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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의 명반 사냥 이야기 서른여덟 번째:




나용수
원자핵공학과 교수



나용수
원자핵공학과 교수


혼(魂)이 담긴 난초(蘭草)의 향기
“김죽파 (金竹波) – 가야금산조”
LP (성음, 음반번호 : SEL-100 102)


김죽파(金竹波)는 처음으로 산조의 틀을 짰다고 알려져 있는 김창조(金昌祖, 1865~1919)의 친손녀로 1911년 2월 19일에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 예명은 운선(雲仙)이다. 조부 김창조로부터 직접 가야금을 사사하였고, 김창조의 수제자인 한성기(韓成基, 1899~1950)도 사사하였으며, 이후 자신만의 독자적인 산조 세계를 펼쳤다.

김죽파는 생후 10개월 만에 모친을 잃고 조부와 조모 손에 자랐다. 영암을 떠나 광주로 이사 간 8세부터 조부로부터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고, 풍류, 산조, 병창 순으로 학습하였다. 기생조합이었던 전주의 권번(券番)에서 활동하던 장님 김복실(金福實)로부터 가곡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조부가 인후염이 악화되어 사망하자 부친 김낙권(金洛權)은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남천으로 가게 된다. 거기에는 죽파를 비롯해서 부친이 새로 맞이한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리고 조모가 있었다. 평소 김죽파가 가야금 타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아버지는 산조 구음(口音)이나 소리를 흥얼거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계모도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조모는 죽파만 데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전라남도 목포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파에게 양부모를 구해준다. 양아버지인 양기환(梁基歡)은 자식이 없었지만 조선일보 지국장으로 풍류를 즐겨 집에 음악가들을 자주 초대하였고, 그중에는 조부 김창조의 수제자인 한성기도 있었다. 양기환은 죽파가 11세가 되던 해 한성기를 아예 집으로 초빙하여 3년여 동안 같이 지내면서 죽파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소위 ‘입주 개인 과외’였다. 게다가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식사 시간과 잠깐의 쉬는 시간 이외에는 계속 가야금만 타는 ‘집중 과외’였다. 이렇게 양아버지의 교육열로 죽파는 김창조로부터 한성기로 내려오는 산조가락을 몸에 익히게 된다.

죽파의 실력은 조금씩 소문을 타게 되고, 12세에는 나주 출신 명창 김창환(金昌煥)이 전라도 출신의 명인 및 명창을 규합하여 결성한 예술인단체인 ‘협률사(協律社)’에 한성기와 함께 참가하여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하게 된다. 13세가 되었을 때, 한성기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라며 죽파의 집을 떠났다.

죽파는 장흥 최고 유지의 아들이었던 김용호와 첫사랑에 빠지지만, 집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후 조모를 모시고 상경하여 조선 권번에 적(籍)을 두었다. 이때 가야금 이외에도 판소리는 김봉이(金鳳伊), 임방울(林芳蔚), 김정문(金正文), 승무는 한성준(韓成俊), 그리고 병창은 오태석(吳太石), 심상건(沈相健), 박동준(朴東俊) 등에게 사사하였다. 이 중 오태석은 특히 죽파를 아껴서 그에게서 심청가 중 <황성 올라가는 대목>과 <방아 찧는 대목>, 적벽가 중 <새타령>을 사사하였다.

죽파가 전라도에서 배운 풍류를 타면 사람들이 모두 그녀만 바라봤다고 할 만큼 인기가 높아졌고, 20세에 경성방송국(KBS의 전신)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하며 최고의 여류 가야금 연주자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음반 취입도 하게 된다. 죽파가 21세가 되던 1931년, 부친이 38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하자, 다음 해 20세 연상인 한량 이민택과 혼인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과의 결혼이 조모와 고모의 반대에 부딪히자 자살을 기도하고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성대를 상해 소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모든 연주 활동을 중단한다.

이민택은 전당포로 생활을 하며 풍류객들을 집에 청해 풍류를 즐겼으며 이승환(李承煥)에게 거문고 풍류를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오늘날 죽파가 타는 민속 풍류 중 <상령산>과 <중령산>의 골격을 이루게 하였다. 가난했지만 죽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죽파 나이 32세에 남편 이민택 또한 폐결핵으로 임종을 맞이하고, 남편의 부탁으로 남편의 친구였던 이완규(李完珪)가 죽파를 후처로 거두게 된다. 이완규는 경성제대를 졸업한 고고한 양반이었고, 그의 장남은 경성제대를 졸업한 판사였다. 이완규는 풍류를 즐겼지만, 집에서 가야금 소리가 담 밖을 나가는 것을 꺼려 죽파는 가야금을 탈 수 없었다. 가족의 배려로 죽파는 이완규와 단둘이 돈암동에 살림을 차리게 되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전쟁으로 인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던 중 남편 친구 부인 이난향의 생일에 초대되어 가야금을 탔는데, 그 자리에는 장택상(전 국무총리) 부인, 신용익(대한항공의 창업주) 부인, 김태선(전 서울시장) 부인, 신익희(정치가) 부인 등 당대 명사 부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죽파의 연주에 감동하여 죽파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죽파는 음악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고, 당대 산조가 유행하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현재 여자들이 가야금산조를 많이 타게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할 만큼 당시 죽파의 가야금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죽파는 당시 널리 연주되던 성금연(成錦鳶), 김윤덕(金允德) 산조에 단모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조부 김창조와 한성기로부터 배운 가락에 더해 <세산조시>를 작곡하였다. 그리고 김창조류와 다른 산조류를 심상건(沈相健)에게 사사하고, 음반을 들으면서 한갑득(韓甲得) 거문고산조를 독공하였다. 53세 무렵에는 한일섭(韓一燮)에게 아쟁산조를 사사하였다. 남편 이완규는 1977년 타계하는데, 작고 이틀 전에 죽파가 인간문화재 드는 것을 권유한다. 이윽고 1978년 1월 2일, 죽파는 68세 나이에 연주 활동과 후진양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받게 된다.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79년 9월 19일 국립국악원에서 주최한 제1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 참가한다. 약 60년 만에 다시 선 무대였지만 연주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수많은 공연에 초대받게 된다. 1979년 조부 김창조 가락에 진양조 7장단, 중모리 4장단, 자진모리 4장단, 휘모리 51장단과 무장단의 일부분, 그리고 세산조시 7장단 등 많은 가락을 추가하여 약 55분에 이르는 김죽파류 산조를 완성시킨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는 가야금산조의 시초로 알려진 조부 김창조에게 배운 가락과 김창조의 수제자였던 한성기에게 전수받은 가락에 자신의 가락을 가미하여 완성한 가락이기에 비교적 가야금산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가야금산조의 대표로 인정받고 있다.

죽파는 이후 이재숙, 김정자 등 서울대 교수를 포함하여 대학 출신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후학양성에 힘쓰고, 일본을 포함하여 왕성한 연주 활동 및 음반 출반을 하다가 1989년 79세의 고령으로 일본 동경 공연을 끝내고, 뿌리깊은나무의 <가야금산조전집>을 취입한 후, 그해 5월 19일 타계하였다. 1989년 3월 6일 동경 빅터아오야마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연주는 그의 유작으로 남아 예전미디어에서 “인간문화재 죽파 가야금 연주집(유작음반)” CD로 발매되었다. 다른 산조의 휘머리 또는 단머리와 같은 뜻으로 쓰임1)
<그림> 김죽파 유작음반 (예전미디어 발매)


소개하는 음반은 1979년 성음사에서 LP로 출반 한 것으로 김죽파가 산조를 완성한 직후 녹음한 것이다. 곡의 구성은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세산조시’로 짜여 있으며 연주 시간은 45분 정도이다. 여러 가지 조(調)가 다채롭게 변화하며 섬세한 농현과 저음이 풍부한 가락으로 이어져 심오한 멋을 풍긴다. 다른 산조에 비해 담담하고 마치 바람에 꽃잎이 나부끼는 듯하여 운치가 있다. 음반은 워낙 인기가 있었기에 많이 발매되어 현재 그다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김창조는 죽파에게 "가야금은 재주로 타는 것이 아니라 혼이 손에 떨어져야 한다"라고 했다 한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장작 패듯 하여서는 안되고, 잔잔한 호수에 잔물결 치는 소리로 나가다가 별안간 물속에서 용 못된 이무기가 한 번 용트림하여 솟아올랐다가 내려가 막 물이 출렁거리고 거품 내듯 해야 한다"라고 했다. 죽파는 조부의 가르침을 그의 연주에 고스란히 담았다.

김죽파의 본명은 김난초(金蘭草)이고 죽파는 호이다. 난초는 깊은 산속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 고귀하게 묵묵히 꽃을 피우며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죽파 김난초 선생은 무대에서 멀어져 있었을 때조차 음악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은은한 향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녀의 혼이 담긴 이 향기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김죽파 가야금산조 연주 실황 https://www.youtube.com/watch?v=D4HGDoeycj8
<그림> 죽파(竹波) 김난초(金蘭草, 1911년~1989년)
https://blog.naver.com/jhgcf14/220964318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