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너바나는 메인스트림을 따라하지 않았고,
메인스트림이 너바나를 따라했다는 겁니다.”
ㅡ 너바나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1990년대 초, 록 음악 씬은 대대적인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정형화, 기업화되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과 같은 비르투오조들의 등장으로 화려함이 추구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극심한 음의 낭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쫄바지 대신 찢어지고 덧댄 청바지를 입고, 단순한 기타 리프를 조롱하듯이 왼손으로 후려치면서 제멋대로 가사를 마구 질러대던 시애틀 출신의 한 밴드는 이러한 거대한 록 씬에 맞서고 있었다. 펑크 본연의 자세로의 회귀를 온몸으로 부르짖던 그들의 음악에 평단은 ‘얼터너티브 록’이란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얼터너티브’는 주류 음악 시장 규칙과 관습적 사운드를 거부하는 음악 태도를 말한다.
그룹 너바나(Nirvana, 열반(涅槃))는 1987년 미국 워싱턴주에서 보컬과 기타의 커트 코베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시애틀에서 주로 활동하며 1989년 1집 ‘매우 화가 난 음악’을 담은 <Bleach>를 발표하여 4만 여장 정도의 판매고를 올렸다. 라이브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는 조금씩 마니아 층을 쌓아가기 시작하였고 1991년 메이저 레코드 회사인 데이비드 게펜 컴퍼니(DGC)와 계약을 맺고 3코드로 점철된 2집 <Nevermind>를 발표한다. 메인스트림과 맞지 않는 음악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 앨범의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다. 시작도 앨범 차트 100위권 밖으로 단출했다. 그런데 이 앨범의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가 MTV를 타면서 걷잡을 수 없는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Nevermind>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던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추락시키고 결국 4개월 만에 빌보드 차트를 장악한다. 3,000만 장을 팔아치운 이 전설적인 앨범의 탄생은 록 음악사뿐 아니라 전 세계 대중음악사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Nevermind>는 명곡들로 꽉 차 있는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앨범의 백미는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기존 펑크 어법에 의도했든 안 했든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리듬감과 멜로디를 얹혔다. 싱글 차트 탑 10에 오르면서 골드를 기록했던 이 곡은 지금도 너바나의 대표곡이자 록 음악의 대표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곡명은 그의 여자친구였던 토비 베일의 친구가 아파트 벽에다 스프레이로 "Kurt Smells Like Teen Spirit"라고 써 갈겼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만 Teen Spirit가 커트 코베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철학적 의미를 담은 게 아니라 여자친구 베일의 데오도란트 이름이었다고 한다. 앨범 대부분의 곡들은 자신의 어두웠던 이야기와 베일과의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Nevermind>는 생후 4개월 된 아기가 돈을 좇아 수영하는 앨범 표지 자체로도 1990년대 록의 아이콘이 되었다. 앨범 발매 25주년 기념으로 사진 속 아기가 어른이 되어 재촬영된 표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했던 이 앨범 표지는 DGC의 아트 디렉터인 로버트 피셔와 커트 코베인의 작품이다. 자켓 사진을 찍은 사진사는 친구의 아들을 수영장에 집어던져 사진을 찍은 후 사진에 낚싯바늘에 걸린 미국 지폐를 합성해서 넣어 이 표지를 완성했다고 한다. 코베인은 처음에 원숭이 사진으로 표지를 제안했는데 그 사진은 앨범의 내부 슬리브 뒷면에 실렸다.
이 앨범은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답게 초판 가격이 상당한 편이다. 필자는 미국 프린스턴에서 연구년을 보낼 적에 이 앨범을 구매하기로 결정했었다. 미국에 있으니 가장 미국적인 음반을 사자는 생각이었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다가 한 경매 사이트에서 초판 비매품(Promotion copy)을 발견하고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앨범의 LP 초판은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다.
1991년 너바나는 영국 BBC 음악 방송인 ‘탑 오브 더 팝스’에 초대받아 “Smells Like Teen Spirit”를 연주하게 되었다. 방송사는 연주와 보컬 모두 핸드싱크와 립싱크로 연주하기를 요청하였다. 너바나는 이를 거절하여 결국 연주는 핸드싱크로, 노래는 라이브로 부르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실제 무대에 선 너바나는 사람들이 보라는 듯 베이스 기타를 돌리며, 허공에 드럼을 치는 등 퍼포먼스를 하였고, 커트 코베인도 저음으로 마이크를 삼키며 개사까지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뒤늦게 알아챈 팬들이 무대로 올라와 멤버들과 함께 뛰놀아 난장판으로 쇼는 막을 내렸다. 이 쇼는 기득권을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꼬리표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언더가 주류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얼터너티브가 될 수 없다. 예상치도 못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폭발적인 흥행에 빠져든 자가당착(自家撞着)은 너바나의 순수성을 파괴시키며 커트 코베인을 조금씩 침식시켜 갔다. 매체에서는 너바나를 ‘X세대의 대표밴드’로 커트 코베인을 ‘세대의 대변자’라 칭송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반대되는 행로로 나아갔다. 원치 않은 대중과 언론의 집요한 주목에 괴로워하며 커트 코베인의 우울증은 날로 심해졌으며 헤로인 복용이 늘어갔다. 1993년 3집 <In Utero>에서 언더 시절로의 회귀를 꿈꾸며 더욱 무겁고 거친 그런지 사운드를 선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앨범은 또다시 빌보드를 석권하였다.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의 비보는 전 세계 음악계에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록 음악 씬에서 처절하게 부르짖던 이 청년은 얼터너티브 록을 세상에 선사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얼터너티브 록의 사망 선고를 내렸다. 커트 코베인이 ‘자신의 영웅’이라 부르며 직접 찾아가기도 했던 소설가 윌리엄 S. 버로스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죽음은 그 실상 자기 의지로써 죽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그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었던 것이다."
너바나는 2014년 로큰롤 명에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2019년 “Smells Like Teen Spirit”는 10억뷰를 돌파하였다. 음악 잡지 <롤링스톤>은 ‘500대 명반’ 중 6위에 <Nevermind>를 선정하였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 100인',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 및 '가장 위대한 싱어 100인' 중 한 명으로 커트 코베인을 선정하였다. 커트 코베인은 MTV의 '음악에 있어 가장 위대한 목소리 22인' 중 7위, <히트 퍼레이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메탈 싱어 100인' 중 20위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채로운 수식 보다 너바나의 등장은 음악계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로 눈을 돌리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Nevermind>의 탄생 이후 헤비메탈 음악은 침몰하고 얼터너티브 록이 메인스트림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또 다른 너바나를 찾기 시작했고 인디에 머물던 수많은 밴드들이 메인스트림 무대에 올라오게 되었다. Jay-Z가 언급했듯이 1990년대 전성기를 꽃피울 순간이었던 힙합 또한 너바나의 등장으로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너바나 이후 ‘언더’가 아닌 ‘주류’로서 ‘얼터너티브’가 아닌 ‘얼터너티브 록’은 20여 년의 전성기를 열었고 라디오헤드, 그린데이 등 대그룹들이 그들을 잇게 된다.
마이클 애저러드가 회술했던 것처럼 어쩌면 커트 코베인은 ‘세대의 대변자’라기보다는 ‘목소리 없는 세대를 위한 목소리’였을지 모른다. 성차별, 인종차별을 극도로 반대했으며 적지 않은 훌륭한 언더 밴드들을 세상에 소개했던 그가, 모든 번뇌와 고뇌가 사멸된 열반(涅槃)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스러진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