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향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고레에다의 유사 가족과 진짜 아버지 되기
애니메이션과 장르 소설의 영상화에 몰두해 창작 시나리오의 전통이 약화되고 있는 최근의 일본 영화계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작가주의적 인장의 흐름을 이어가는 소수의 감독 중 하나이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연출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 사회의 주류에서 비껴난 인물들이나 복지 시스템의 이면 등을 다루는 등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도, 주제론적으로 오즈 야스지로로 상징되는 일본의 가족주의적 풍속화를 잇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국내에도 많은 팬층을 지닌 그가 한국 영화의 연출을 맡게 된 첫 작품이 <브로커>(2022)이다.
이 영화는 국내 제작사인 ‘영화사 집’이 제작하고 한국 배우와 스탭들이 참여하는 영화로, 고레에다 감독에게는 전작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La vérité)>(2019)에 이어 국외의 제작 환경에서 협업한 두 번째 작품이다. 칸 영화제와도 인연이 깊은 고레에다는 2004년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로 야기라 유야의 남우주연상, 2013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로 심사위원상을, 2018년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2022년 <브로커>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하면서 칸의 주요상을 모두 휩쓴 몇 안 되는 감독이 되었다.
<브로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밤, 교회의 아동 복지 시설에서 운영하는 무연고 영아 위탁 장소인 베이비 박스 앞에 한 여자가 아기를 두고 가고 이 아이를 두 남자가 자신들의 집에 데려간다. 이 두 남자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송강호)과 시설의 베이비 박스 관련 업무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 중인 동수(강동원)로, 이들은 입양이 필요한 양부모를 찾아 그들에게 사례금을 받고 아기 우성이를 넘겨주려 한다. 그런데 아기를 놓고 간 엄마인 소영(이지은)이 다음날 센터로 찾아와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려 하고,
이 영화는 국내 제작사인 ‘영화사 집’이 제작하고 한국 배우와 스탭들이 참여하는 영화로, 고레에다 감독에게는 전작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La vérité)>(2019)에 이어 국외의 제작 환경에서 협업한 두 번째 작품이다. 칸 영화제와도 인연이 깊은 고레에다는 2004년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로 야기라 유야의 남우주연상, 2013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로 심사위원상을, 2018년 <어느 가족(万引き家族)>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2022년 <브로커>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하면서 칸의 주요상을 모두 휩쓴 몇 안 되는 감독이 되었다.
<브로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밤, 교회의 아동 복지 시설에서 운영하는 무연고 영아 위탁 장소인 베이비 박스 앞에 한 여자가 아기를 두고 가고 이 아이를 두 남자가 자신들의 집에 데려간다. 이 두 남자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송강호)과 시설의 베이비 박스 관련 업무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 중인 동수(강동원)로, 이들은 입양이 필요한 양부모를 찾아 그들에게 사례금을 받고 아기 우성이를 넘겨주려 한다. 그런데 아기를 놓고 간 엄마인 소영(이지은)이 다음날 센터로 찾아와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려 하고,
위기를 느낀 동수와 상현은 소영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을 밝히며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회유하려 한다. 소영은 이들의 말을 비웃으면서도 아이에게 양부모를 찾아주고 사례금을 나누는 일에 같이 동참하기로 한다. 한편, 상현과 동수의 행각을 지켜보며 잠복 중이던 경찰 수진(배두나)과 후배 이형사(이주영)는 이들을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미행하게 되면서 그 기묘한 여정을 뒤따르게 된다.
<브로커>는 영화 곳곳에서 감독의 전작들이 떠오르게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돌봄과 양육의 문제에 있어 어른들의 책임감과 윤리를 묻는다는 점에서 <아무도 모른다>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연결되며, 시스템의 어두운 곳에서 유사 가족을 이루는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인 <어느 가족>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인물의 측면에서도 그러한데, 송강호가 맡은 상현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에서 배우 릴리 프랭키가 맡은 아빠역의 캐릭터와 비슷한 설정이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사회적 통념과 규율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나름대로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지니며 사람 좋은 웃음과 유약한 모습을 보여 어쩐지 그 악행을 미워할 수 없는 존재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에서 가족을 계속 묻는 것은 우리가 흔히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보편적인 가족 이미지(부모에 아이가 둘인 가족)에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상이 고레에다의 영화에서는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재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아버지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고레에다의 가족이 가부장적인 가족담론을 해체하고 유사 가족적인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능력한 아버지 때문이다.
그런데 상현이 아이를 ‘유괴’한 것이 아니냐는 소영의 말에 한사코 손사래를 치면서, 아기에게 필요한 부모를 만나게 해주고 부모에게는 아이를 얻게 해준다는 점에서 본인이 ‘큐피드(‘트’가 아니라 ‘드’로 발음)’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을 보면 사기꾼 같다가도 영화 내내 우성에게 진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살피는 모습에서 그 ‘선의’가 반드시 거짓만은 아님을 설득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면의 프레임 한 쪽 끝에 천진하게 누운 아기 우성이 위치해 있고, 재봉틀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종종 상현의 시선이 우성에게 오래 머무른다. 영화 내내 엄마인 소영보다 상현과 동수가 우성을 더 많이 안아주고 먹이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돌봄의 실질적인 역할을 그들이 하고 있기도 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아플리케로 새긴 글자들의 스티치가 실로 이어진 것 같은 서체로 프레임의 오른쪽 대각선 아래에 고요히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브로커(/큐피트)’라는 제목은 영화의 구심점이 상현에게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말에서 보여주는 상현의 선택은 이 유사 가족의 가짜 가장이 진짜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브로커>는 영화 곳곳에서 감독의 전작들이 떠오르게 한다. 어린아이에 대한 돌봄과 양육의 문제에 있어 어른들의 책임감과 윤리를 묻는다는 점에서 <아무도 모른다>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연결되며, 시스템의 어두운 곳에서 유사 가족을 이루는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인 <어느 가족>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인물의 측면에서도 그러한데, 송강호가 맡은 상현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어느 가족>에서 배우 릴리 프랭키가 맡은 아빠역의 캐릭터와 비슷한 설정이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사회적 통념과 규율을 어기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나름대로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지니며 사람 좋은 웃음과 유약한 모습을 보여 어쩐지 그 악행을 미워할 수 없는 존재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에서 가족을 계속 묻는 것은 우리가 흔히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보편적인 가족 이미지(부모에 아이가 둘인 가족)에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상이 고레에다의 영화에서는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재하거나 무능력하거나 아버지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고레에다의 가족이 가부장적인 가족담론을 해체하고 유사 가족적인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능력한 아버지 때문이다.
그런데 상현이 아이를 ‘유괴’한 것이 아니냐는 소영의 말에 한사코 손사래를 치면서, 아기에게 필요한 부모를 만나게 해주고 부모에게는 아이를 얻게 해준다는 점에서 본인이 ‘큐피드(‘트’가 아니라 ‘드’로 발음)’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을 보면 사기꾼 같다가도 영화 내내 우성에게 진심 어린 시선을 보내며 살피는 모습에서 그 ‘선의’가 반드시 거짓만은 아님을 설득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면의 프레임 한 쪽 끝에 천진하게 누운 아기 우성이 위치해 있고, 재봉틀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종종 상현의 시선이 우성에게 오래 머무른다. 영화 내내 엄마인 소영보다 상현과 동수가 우성을 더 많이 안아주고 먹이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돌봄의 실질적인 역할을 그들이 하고 있기도 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아플리케로 새긴 글자들의 스티치가 실로 이어진 것 같은 서체로 프레임의 오른쪽 대각선 아래에 고요히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브로커(/큐피트)’라는 제목은 영화의 구심점이 상현에게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말에서 보여주는 상현의 선택은 이 유사 가족의 가짜 가장이 진짜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2. 생명의 교환 가치와 부모 됨에 관한 질문
고레에다의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규칙과 법률 혹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어느 가족>에서 아빠 위치에 있던 오사무가 쇼타에게 진열된 물건은 아직 주인이 없으니 훔쳐도 괜찮다고 말하거나 학교는 혼자서 배울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브로커>에서 상현은 유기된 영아를 훔쳐다가 돈을 받고 넘기는 불법적인 영아 매매 행위를 ‘선의’로 설명한다. 그러한 인물들의 태도는 영화에 기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그들이 저지르는 일이 사회적 통념에는 어긋나지만 그들 스스로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 것이라며 항변하고 영화의 전반부에 이들을 그려내는 방식이 그들이 하는 행위에 비해서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무능하지만 착해보이는 이 가장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도,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을 때 관객들은 판단을 유보하고 진퇴양난의 모호한 상황에서 영화의 진행을 지켜보게 된다.
중학생이 된 딸을 둔 이혼한 세탁소 사장인 상현은 도박 빚에 시달리고 있고,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아동 복지 시설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아기를 빼돌리고, 소영은 가출 청소년으로 성매매를 하다 아이를 낳았으며, 어린 해진은 입양이 되는 나이가 지나버렸지만 늘 입양을 꿈꾸며 축구 선수가 되려는 장래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기 우성은 태어난 순간부터 존재를 부정당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부모 후보군에게 자신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접점이라곤 전혀 없는 다섯 명이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자연스레 동류의식이 형성된다. 사회 보편적인 통념에 있어 이 유사 가족은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동수는 보육원에서 자란 자신과 달리 부모 밑에서 우성이 자라게 하려고 한다는 명목으로, 소영은 자신 같은 엄마가 아니라 제대로 된 부모를 우성에게 주려 한다는 이유로 이 여정에 함께 하는데, 각자 내세우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돈의 금액이 높은 부모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아이를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가지는 부정적인 맥락을 완전히 저버리기는 힘들다. 아이를 돈과 교환하는 행위를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아이의 얼굴에 대해 품평하며 마치 물건을 깎듯 사례비를 깍으려 했던 (입양을 원하던)첫 번째 부부의 뻔뻔함에 소영은 욕설을 내뱉지만, 이들은 그 행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아이를 사적으로 입양시키는 행위 자체의 불법성과 생명을 교환 가치의 경중으로 상정하는 문제 등이 웃고 떠들며 고물차와 모텔을 떠도는 이들의 여정을 마냥 웃으면서 바라볼 수만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소영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녀의 죄과가 쉽게 용서받기 어려운 사회적 인식 아래 놓여 있는 것임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더욱 극심해진다. 고레에다 영화의 뛰어난 점은 이 양가감정의 그 미묘한 흔들림을 잘 포착한다는 데에 있다.
인물들이 같이 이동하며 추억을 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이상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이미지를 현시할 때 그들의 즐거움 뒤편에 자리한 실제 현실의 규율들이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음험한 진실들을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즐거운 평온함을 목도할 때 나쁜 쪽은 현실 그 자체일까, 인물들일까 고민하는 사이 불편함이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고레에다는 인물들에게 사회적 단죄를 내리는 쪽보다는 인물들을 통해 전도된 가치를 발화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듯 보인다. <어느 가족>에서 엄마 역의 노부요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 그들 가족의 비정상성을 추궁당하자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일갈하는 것처럼, <브로커>에서는 아이가 팔리길 기다리는 사람이 저들인지 자신들인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자신들이 브로커같다고 말하는 경찰 수진의 고백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브로커>에서 하고 있는 질문은 ‘생명’과 그 생명에 대한 올바른 결정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을 ‘생명’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나은 방향일지에 대한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 성매매를 통해 생긴 아이의 존재는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이 나은가.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이 아빠나 그의 부인의 말대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인가. 책임도 못 질 아이를 태어나게 한 소영이 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생명을 지켰다는 점에서 정당한 일인가. 범죄자인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베이비 박스에 버리는 게 나은가. 베이비 박스에서 시설로 이관되어 보육원 등에 가는 것 보다 비정상적인 루트로라도 부모를 만들어 주는 게 옳은가. 단순하지 않은 이 많은 질문을 짊어진 채 선뜻 어떠한 한 방향으로도 영화가 기울지 못한다. 다만, 그러한 이유를 들어 엄마인 소영에게 모든 죄과를 덮어씌워 단죄하려는 것만은 피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영의 캐릭터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난 아키라의 ‘엄마’에서 발생해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어딘지 어린 티를 아직 지닌 채 ‘엄마처럼은 안 보이는’ 외양이면서도 아이를 낳아 무책임해 보이는 방기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육자로서의 성숙함보다는 친구 같은 천진한 모습을 보이던 <아무도 모른다>의 엄마는 결국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다며 아이를 놓고 집을 나가버린다. 안정되지 않은 애정 관계와 준비되지 않은 출산을 여러 번 거치면서 무신경한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듯 보이던 엄마의 모습은 결국 감은 눈에 흘러내리던 눈물방울들로만 겨우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소영은 그 엄마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제작 후기에서 이러한 문제에 있어 아이 엄마에게 지나치게 화살이 돌아가는 걸 경계하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영이 브로커의 일원이 되어 아무도 보증할 수 없는 곳으로 아이를 내몬다는 점에서 대책 없이 천진하던 <아무도 모른다>의 엄마보다 더 문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사회적 규율과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처지와 위치에 대해 소영은 좀 더 냉소적인 인식에 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부모되기는 이로써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낳은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시간으로 정립되는 것이라는 첫 번째 명제를 제기했다면, <어느 가족>에의 결말에서 노부요가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라는 질문에 수사관이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라고 답한 것을 통해 다시금 첫 번째 명제를 무화시켜 부모라는 존재의 가치가 탈취나 임의적인 설정들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두 번째 명제에 이르렀다. <브로커>에 이르면,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식을 버린 엄마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발화가 엄마인 소영 자신을 통해 이뤄지면서 혈육과 의지를 넘어선 책임감의 무게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중학생이 된 딸을 둔 이혼한 세탁소 사장인 상현은 도박 빚에 시달리고 있고,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아동 복지 시설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아기를 빼돌리고, 소영은 가출 청소년으로 성매매를 하다 아이를 낳았으며, 어린 해진은 입양이 되는 나이가 지나버렸지만 늘 입양을 꿈꾸며 축구 선수가 되려는 장래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기 우성은 태어난 순간부터 존재를 부정당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부모 후보군에게 자신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접점이라곤 전혀 없는 다섯 명이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자연스레 동류의식이 형성된다. 사회 보편적인 통념에 있어 이 유사 가족은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동수는 보육원에서 자란 자신과 달리 부모 밑에서 우성이 자라게 하려고 한다는 명목으로, 소영은 자신 같은 엄마가 아니라 제대로 된 부모를 우성에게 주려 한다는 이유로 이 여정에 함께 하는데, 각자 내세우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돈의 금액이 높은 부모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아이를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가지는 부정적인 맥락을 완전히 저버리기는 힘들다. 아이를 돈과 교환하는 행위를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아이의 얼굴에 대해 품평하며 마치 물건을 깎듯 사례비를 깍으려 했던 (입양을 원하던)첫 번째 부부의 뻔뻔함에 소영은 욕설을 내뱉지만, 이들은 그 행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아이를 사적으로 입양시키는 행위 자체의 불법성과 생명을 교환 가치의 경중으로 상정하는 문제 등이 웃고 떠들며 고물차와 모텔을 떠도는 이들의 여정을 마냥 웃으면서 바라볼 수만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소영의 비밀이 밝혀지고 그녀의 죄과가 쉽게 용서받기 어려운 사회적 인식 아래 놓여 있는 것임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은 더욱 극심해진다. 고레에다 영화의 뛰어난 점은 이 양가감정의 그 미묘한 흔들림을 잘 포착한다는 데에 있다.
인물들이 같이 이동하며 추억을 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이상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이미지를 현시할 때 그들의 즐거움 뒤편에 자리한 실제 현실의 규율들이 끊임없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음험한 진실들을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즐거운 평온함을 목도할 때 나쁜 쪽은 현실 그 자체일까, 인물들일까 고민하는 사이 불편함이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고레에다는 인물들에게 사회적 단죄를 내리는 쪽보다는 인물들을 통해 전도된 가치를 발화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듯 보인다. <어느 가족>에서 엄마 역의 노부요가 경찰에 체포된 이후 그들 가족의 비정상성을 추궁당하자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일갈하는 것처럼, <브로커>에서는 아이가 팔리길 기다리는 사람이 저들인지 자신들인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자신들이 브로커같다고 말하는 경찰 수진의 고백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브로커>에서 하고 있는 질문은 ‘생명’과 그 생명에 대한 올바른 결정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을 ‘생명’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나은 방향일지에 대한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 성매매를 통해 생긴 아이의 존재는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이 나은가.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이 아빠나 그의 부인의 말대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인가. 책임도 못 질 아이를 태어나게 한 소영이 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생명을 지켰다는 점에서 정당한 일인가. 범죄자인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베이비 박스에 버리는 게 나은가. 베이비 박스에서 시설로 이관되어 보육원 등에 가는 것 보다 비정상적인 루트로라도 부모를 만들어 주는 게 옳은가. 단순하지 않은 이 많은 질문을 짊어진 채 선뜻 어떠한 한 방향으로도 영화가 기울지 못한다. 다만, 그러한 이유를 들어 엄마인 소영에게 모든 죄과를 덮어씌워 단죄하려는 것만은 피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영의 캐릭터는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난 아키라의 ‘엄마’에서 발생해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어딘지 어린 티를 아직 지닌 채 ‘엄마처럼은 안 보이는’ 외양이면서도 아이를 낳아 무책임해 보이는 방기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육자로서의 성숙함보다는 친구 같은 천진한 모습을 보이던 <아무도 모른다>의 엄마는 결국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다며 아이를 놓고 집을 나가버린다. 안정되지 않은 애정 관계와 준비되지 않은 출산을 여러 번 거치면서 무신경한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 듯 보이던 엄마의 모습은 결국 감은 눈에 흘러내리던 눈물방울들로만 겨우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소영은 그 엄마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제작 후기에서 이러한 문제에 있어 아이 엄마에게 지나치게 화살이 돌아가는 걸 경계하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영이 브로커의 일원이 되어 아무도 보증할 수 없는 곳으로 아이를 내몬다는 점에서 대책 없이 천진하던 <아무도 모른다>의 엄마보다 더 문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사회적 규율과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처지와 위치에 대해 소영은 좀 더 냉소적인 인식에 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레에다 영화의 부모되기는 이로써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낳은 것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시간으로 정립되는 것이라는 첫 번째 명제를 제기했다면, <어느 가족>에의 결말에서 노부요가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라는 질문에 수사관이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라고 답한 것을 통해 다시금 첫 번째 명제를 무화시켜 부모라는 존재의 가치가 탈취나 임의적인 설정들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두 번째 명제에 이르렀다. <브로커>에 이르면,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라도 자식을 버린 엄마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발화가 엄마인 소영 자신을 통해 이뤄지면서 혈육과 의지를 넘어선 책임감의 무게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내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3. 이상화된 낙관주의적 결말의 의미
가족에 대한 주제가 강조된 고레에다의 영화 중 비교적 온건하고 희망적인 결말을 취한 것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걸어도 걸어도>(2008),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라면, 냉정하고 비관적인 색채가 더 짙은 작품이 <아무도 모른다>나 <어느 가족>일 것이다. <브로커>는 전자에 더 가깝다. 영아 매매나 인물의 어두운 전사(前史)가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다소 이상화된 낙관주의에 기댄 희망적인 색채로 끝난다.
비관적이던 이전 작품들과 비슷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의 차이에서 변별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물들의 범법 행위가 드러나면서 이 유사 가족만의 공동체에 마치 경찰 권력이 방해물처럼 등장하는 것은 <어느 가족>과 비슷한 설정이다. 어느새 이 이상한 가족에 전염되고 공감하고 있었던 관객의 마음에 경찰 수사로 상징되는 국가 공권력의 규율은 불현듯 현실태의 가치관을 들이밀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움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일갈한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서는 경찰이 결말부에서 등장하여 할애된 분량과 감정이 적었다는 점에서 냉담한 판관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다면, <브로커>에서는 초반부터 등장한 경찰이 인물들의 행위를 지켜보다 끝내 그 딜레마에 같이 머무르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의 변별점은 젊은 남성 인물의 설정에 대한 것이다.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여성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아주 어리거나 청소년기의 여자아이에서부터 젊은 여성, 중년이거나 노년의 여성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에 반해 젊은 남성의 역할은 고레에다의 가족극에는 거의 존재감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어른 못지않은 어린 남자아이가 어른을 대신하거나, 늙고 나이들었지만 어딘지 철들지 못한 악의 없이 무능력한 남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때론 아버지가 되었으면서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중년 남자가 돋보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영화가 칸에서 받은 남우주연상이 <아무도 모른다>의 소년 야기라 유야와 <브로커>의 송강호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작들에서 젊은 남성 이미지의 흔적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매일 조금씩 물건을 사러 오는 아키라에게 유통기한이 다 된 음식들을 나눠주던 편의점 청년(카세 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쇼타와 아이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도움을 주면서도 짐짓 거리감을 두고 관여하지 않으려던 태도를 보인다. 이 인물은 아이들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던 감독의 스탠스가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그런데 <브로커>에서 동수는 그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던 출신이어서 아기 우성에게 완전히 이입되며 소영과의 관계에서 영화의 당위론적인 측면에 복무하는 대사들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역할이다. 즉, 이전의 편의점 직원이 가진 연루되지 않으려는 냉소적인 태도에 비해 동수는 소영과 우성에게 완전히 연루되며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이상화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결국 우성이가 자라서 해진이나 동수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외면의 목소리에 맞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어떤 영화를 해줄 수 있을까? 이 작업을 하면서 항상 그 질문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브로커>는 삶을 직시하려 했고, 내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인물들 속으로 발을 내딛은 영화입니다.”라는 제작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결국 그의 영화들에서 인물들에 대해 갖게 되는 미묘한 양가 감정을 늘 현실의 냉혹함을 당도하게 하여 마무리하곤 했던 고레에다의 세계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발화가 작품에 직접 투영된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비관적이던 이전 작품들과 비슷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두 가지의 차이에서 변별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물들의 범법 행위가 드러나면서 이 유사 가족만의 공동체에 마치 경찰 권력이 방해물처럼 등장하는 것은 <어느 가족>과 비슷한 설정이다. 어느새 이 이상한 가족에 전염되고 공감하고 있었던 관객의 마음에 경찰 수사로 상징되는 국가 공권력의 규율은 불현듯 현실태의 가치관을 들이밀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움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일갈한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서는 경찰이 결말부에서 등장하여 할애된 분량과 감정이 적었다는 점에서 냉담한 판관으로서만 기능하고 있다면, <브로커>에서는 초반부터 등장한 경찰이 인물들의 행위를 지켜보다 끝내 그 딜레마에 같이 머무르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의 변별점은 젊은 남성 인물의 설정에 대한 것이다.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여성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아주 어리거나 청소년기의 여자아이에서부터 젊은 여성, 중년이거나 노년의 여성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에 반해 젊은 남성의 역할은 고레에다의 가족극에는 거의 존재감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어른 못지않은 어린 남자아이가 어른을 대신하거나, 늙고 나이들었지만 어딘지 철들지 못한 악의 없이 무능력한 남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때론 아버지가 되었으면서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중년 남자가 돋보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영화가 칸에서 받은 남우주연상이 <아무도 모른다>의 소년 야기라 유야와 <브로커>의 송강호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작들에서 젊은 남성 이미지의 흔적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매일 조금씩 물건을 사러 오는 아키라에게 유통기한이 다 된 음식들을 나눠주던 편의점 청년(카세 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쇼타와 아이들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도움을 주면서도 짐짓 거리감을 두고 관여하지 않으려던 태도를 보인다. 이 인물은 아이들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던 감독의 스탠스가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을 재현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다.
그런데 <브로커>에서 동수는 그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던 출신이어서 아기 우성에게 완전히 이입되며 소영과의 관계에서 영화의 당위론적인 측면에 복무하는 대사들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역할이다. 즉, 이전의 편의점 직원이 가진 연루되지 않으려는 냉소적인 태도에 비해 동수는 소영과 우성에게 완전히 연루되며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희생하려는 이상화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결국 우성이가 자라서 해진이나 동수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와 외면의 목소리에 맞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어떤 영화를 해줄 수 있을까? 이 작업을 하면서 항상 그 질문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브로커>는 삶을 직시하려 했고, 내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인물들 속으로 발을 내딛은 영화입니다.”라는 제작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결국 그의 영화들에서 인물들에 대해 갖게 되는 미묘한 양가 감정을 늘 현실의 냉혹함을 당도하게 하여 마무리하곤 했던 고레에다의 세계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발화가 작품에 직접 투영된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복되는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라는 대사가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감독이 작품의 균형 감각 대신 도의적인 윤리의식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짐을 지면서 우성이를 지켜내려 하는 장면과 부기처럼 덧붙여진 인물들의 후일담 역시 고레에다의 세계에서는 이례적인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우성이는 결국 자라, 자신이 태어난 것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감독은 외면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영화 중 드물게 냉소적인 전망을 배면에 깔지 않은 설명적인 결말이 다소 사족처럼 보인다면 그것 또한 감독의 의도에 잘 맞아 떨어진 감상이 될 것이다.