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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연구보고의 회상




김효철
조선해양공명예교수



김효철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의 연표에는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였던 1964년 3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이 공과대학을 방문하여 공과대학 교수회의실에서 교수들과 간담회를 가진 바 있었다. 국가 발전을 이루도록 공과대학의 역할을 당부하는 박 대통령의 말씀에 당시 교수들은 연구환경을 개선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간담회 후 박 대통령은 공과대학 교수들에게 연구비 집중지원을 결정하고 1964년부터 연구비 지원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서울대학교의 모든 학문 분야로 연구비 지원을 전체 교수에 확대하라는 요구로 발전하였는데 정부는 이를 수용할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연구비 확대를 바라는 인접 학문 분야의 요구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정부는 의도와 다르게 공과대학에 대한 연구비 지원조차도 1965년 이후에는 중단하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였다.

박 대통령의 연구비 지원으로 얻어진 연구결과를 발표할 학술지가 필요하였으므로 학회지를 발간하지 못하던 공학 분야의 여러 학회가 앞다투며 학회지 발간을 준비하였는데 나는 대한조선학회지 창간호의 편집 간사로 활동하였다. 공과대학 교수들이 연구 성과를 발표하려 하더라도 여러 학회는 학술지를 발간하지 못하였기에 공과대학은 1965년 7월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논문집 「연구보고」를 창간하여야만 하였다. 공대 연구보고는 매년 2회 발간하였는데 공과대학 교수들 모두가 투고할 수 있는 공학 분야의 종합 학술지가 되었다. 공대 연구보고에 투고한 교수들의 논문을 심사하여야 하였는데 투고자는 심사자를 쉽게 짐작할 수 있어서 심사자는 동료 교수의 논문심사를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1965년 7월에는 미국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 고문 호닉 박사 일행이 방한하여 1주일간 체류하며 미국이 지원하여 한국의 산업기술과 응용과학 발전을 이끌 연구기관 설치하는 합리적 방안을 마련하려 주요 기간산업과 대학의 연구시설 현황을 확인하였다. 당연히 일행은 공릉동 캠퍼스도 방문하였는데 공과대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준비하며 일행을 맞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공과대학은 국가 산업화를 이끄는 핵심연구기관으로 선정되지 못하였으며 정부는 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홍릉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출중한 연구 경력과 업적을 쌓은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여 연구소를 이끌도록 하였다. 이 계획으로 많은 해외의 과학기술자들이 귀국하였는데 상당수의 과학자가 귀국 후 공과대학에 자리 잡고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치계획으로 귀국한 과학자 대부분은 연구 활동보다는 새로이 설립된 연구기관이 자리 잡도록 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일부 과학자는 대학에 자리 잡았는데 빈약한 연구시설과 연구비 부족으로 마음껏 연구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선진국의 우수한 연구환경에서 경쟁하며 연구 업적을 쌓던 귀국 과학자들은 활동이 위축되어 주테야테 교수가 되었다고 자조적 말을 하기도 하였다. 연구 환경과 연구비의 부족으로 주간에는 학교 테니스 코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퇴근 후에는 텔레비전 시청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표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자로 귀국한 교수 중에는 국내의 어려운 연구환경에서 정해진 승진요구 조건이 선진국 환경에서 경험에 비추어보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이라며 주테야테를 즐기는 듯 보이는 교수도 있었다.

석사학위를 가지고 대학의 조교로 근무하며 발표한 논문을 인정받아 197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던 나는 대학에 교수로 근무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하여야 하였다. 1976년 봄 졸업식에서 구제 박사학위 제도로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학교 연구실에서 보내었는데 테니스 코트에서 눈에 띄는 주테교수가 부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학위취득 후 학과의 행정업무를 맡아야 하였기에 관악캠퍼스로 이전 준비 등에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1976년 봄에는 학과에서는 학과장업무를 수행하는 한편으로 대한조선학회의 편집이사 업무도 수행하고 있었다. 신임 학장은 1964년에 대한조선학회를 창간하였던 황종흘 교수를 편집위원장으로 선임하였고 위원장 추천으로 ‘공대연구보고’의 편집위원으로 발령받았는데 위원장은 필요할 때 보고하라며 모든 편집 실무를 나에게 일임하였다.


서울대학교 공대연구보고 제9권 제1호 편집진 및 담당 분야
위원장 :

황종흘


부위원장 :

박천경(기계 금속 분야)


위원 :

이재곤(섬유 재료 분야)
주종원(건축 건설 분야)
이충웅(전기 전자 분야)
이화영(화학 화공 분야)
이정인(자원 토목 분야)


간사 :

김효철(조선 항공 분야)




서울대학교 공대연구보고 제9권 제1호 편집진 및 담당 분야
위원장 :

황종흘


부위원장 :

박천경(기계 금속 분야)


위원 :

이재곤(섬유 재료 분야)
주종원(건축 건설 분야)
이충웅(전기 전자 분야)
이화영(화학 화공 분야)
이정인(자원 토목 분야)


간사 :

김효철(조선 항공 분야)




학장은 해외에서 학위를 취득하신 학자셨는데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편집업무처리를 명확히 하며 예산은 낭비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대학에 재학하던 시기에 일어난 419와 516을 거치며 학생들이 정풍운동을 일으켜 학술 활동이 정체된 상당수의 교수가 대학을 떠나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학장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편집 실무를 맡아야 하였다. 같은 시기에 나는 학과장업무에 더하여 대한조선학회의 편집업무도 맞고 있었으므로 연 6회의 학술지 발간 실무를 담당하여야 하였다. 공대 연구보고 발간에서는 원칙에 따라 심사위원을 비공개로 위촉하였으나 투고논문을 심사할 수 있는 가까운 전공의 교수 수가 많지 않아 엄정한 심사를 진행할수록 투고자가 심사자를 나름대로 유추하여 뜻하지 않은 갈등이 빈번히 일어나 이를 수습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77년 공대 연구보고를 편집하던 시기에는 원로교수 한 분이 투고한 논문을 해외 과학자로 귀국한 젊은 신임교수에 심사를 의뢰하였다. 심사를 맡은 교수는 투고논문의 실험결과가 1930년대에 제작한 계측 장비로 얻어진 결과라며 실험결과의 신뢰도를 인정받도록 보완 설명을 요청하였다. 심사의견서를 들고 원로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는데 의견서를 살피고 격노하여 심사를 누가 하였는지 밝히라 하였다. 심사위원을 밝힐 수 없어 꾸중을 들으며 버티다가 퇴근 버스를 타지 못하고 일반 교통편으로 퇴근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원로교수는 잠 못 이루며 교수명단을 놓고 심사 교수를 짐작한 후 다음 날 테니스 코트에 있던 심사를 담당한 교수를 불러내 꾸중하시었다. 나는 비밀을 누설하였다고 원망하는 젊은 교수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려 통근 버스에서 함께 내려 주점을 찾아야 하였다.

학장은 항상 적은 예산이라도 원칙에 맞지 않게 사용하여야 한다며 학과에서 예산을 사용하려면 학과장이 직접 학장의 승인을 받으라 하셨다. 예컨대 학과예산으로 볼펜을 사려면 수량의 적정성을 설명하여야 하였는데 학장께서는 볼펜은 공문 작성과 같은 공적 업무에만 사용하여야 하고 교수가 강의 준비와 같은 개인 업무에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당부하곤 하였다. 편집 실무를 담당하며 발생하는 갈등을 풀어보려 가깝게 지나지 않던 교수와 주점을 찾을 때는 학장의 예산사용 지침을 잘 알기에 편집 예산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아 주머니를 털곤 하였다. 자연히 편집위원 임기가 끝나면 개인적 부담도 줄려니 생각하며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게 되었고 후임자가 오더라도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예산을 절감하여 후임자에게 넘겨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예산을 절약하였다.

1977년 연말이라 기억하는데 연구보고 편집을 마치고 편집위원장에 업무 종료를 보고하고 후임 편집자 선정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학장께서 구성한 후임 편집진의 실무위원에 개략적인 편집업무를 설명하고 학장이 마련한 신구 편집위원 모임 자리에 참석하였다. 조계사에 가까운 한정식집이었는데 누구나 편한 마음으로 찾기에는 부담스러운 고급스러운 음식점이었으나 나에게는 편집업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었다. 다음 날 후임 편집 실무위원을 불러 예산집행 실적을 설명하고 집행 잔액을 인계하려 서무 행정실을 찾았다. 편집 예산집행 잔액을 후임자가 쓸 수 있도록 행정조치를 요청하였는데 예산을 소진하여 후임자가 사용할 예산은 없다고 하였다. 남아 있어야 할 예산이 바로 전날 신구 편집위원 모임비용으로 집행되었음을 알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야만 하였다.

45년 전 함께 편집에 참여하였던 위원 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 셨으며 가장 젊은 편집위원이었던 나 또한, 이미 80을 넘긴 지 여러 해에 이르렀다. 어쩌다 30대 중반이었던 45년 전의 기억 속 세상을 회상할 때면 불현듯 젊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날 아쉽게 생각하였던 일들도 80을 넘기면서부터는 일이 일어나야만 하였던 사정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교수가 혼자의 생각을 마음에 가두어 두지 않고 위원들과 함께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학장은 편집비를 절약하여 얻어진 예산 잔액을 편집위원으로 수고한 위원들을 위로하는 비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임자가 좀 더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며 젊은 날 미숙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