 대학 그룹에 속하는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연락이 왔다. 연구장학금(Research Assistantship)도 아닌, 조건이 달리지 않은 장학금(Fellowship)을 준다니 감명 깊었다. 담당 의사와 상의하였더니, 현재 병이 나은 상태여서 유학 갈 수는 있지만, 재발 위험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일 년 후에 유학하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나 자신도 낯선 외지에서 밤새워 공부하면서 건강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 아닌가? 이 좋은 기회가 나에게 또 올까 반신반의하였지만, 그해 유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버드대에 1년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니, 이 장학금은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고 내년에 처음부터 다시 지망하라는 연락이 왔다.


3. MIT에 입학할까? 브라운대에 입학할까?

1971년 하반기가 되자 예상대로 나의 건강이 호전되어 1972년 7월경에는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그래서 71년 가을에 MIT와 이이비리그(Ivy League) 소속인 대학인 브라운대 외에도 몇 군데 더 입학신청서를 보냈다. Fulbright 장학금은 그동안 공학 분야에는 주지 않다가 당시 막 지원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래서 Fulbright 장학금도 신청하였다.

72년 2월경 MIT로부터 입학 허가가 왔고, 장학금을 알아보고 있는데 4월까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브라운대학에서도 입학 허가와 함께 연구장학금(Research Assistantship)를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4월이 지나니 MIT에서 연락이 왔다. 장학금을 알아보았으나 어렵고, 그 대신 은행융자를 알선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MIT에서는 등록금과 생활비가 당시 6000불이 든다고 하였다. 졸업 후에 일정액씩 갚는 조건이었다. 일종의 대여장학금이었다. 반면 풀브라이트 재단에서도 심사를 거쳐 나에게 장학금(학비 5년간 매년 3000불, 왕복 항공경비 및 하계 연수비)을 주기로 하였다. 다른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면 학비를 이중으로는 주지 않는다고 했다. 학위를 마친 5년 후에는 무조건 귀국하여 모국에서 봉사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학비로 부족한 3000불은 대여 장학금을 받고 MIT로 갈까, 아니면 학비 전부를 주는 브라운대학으로 갈까 고민이 많았다. 우선 경제적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보통 가정이라면 그 정도 차액은 지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우리 집의 경우에는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다음으로 나의 건강 문제도 있었다. MIT를 간다면 경쟁이 심할 텐데, 너무 열심히 하다가 병이 재발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또한 나의 장래 목표와 관련이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박사 받은 후 돌아와서 서울공대에서 일하고 싶었다. 과거 내가 서울공대 대학원에 입학한 것도 서울공대 교수가 되려고 갔던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면 MIT나 브라운대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실력이 중요하지, 미국의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MIT로 가지 않고 브라운대에 가기로 하였다.

브라운대로 가게 되면 당연히 풀브라이트 학비 지원은 포기해야 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면 왕복 항공비와 하계 연수비는 받을 수 있었다. 풀브라이트 재단으로부터 적은 돈이라도 지원을 받을 경우, 5년 후에는 귀국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나는 박사 후 한국에서 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풀브라이트 재단으로부터 왕복 항공여비와 하계 연수비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일부 지원받기로 했다는 것은 나는 유학 갈 때부터 5년 후에는 무조건 한국으로 귀국하겠다는 확고한 결정을 했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나는 유학하러 갈 때 집안으로부터 한 푼의 지원도 필요가 없었다.


4. 오스틴 텍사스대학에서 미국을 처음 배우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풀브라이트 재단으로부터 학비 지원은 없었지만, 항공여비와 여름학교(Summer School) 연수비를 지원받았다. 텍사스주의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2개월 정도 미국과 미국대학 교육에 대한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을 받을 수 있었다. 연수받는 대학은 내가 선정한 것이 아니고 재단에서 미리 지정되어 있었다. 텍사스주에서 받은 미국에 대한 첫인상은 땅이 아주 넓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규모가 큰 것도 놀라웠다. 대학의 좋은 건물과 인조잔디가 깔린 매우 커다란 풋볼 스타디움에 놀랐다. 기숙사의 음식도 풍성했다. 바깥 기온은 매우 높았지만, 습도가 낮아 땀은 나지 않았다. 그늘로 들어오면 견딜 만했고, 건물 안에 들어오면 에어컨이 있어 추울 지경이었다. 미국의 역사, 문화에 관한 강의도 있었다. 텍사스주는 미국 여러 주 중에서도 천당에 가장 가깝게 있다고 생각하는 텍사스주 사람들의 자부심도 알려주었다. 영화로 보던 미국의 서부개척역사 및 멕시코와의 전쟁 역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산 안토니오까지 관광버스로 안내하여 주었다. 로데오라는 서부 목동의 들소 말타기 시합을 보여주려고, 우리를 시골로 안내하기도 하였다. 주 의사당, 주위의 경치 등도 구경시켜 주었다, 미국의 여러 가지 자랑거리를 들으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1972년 당시의 한국과 비교하니, 이곳이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수에 참여한 학생을 세계 여러 곳에서 왔었다. 버스를 타고 외부로 나갈 때, 동양에서 온 학생들은 항상 별로 말이 없었고, 남미나 유럽 학생들은 미국에 처음 왔는데도 항상 떠들썩하게 말을 많이 했다.

여름학기 동안 대학에서 제공하는 정식 과목 중 한 과목을 수강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나는 수학과에서 제공하는 3학년 과정의 확률 과목을 수강했다. 거의 매일 강의가 있어, 6주 만에 끝날 수 있는 여름학기 강좌였다.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성적이 나오기 전에 브라운대에서 학기가 시작하였다. 브라운대로 떠나면서 담당 교수님에게 성적을 편지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편지가 왔었는데, 학기말 시험에서 100점(Full Score)을 받은 사람은 나 혼자라고 알려주었다. 물론 A 학점을 받았다. 이것이 내가 미국에서 처음 받은 학과 성적이었다. 미국 학생들이 대단할 것 없구나라고 생각했고, 이런 경험으로 미국 공부에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대학 교육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은 나에게 매우 유용했다.


5. 브라운대에서의 공부와 연구

브라운대는 역사 깊은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이며 규모가 작다. 처음 브라운대에 도착하였을 때, 그 작은 규모 때문에 실망했지만, 미국에는 규모보다는 전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면담을 통하여 자동제어가 연구 분야이신 앨런 피어슨(Allan E. Pearson) 교수가 지도교수가 되었다. 성격이 온화하고 남을 잘 이해하는 분이었다. 키가 크고 브론디 머리 색깔,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북구 출신의 미국인이었다.

브라운대에서도 박사학위 받으려면, 입학하여 최소 몇 년간을 등록하고 등록금을 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외부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입학하는 경우 1년을 감해준다. 그러면 등록금도 적게 내고, 실력만 있으면 3년 만에 졸업도 빨리할 수 있으므로 학생에게 유리하다. 우선 지도교수인 피어슨 교수가 나의 서울대학교 석사과정이, 미국 대학원 수준인지 평가해서 학교 측에 보고해야 했다. 선진국 대학에서는 보통 한 과목이 3학점, 한 학기에 3과목을 수강하였다. 반면 그 당시 서울공대에서는 한 과목이 1 혹은 2학점, 한 학기에 6과목을 수강할 정도로 수준이 떨어져 있었다. 여하튼 지도교수는 서울공대 석사과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미진하였겠지만 대학 당국에 승인요청서를 보내주었다.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대학에 가서 석사부터 시작하면 보통 석사과정이 2년, 박사과정은 3년에서 4년 정도가 소요된다. 미국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입학하면, 박사과정이 보통 4년에서 5년이 걸린다. 해외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경우에는, 새로운 연구 분야와 과목 등에 적응해야 하므로 수학 연한이 석사부터 시작하는 학생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박사학위를 마치려면 5년쯤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사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일부 받았기 때문에 5년 후에는 모국에 귀국하여 봉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빨리 마치면 다른 곳에 1~2년간 근무하다 귀국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기대일 뿐 보통은 입학하여 5년이 걸린다.

나는 5년 이내에 꼭 박사학위를 마쳐야 하므로 논문연구를 열심히 하였다. 브라운대에 온 지 2년 반 만에 지도교수의 연구 분야와 다른 분야에서 3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제출하여 게재 승인을 받았다. 지도교수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졸업 후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졸업이 많이 남아 있는 데 왜 이런 질문을 할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국에 들어온 지 5년 후에는 한국에 무조건 돌아간다고 했다. 그 전에 마치면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좀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3년 만에 마치고 1년 정도 브라운대에서 박사후연구원(Research Associate)으로 있겠느냐고 나의 의사를 물었다. 당연히 나에게는 좋은 조건이었다. 박사후연구원은 인건비만 학생보다는 2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개인 연구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 논문은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 막연하여 지도교수와 상의하였다. 내가 그동안 학회에 제출한 논문을 종합하여 쓰라고 하였다. 19975년 10월에 박사 자격 최종심사를 통과하였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브라운대에 온 지 3년만 이었다. 나도 놀랄 정도로 빨리 박사학위를 마친 것이다. 피어슨 지도교수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년간의 박사후연구원 생활까지 합하면 총 4년간 브라운대에 머무른 것이다. 이 기간에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총 9편의 논문을 가장 권위 있는 IEEE 저널에 개재하게 되었다. 그 당시로는 많은 실적이었다. 브라운대에 있을 때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추후 영문교과서 2권을 저술할 수 있었다. 브라운대에서의 4년은, 내 인생 여정의 황금기였다.


6. 아이오와대학에서 미국 중부를 경험하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의 조건에 따라, 나는 유학을 온 후 5년간만 미국에서 머물 수 있다는 조건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운대에서 3년 만에 박사를 마치고 나서 1년간 박사후(Post Doctor)연구원으로 있었으니 앞으로 1년을 미국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셈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머무르게 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좋은 직장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떤 기관이든 1년간 있다가 돌아가려고 하였다. 내가 돌아가려고 한곳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였다. 학부 성적이 월등히 좋았고, 유급조교로 근무한 경력도 있고, 미국에서 연구업적도 좋았기 때문에 전기공학과로 돌아가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때마침 아이오와대학에 조교수로 있었던 나의 친구 변증남 박사가 그 대학에 내가 있을 만한 자리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회과학대학의 박사후연구원과 공과대학의 겸직(Adjunct)조교수 자리였다. 아이오와주는 미국에서 농촌을 대표하는 미국 중부에 있는 주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농촌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이름이 나오곤 한다. 모처럼 미국의 중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브라운대를 떠나 아이오와대학으로 가면서 끝없는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어서 평화로운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회과학대학의 G. R. Boynton 교수와 함께 사회현상을 수식으로 모델링하고 해석하는 논문 (예 An analysis of consociational democracy, Legistative Studies Quarterly, 1978)등을 공동 저술하는 일과, 브라운대에서 연구했지만 미처 발표하지 못했던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여 학술지에 제출하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동부에서 학생 시절 바쁘고 여유 없던 생활에 비해, 느긋하고 푸근한 느낌이 드는 조용한 중부도시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외부로 여행을 가려면 멀리 가야 하므로, 외부로 여행 다니는 기회도 적었다. 이곳에서는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즐겼다. 그리고 한국에 가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난생처음으로 두 달간 골프 레슨을 받기도 하였다. 1년 살아보니 느긋하고 여유 있는 미국 중부에서의 생활도 장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 안식년으로 MIT갈까? 스탠퍼드대 갈까?

나는 1977년 8월에 서울공대 전기공학과로 오게 되었다. 그 당시 서울공대는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있는 공릉동에 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면 모든 교수는 학교 통근버스로 퇴근했다. 퇴근 후 학교는 적막에 싸인 듯 조용했다. 입학한 대학원생들도 거의 없었고, 연구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울공대에 와서 1980년까지 강의만 하노라,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하였다. 연구에서 퇴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대학교수에게 부여되는 장점인 안식년을 활용하여 나의 연구역량을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1980년도에 해외 대학교수와 접촉하여 공동연구를 제안하였고, 그 대학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서울대학교에 제출하여 안식년 승낙을 받았다. 유학 갈 때는 학교성적, 영어성적, 추천서 등이 중요하지만, 안식년 가려면 초청자는 방문 오는 교수의 연구능력에 가장 관심이 많다. 다행스럽게 나는 브라운대에 있을 때 연구한 결과로 1980년까지 IEEE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제1저자로 8편이나 되어, 젊은 교수로서의 연구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 가려다가 가지 않은 MIT로 가거나, 아니면 서부 스탠퍼드대에도 가고 싶었다. 하버드대는 나의 전공 분야에서는 활동이 적어 갈 생각이 없었다. 그 당시 MIT에는 최적제어(Optimal Control)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인 마이클 애턴스(Michael Athans) 교수가 아주 유명했었다. 그분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과거에 MIT에 입학 허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일신상의 사정으로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스탠퍼드대에는 선형시스템이론(Linear Systems Theory)이라는 책의 저자인 톰 카일라스(Tom Kailath) 교수가 아주 유명했었다. 나는 그분에게는 자동제어이론뿐만 아니라 카일라스 교수가 연구하는 신호처리이론과 예측이론(Estimation Theory) 분야도 연구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스탠퍼드대의 카일라스 교수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다. 객원(Visitng) 조교수로 임용하고, 강의하는 기회도 주겠으며, 그럴 경우 학과에서 강사료를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 후 MIT의 애턴스 교수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객원 연구원(Research Associate)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그곳에 여러분들의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으니, 상의해서 참여하게 되면 재정지원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의 경력을 살펴보니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선택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스탠퍼드대 쪽이 타이틀도 좋아 보이고, 강의를 주겠다는 것이 확정적이라 강의경험도 얻을 수 있어 좋아 보였다. 그래서 스탠퍼드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한 때 MIT에서 입학허가를 받고도 가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도 또 못 가는 것을 보면 나는 MIT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다.


8. 스탠퍼드대에서의 경험

1980년 말에 안식년으로 간 스탠퍼드대의 캠퍼스는 참 아름다웠다. 입구에는 야자수 나무가 줄지어 있었고, 널찍한 캠퍼스 안의 모든 건물이 불그스레한 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일부 건물은 아주 고급스럽게 건축되어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좋은 날씨와 잘 어울리는 멋진 전경이었다.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는 서울대학과 전기정보공학부처럼 여러 분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전공하는 자동제어는 통신, 신호처리, 정보이론 등의 분야와 함께 ISL(Information and Systems Laboratory)로 구별되어 있었다. ISL이 있었던 듀란드(Durand) 빌딩 안에 있는 한 연구실을 스웨덴에서 방문해 온 저명한 륭(Lennart Ljung) 교수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나는 스탠퍼드대에 있었던 1년 동안 많은 경험을 하였다. 가장 큰 경험은 톰 카일라스 교수가 저술한 선형시스템이론 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스탠퍼드대는 시메스터(semester) 학기가 아니고 쿼터(Quater) 학기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두 쿼터 학기에 걸쳐 가르쳤다. 스탠퍼드대에서 강의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미국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의 내용은 내가 논문을 쓸 정도로 잘 아는 내용이라 부담이 안 되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이 미국인 교수들에 비해 부족하여 부담이 되었다. 한 학기 강의를 마치고 강의 교수가 나간 후에는 조교가 들어와 학생들로부터 강의 평가를 받았다. 그 자료는 학과 사무실에 보고되고 전체 통계와 함께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쿼터 학기를 강의하였으니 강의 경험을 많이 쌓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카일라스 교수의 연구 분야인 추정이론(Estimation Theory)을 연구하여 나의 연구 영역을 넓히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연구실의 세미나를 듣기도 하고, 일부 공동연구도 하였다. 브룩슈타인(Brukstein) 연구원, 카일라스 교수와 공동으로 산란이론(Scattering theory)을 활용하여 이동구간제어(receding horizon control)를 확장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저널에 제출도 하였다.

1970년도 후반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대단히 관심을 끌었다. 나는 Intel 회사의 8080과 자일로그 회사의 Z-80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을 1979 ∼1780년 서울공대에서 가르쳤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적당히 이해하고 응용하는 데는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전부를 설계하라고 하면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스탠퍼드대에 있을 때 마침 이것을 해결해줄 기회가 있었다. “빗 슬라이스 논리 설계”란 과목이 야간 코스로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기뻤다. 주립대학인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하는 일반인을 위한 야간 코스였다. 나는 그때 스탠퍼드대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바빴지만, 주저 없이 이 과목을 수강하였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돌아가서 지도 학생들과 함께 그 유명한 z-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빗 슬라이스 칩으로 만들어보았던 것도, 스탠퍼드대 방문 때, 야간교육에서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우리 연구실에서 많은 물건을 만들 때도 이러한 경험이 기본자산이 되었다.

스탠퍼드대는 벤처창업의 고장 실리콘밸리에 있다. 내가 스탠퍼드대에 온 것은, 실리콘밸리에서의 벤처창업에 대해 배우고 싶었던 것도 또 한 가지 이유였다. 실리콘밸리에서의 벤처창업에 스탠퍼드대의 기여도가 매우 컸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나의 회사 창업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우리 연구실에서 나중에 창업이 많이 나온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스탠퍼드대에서의 1년간 경험은, 내가 서울대학교에 돌아가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카일라스 교수님을 통하여 우리 학생들을 유학 보내거나 연수 보내는 등 스탠퍼드대와 오랜 협력관계를 갖게 되었다. 카일라스 교수를 나의 롤 모델로 삼고 그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9 맺는말

“특별한 재능이 없으면 공부나 해라”라는 조언도 있다. 내가 그런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국내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유학하러 갔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선호하듯이, 유학 갈 때도 명망 있는 대학으로 가고 싶었다. 대학원 과정에서 병에 걸리다 보니, 유학 준비 기간이 생각보다 더 걸렸고 두 해에 걸쳐 입학신청서를 내야 했다. 대학입시에 비교하면 재수한 셈이었다. 국내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한 경험은 유학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두번 입학 신청을 하면서 여러 좋은 미국대학들과 연관을 갖게 되었다. 하버드대, MIT, 브라운대, 그리고 풀브라이트 장학금 관계로 텍사스 대학(오스틴)과 아이오와대학과도 관련이 있게 되었다. 안식년 가면서 스탠퍼드대와도 특별힌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들 미국대학(그림 1)과의 관계와 경험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내가 평생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림 1. 나의 여정에 관련된 미국 대학들
이 글에서, 나의 유학과 연구 경험을 통하여 미국대학에 유학하러 갈 때 준비해야 할 여러 내용과 대학에서 해야 할 여러 연구 활동을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대학원에서는 공부보다 눈문 연구가 더 중요하다는 것, 안식년 갈 때는 연구업적이 우수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언급하였다.


내가 만약 하버드대나 MIT에 입학하였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그 당시 일반적인 추세처럼 미국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고, 귀국하더라도 여러 기관에 불려 다니느라 연구에 열중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위치에 있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고,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되었고, 미국 공학한림원(National Acacemy of Engineering) 국제회원으로도 선정되어 만족하고 있다. 하버드대나 MIT에 가지 않고도 좋은 업적을 만들 수 있었다.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고 노력하면 항상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내가 서울공대 대학원에 다니던 1970년 당시에는 국내 대학원 수준이 낮아, 서울공대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해외로 유학을 해야 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서울공대는 대학원에서 박사를 마치고 서울공대 교수가 되거나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을 정도로 대학원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져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좋은 경험을 준 미국의 대학들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상 나의 경험이, 앞으로 미국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해 보려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